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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맛사의 입과 여호와 닛시의 손 (출 17: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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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맛사의 입과 여호와 닛시의 손 (출 17:1~16)


길을 가다가 혹은 놀다가 넘어지게 될 때 유달리 크게 우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꼭 어디를 크게 다쳐서 아파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동정을 사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고난 성격이 그래서 그런 경우도 있겠지만, 넘어질 때마다 매번 부모가 급히 달려와서 일으켜 주고 달래 주어 버릇하면 그런 맛을 본 아이는 바로 그 재미 때문에 절로 '울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에 가서는, 처음에 넘어졌을 때에는 울지 않다가도 누군가 주위에 사람의 기척이 있다 싶으면 금세 목청을 높여 동네가 떠나라고 울어대는 아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런 것을 잘 아는 부모는 아이가 땅바닥에 넘어져도 일부러 일으켜 주지 않고 스스로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런 식으로 교육받은 아이는 엄살을 부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요 실제로 좀 다친 경우에도 찡얼거리지 않고 혼자 툭툭 털면서 일어나게 됩니다.
주위에 자기의 울음소리를 들어 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더 크게 우는 아이 - 바로 그런 아이가 어른 가운데에도 있습니다.
  
조금만 불만스러운 일이 생기면 그저 목이 터져라 짜증을 내고 분노를 터뜨림으로써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한테로 모으는 데에 일종의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인간 사회에나 교회 안에 늘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행군에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되자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일과를 불편하게 만드는 온갖 짜증스러운 일에서부터, 그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위험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고생들이 날마다 꼬리를 물다시피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당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 크게 두 부류의 반응들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어려운 일들이 생길 때마다 그저 목청만 높이고 핏대를 올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또한, 비록 소수이기는 했지만, 닥치게 된 어떤 어려운 일에 대하여 불만을 터뜨리기보다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전적으로 힘을 모으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교회가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때에 그 교인들이 이 둘 중에서 과연 어떤 쪽을 따라서 대처해야 마땅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불평과 다툼의 목소리만 높이는 입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으로 빠지게 됩니다. 

광야행군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이라는 곳에서 바로 그런 꼴을 보였습니다.
  
본문 1절부터 7절에 "1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2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3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4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6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7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여행길에 흔히 겪게 되는 어려움, 즉 식수를 얻지 못하는 문제에 또 한 번 봉착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 이하에 보면 그들은 출애굽 직후에 '마라'에 도착했을 때에도 똑같은 어려움을 당하면서 "모세를 대하여 원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르비딤"에서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것은 '원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서, 본문 2절에 두 번 반복되어 기록된 '다툼'이라는 반응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투덜거리고 불평하던 버릇이 점점 더 발전되면서 이제는 아주 대놓고 모세와 한바탕 싸우려는 단계에까지 도달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사막에서 물이 떨어졌다는 것은 정말 짜증스럽고 신경질 날 만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청을 높여 우는 것'이 상투적인 버릇이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더 불평 잘하는 사람, 남보다 더 큰 목소리로 모세에게 싸움을 거는 사람들이 점점 더 돋보이게 되고, 그런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다 보니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분위기와 흐름이 점점 더 곁길로 빠져 버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처럼 보였지만, 그들이 그처럼 모세에게 대든 것은 사실상 엄청난 죄악을 내포하고 있는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 직접 대든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자기에게 불만을 터뜨리면서 달려들자 모세는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행위는 단지 모세 자기와 다투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는 바로 '여호와를 시험하는' 극악무도한 짓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입니다.

그 '여호와를 시험하는 행위'란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7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를 테스트한 것으로서 두말할 여지없는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인 "르비딤"은 나중에 7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므리바"는 '다투다'라는 뜻이고 "맛사"는 '시험하다'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다툰 것'은 곧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직결되는 행위였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세를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로 임명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으며 또한 그 이스라엘 백성을 그처럼 물이 없는 광야로 인도하신 분 역시 사실은 모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본문 1절에서도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그런 반역은 물론 지도자 모세로 하여금 낙심에 빠지도록 했습니다.
4절에 기록된 대로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라고 하나님께 하소연하게 될 정도였던 것입니다.
  
모세는 자기로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잘 이끌어 가 보려고 최선을 다 했었는데도 오히려 백성들로부터는 힐난과 모욕을 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이미 여러 차례 맛보았었습니다. 
모세도 그 정도였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더하셨겠습니까? 
잠시 목이 마르게 되었다고 해서 아예 하나님의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해서부터 불신앙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도 정말 역겹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자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오도록 해 주시기는 하셨지만 그 "맛사 또는 므리바"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 곳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를 시험한' 불신앙의 대명사로 남게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어떤 단체 속에서 무슨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유독 불만의 목청을 높이기를 좋아하는 사람, 또한 별것 아닌 일을 두고도 매사에 시빗거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보통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지혜라든지 해결책을 실행하는 능력은 거의 없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나라 사회가 그처럼 '다투기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점점 더 신나게 만들어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평불만의 여론들만 모아서 기치를 높이 드는 사람,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위한 싸움을 잘 거는 사람들이 이 사회 속에서 절로 유명인사가 되고 그 집단의 리더까지 되고 있는 형편인 것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상호협조적인 의지나 자세는 전혀 없이 그저 '목청 크고 잘 다투는' 재주만 가진 사람들이 데모대의 주동자나 노동조합의 간부나 압력단체의 대표자나 혹은 국회의원까지 되곤 하는 것을 우리가 흔히 보지 않습니까?

바로 이런 분위기를 교회 안에까지 끌어들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특히 사회에서는 자기 앞가림조차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에만 들어오면 마치 제 세상 만났다는 듯이 온갖 일에 목청을 높이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마치 종일 힘든 일로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집에 들어와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짜증을 냄으로써 풀려고 하는 못난 남편처럼, 교역자와 성도들을 그런 식으로 자기 '스트레스 해소의 대상'처럼 여기는 정말 지지리도 못난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인들은 자기 집안에서 무슨 문젯거리가 생기면 갑자기 자기 교회 목사의 설교의 은혜가 떨어졌다고 불평하는가 하면 심방 오는 전도사에게 온갖 교회에 대한 불만들을 다 늘어놓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업이 잘 되지 않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될 때 자기가 헌금생활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을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평상시에 아무 문제 삼지도 않았던 교회의 경상비 지출에 대하여 갑자기 꼬치꼬치 따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교인들치고 자기 가정이 평안하고 물질적으로 잘 될 때라고 해서 교회봉사에 충성하고 헌금생활에 정성을 다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정말이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못 보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교인들일수록 교회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마치 자기가 무슨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듯이 목사나 당회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무슨 '개혁자'나 되는 듯이 교회가 하는 일에 대한 비판의 여론을 선동하려 하기 마련입니다. 
  
지상교회란 물론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정말 그처럼 심보가 고약한 교인들이 적지 않게 섞여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회에 있는 '피해망상증'의 분위기를 그런 식으로 교회 안으로까지 확장시켜서는 절대로 아니 되며, 그렇게 걸핏하면 '우는 버릇'을 적어도 교인들은 결코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당회나 제직회나 공동의회나 기관 월례회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그처럼 '다투는 소리'를 높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크게 들려야 할 소리는 이미 정해져 있고 그 하나밖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는 물론 바로 '성경의 소리'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큰 소리는 바로 이 '하나님 말씀의 소리' 하나만 있으면 충분한 것이고, 여기에 다른 무슨 사람의 소리가 섞이게 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잡음에 불과한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서 걸핏하면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높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악이라는 사실을 늘 잊지 말고, 특히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일수록 이런 '불신앙의 다툼'의 소리가 호리라도 내 입에서 나오지 않도록 두려운 마음으로 늘 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도 전투력을 모으고 기도의 손을 함께 들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승리를 누리게 됩니다. 

바로 아말렉과의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여호수아와 모세가 그런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8절 이하 16절의 말씀에 "8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9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10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11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12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3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1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5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6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식수의 문제로 곤란을 겪었던 바로 그 르비딤에서 또 하나의 더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아말렉" 족속의 공격을 받게 된 일이었습니다.
아멜렉은 족보를 따지면 에서의 후손인데 당시 가나안 남쪽에 있던 사막지대의 유목민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말렉 족속의 생활 거주지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 생활했던 지역과 거의 중첩이 될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사막지역인지라 가뜩이나 여러 가지 생활 자원이 부족한 곳인데 바로 그런 땅에서 두 민족이 부대끼게 되었으니 자연히 서로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싸움은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여튼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또 하나의 큰 위기를 맞이한 것이었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아주 호전적인 민족이 그들에게 선공을 취해 왔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출애굽 이래 처음으로 임하게 된 실전이었고 또한 아말렉 족속은 비겁하게도 이스라엘 행군 대열에서 제일 약한 후미 쪽으로 기습을 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신 25:18).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을 때, 모세는 신속하고도 적절히 대처했습니다.
그는 우선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임명하면서 즉시 "사람들을 택하여" 전투부대를 조직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모세에 대한 충성심의 면에서 볼 때에도 물론 그 일에 적임자였지만, 또한 그가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라는 점도 그 임무를 수행하기에 딱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에브라임 지파는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여호수아는 바로 그 자기가 속한 지파를 중심으로 하여 그 외의 열한 개 지파들과 함께 조직적인 전투부대를 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족의 존폐가 걸린 큰 위기가 닥쳐왔을 때에도 모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아니하고 이처럼 일단 싸워야 할 사람들의 전투력을 총동원시켰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전투를 수행함에 있어서 그저 "아말렉과 싸우라"고 명하고, 모든 구체적인 전술은 여호수아에게 완전히 일임했습니다.
  
그런 후에 모세 자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그는 이스라엘과 아말렉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그의 "손을 들고" 있었습니다.
  
여기 손을 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전진하라는 군사적 신호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의 손을 펴시어서 도와주실 것을 간구하는 기도의 손이었습니다.

모세가 그처럼 기도의 손을 들고 있는 동안은 이스라엘 군대가 이기고 그 손이 피곤하여 내려오게 되면 아말렉 군이 우세해졌습니다.
그것을 눈치 챈 아론과 훌은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앉게 하고 그들이 양쪽에서 모세의 팔을 들어 올려서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도록" 도왔습니다.
  
그렇게 모세의 기도가 계속된 결과, 그 남은 과정은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는" 신나는 연전연승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을 승리한 후 모세는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 즉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라고 지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승리가 오로지 능력의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결과임을 고백하는 이름이었으며, 그런 하나님의 도우심은 바로 모세가 기도의 손을 계속 들고 있는 중에 그 아말렉과 전투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속적으로 내려졌던 것이었습니다.

같은 장소 르비딤에서 두 번째 어려움을 맞게 되었을 때 모세는 지도자로서 마땅히 보여 주어야 할 대응자세를 즉각 취했습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단 힘을 모아서 맞서 싸우게 하는 동시에 또한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비는 기도를 드렸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이 광야로 우리를 이끌어 내어 아말렉 족속에게 맞아 죽게 만들었다.'는 따위의 '우는 소리'나 '다투는 소리'가 나올 여유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모든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죽을 힘을 다해서 싸우게 되었고, 또 아론과 훌은 모세의 기도하는 것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맛사'나 '므리바'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아니라 '여호와 닛시'라는 영광스러운 족적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나타내는 반사작용이 되어야 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길 때 그저 신경질을 내고 짜증과 원망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누구라도 다 할 수 있는 제일 쉬운 일이지만, 그것이 문제 해결에 무슨 눈곱만한 도움이라도 될 수 있겠습니까?
  
가장이 만약 그렇게 행동하면 가족들 모두가 다 더욱 의기소침해질 뿐이며 교회의 지도자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온 교인들이 순식간에 우왕좌왕하면서 사태는 순식간에 악화될 뿐일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 저와 여러분은 반드시 이 여호수아와 모세의 자세를 취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난관을 한시라도 빨리 돌파하기 위하여 일단 몸으로 뛰어들면서 전력을 투구하는 동시에 또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에 전심을 다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양쪽 다 할 수 있으면 가장 이상적이지만 형편이 되지 못할 때에는 둘 중에 하나, 즉 몸소 전투부대의 일원이 되든지 아니면 기도로 돕는 지원부대의 일원이 되든지 최소한 하나에는 반드시 소속되어야 합니다.

집에 불이 나면 한시라도 빨리 일단 소방서에 신고부터 하고 도움을 청해야지, '도대체 누가 잘못해서  
불이 났나?'하고 집안 식구끼리 서로 따지고 책임전가만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교회에 무슨 큰 어려움이 닥치면 정말이지 열 일 다 제쳐놓고 모든 교인들이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하는 기도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함께 타고 가던 배가 풍랑을 만나 깨어져서 침몰의 위기를 당하게 되면 모두가 다 물을 퍼내든지 수리를 돕든지 간에 하여튼 너나 할 것 없이 일단 힘을 다 모아서 배를 고쳐 놓고 보아야 같이 살 수 있는 것이지, 서로 나 몰라라 하고 팔짱만 끼고 있다가는 다 물에 빠져 죽는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교회 역시 자신의 영혼을 지켜 주는 영적 모선인 줄을 깨닫는다면 혹시 그 방주에 무슨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럴수록 더욱 교회부터 살려놓고 보는 데에 모든 교인들이 전력을 다 모아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교인들이 매사에 이렇게 헌신의 손을 합하고 기도의 손을 함께 들게 되면 그 얼마나 멋있는, 그 얼마나 힘 있는 교회가 되겠습니까?
그런 교회는 쓸데없는 시끄러운 다툼이 일어날 틈조차 없을 것입니다.
새벽마다, 금요일 밤마다, 모일 때마다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는데 거기에서 누가 무슨 다른 잡음을 낼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큰 일들을 숨 돌릴 여가도 없이 계속 맡겨 주실 때마다 당회원들로부터 시작하여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생애 최고의 것'과 '생애 전부의 것'을 다 투신하여 죽어라고 싸우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그 무슨 마귀의 시험이 끼어들 틈이 생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처럼 그 어떤 힘든 일이 닥쳐도 그럴 때마다 더욱 '싸우는 손'과 '기도드리는 손'을 함께 모음으로써, 그 어려운 전투를 오히려 '여호와 닛시'의 큰 축복과 승리의 결과로 바꾸어 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리 무슨 일이 있다 해도 부모님이 보고 계시는 자리에서 자식들끼리 목청을 높여 싸울 수 있겠습니까?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앞에서 자기 자식을 때리거나 야단치는 부모를 보고서도 우리는 버릇없고 무례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께서 지금 이 교회 안에 임재하고 계심을 의식하는 교인이라면 좀 짜증스럽고 어려운 일이 만약에 있다손 치더라도 어찌 그 앞에서 함부로 불평의 언사나 시비의 목청을 높일 수가 있겠습니까?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결코 그럴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중심으로 세워져 있는 교회에 대하여서 불평의 소리를 늘어놓거나 하나님의 종으로서 충성되이 섬기고 있는 교역자들에 대하여서 늘 불만만 가득 차 있는 교인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교만과 반역에 스스로 빠져 가고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가 무슨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그것을 두고 '다툼'의 소리만 높이고 그 문제에 대하여 책임전가를 시킬 대상만을 찾아 '비난'하는 것을 마치 무슨 '열심 있는 정의파 교인'의 의무인 양 하는 것은 실상은 오로지 자신의 '불신앙'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부끄러운 행위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못난 울보 아이' 같은 교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좀 넘어지고 약간 다쳐도 그저 가볍게 훌훌 털고 일어날 줄 아는 씩씩한 아이 같은 자세를 영적으로 발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정에 무슨 사고가 나도 결코 짜증내지 않고 일단 가장부터 자기 손을 걷어붙이고 문제해결에 나서면서 온 가족들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드릴 줄 아는 것은 그 얼마나 멋진 '위기관리능력'이겠습니까?

교회가 진행해 나가고 있는 앞길에 '아말렉'같은 방해물이 등장할 때에도 조금도 당황하거나 흔들리지 아니하고 목사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성도들이 '평화시대에 순교하는 각오'로써 모든 전투력을 집중시키고, 반면에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는 그 어떤 부정적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비는 기도의 손들을 더욱 높이 함께 드는 교회의 모습은 그 얼마나 멋지고도 영광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우리 교회의 35년 역사가 바로 그러했지 않습니까? 
을지로에서 맨손의 개척을 시발점으로 하여 자체 예배당 건물 하나도 없던 시절에 먼저 시작했던 고려신학교와 선교회 운동, IMF 시절에 착공했던 강서성전 건축, 헌당승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또 한 번 오직 믿음으로 쟁취한 교육관 2천 평 - 이런 첩첩 난관을 통과해 오는 동안 만약 이 교회 안에서 그저 '다투는 입'의 소리만 높았다면 우리 교회는 한참 옛날에 이미 끝장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교회는 '인간적으로는 다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그 모든 난관들을 만날 때마다 오직 '싸우는 손'들과 '기도드리는 손'들만 더욱 하나로 뭉침으로써 지금까지 '위기돌파'와 '역전승'의 연속으로 쾌속진군해 왔던 것이었습니다.
  
'불평하고 다투는' 자들은 결국 '맛사의 불신앙인'으로 끝날 수밖에 없지만 오직 '헌신하고 기도하는' 성도들만 '여호와 닛시의 승리'를 나눌 수 있음을 깨닫고, 이제 2008년의 남은 날들과 앞으로의 모든 생애를 통하여 바로 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돌파하고, 그 뒤에 기다리고 있는 더 큰 축복과 영광의 자리에 함께 나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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