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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손을 내밀어 주를 만져라 (마 9: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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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을 내밀어 주를 만져라 (마 9:18~22)


주님은 바로 앞 절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 공동체가 새 술이요 새 부대입니다. 무엇이 새로운가? 주님은 오늘 말씀에서 그 새로움의 정체를 분명히 밝힙니다. 주님은 혈루증이라는 오래된 병을 치유하셨습니다. 한 직원, 곧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렸습니다. 예수의 공동체는 병이나 죽음의 원인을 해석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병자를 위로하고 장례식이나 치러주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교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병에 걸리면 그 원인을 죄에 돌리며 회개를 요구하거나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죽음 앞에서 피리를 불며 슬퍼하며 떠들썩하게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것이 오래된 술이요, 낡은 가죽 부대된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일반 인간사의 모습이었습니다.

칼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일찍이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세계에 대해서 아무리 멋진 해석을 한다해도 무슨 소용입니까? 중요한 것은 변화입니다. 바꾸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의 공동체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병의 원인을 해석한 것이 아니라 치유했습니다. 죽음 앞에 절망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려내는 믿음을 가진 공동체였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새 술로 부름 받은 자들의 삶이요, 새 부대된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저는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신 사건과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려낸 사건을 두 번에 걸쳐 묵상하려 합니다. 특히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과 마가복음 5장을 함께 묵상하려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 합니다. 공관(共觀)이라는 말은 함께 펼쳐놓고 본다는 뜻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건이라도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기록하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그들은 매우 높은 자율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오늘 두 사건을 기록하는 태도는 마태와 마가가 뚜렷이 다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능력을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하기 위해서 주변의 상황들이나 사람들의 모습을 많이 생략했습니다. 주변 색체가 현란하면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마가는 비교적 솔직히 그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자를 고치신 사건을 마가복음은 11절에 걸쳐 자세히 풀어놓았는데 반하여 마태복음은 단 4절로 축약해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치유의 생생한 현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마가복음과 함께 펼쳐놓고 보아야 도움이 됩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예수님 앞에 나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의 모습이나 상황은 매우 다양합니다. 그들이 살아온 인생이나 사연만큼 달랐습니다. 시몬의 장모는 병을 앓고 있는 침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거라사의 군대 귀신들렸던 사람은 무덤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친구들의 손에 들려 지붕에서 내려졌던 중풍병자는 공중에 들린 채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세리였던 마태는 세관이라는 부끄러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비록 짧은 한 구절로 끝나기도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 만남의 모습들은 그들의 깊은 사연들을 짐작케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혈루증 앓는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또한 특별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은 모두 그 앞에 나아와 은혜를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들과는 달리 몰래 뒤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 사라지려 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처럼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아가지 못하고 그늘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려 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20절의 짧은 한 구절에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 이 한 구절이 모든 것을 설명해줍니다. 혈루증은 여자 자궁에서 피가 계속해서 흐르는 병입니다. 피가 흐르는 것을 구약에서는 매우 부정하게 보았습니다. 레위기 15장에서는 전체 33절에 걸쳐 이 유출병을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출병 있는 여자가 만진 질그릇은 깨뜨려버리고 목기는 물로 깨끗이 씻을 것(레15:12)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마치 문둥병자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공적인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여자로서의 생명도 끝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성이나 임신이 불가능합니다. 이 여자가 12년 동안 겪었을 외로움과 부끄러움을 생각해 보십시오. 피가 계속해서 흐르니 냄새도 났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잊혀진 여인이요, 저주받은 여인입니다. 거라사 귀신들린 자만 무덤 사이의 쇠사슬에 묶여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여인 또한 사회제도의 쇠사슬에 묶이고, 스스로 자신은 저주 받은 인생이라 규정하며 자기 자존감에 상처를 내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혈루증을 치유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던 바도 아닙니다. 마가복음 5장 26절에서는 이 여인의 형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절망적입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다,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다, 아무 효험도 없고, 도리어 중하여졌다. 이 여인은 원래 가난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주 가난하면 의원은 생각도 못합니다. 그러나 의원들은 치료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여인의 돈만 노리던 삯군들이었습니다. 나아지기보다는 더 심해졌고, 이제는 있던 재산도 다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없으면 없으려니 하고 살면 그만이지만 건강하던 사람이 병이 들고, 있던 사람이 가난해지면 더 견디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누구입니까? 이 여인은 단지 고통 받는 한 여자를 의미합니까? 아닙니다. 이 여인은 바로 고통 받는 이스라엘의 가난한 민중들을 상징합니다. 여기 이 여자가 12해를 고통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이는 실제 12년 동안 병을 앓았다는 뜻도 있지만 12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는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받은 축복을 갈취해 간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 선지자요 사악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의 돈을 다 빼앗아간 무능하고 탐욕스런 의사들이었습니다. 일찍이 예레미야는 거짓 지도자들에 대해서 이렇게 비난한 바 있습니다. 

예레미야 8장 10절과 11절입니다.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가볍게)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이들은 겉으로 대충 약만 바르고는 다 나았다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마가복음 12장 39, 40절입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자들! 예수님은 혈루증 앓는 한 여인을 통해 당시의 무능력하고 자기 이익에만 빠른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에 세상 지도자나 소위 영적 지도자나 모두 두려워해야 합니다. 자기들은 지도자라고 하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만 전혀 능력은 없으면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려 합니다. 신령한 채 하며 모든 영광을 누리며 양들의 물질만 갈취합니다. 양들은 경제적 위기, 영적인 곤고함 속에서 병들고 굶어죽는데 전혀 무기력하고 관심도 없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은 기도해야합니다. 말씀의 풍성한 꼴을 주어야합니다. 권력과 물질에만 욕심을 두지 말고 가장 가난한 자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자는 이처럼 이리저리 수탈을 당하고 고립되었습니다. 전혀 희망이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언 12년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문둥병을 고치시고, 중풍병자도 일어나게 만들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분은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서 아무라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한줄기 빛이 비추고 있었지만 여인은 주님 앞에 감히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은 죄인과 세리보다도 못한 부정한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이 여인에게 이런 믿음이 생겼습니다. ‘저 분은 정말 능력이 많으신 분임에 틀림없어. 그 분에게 내 상처에 손을 대어달라는 부탁은 감히 못하겠고, 내가 그 옷자락만 만져도 낫게 될 거야.’ 아마 이 여인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나왔을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 접근하려 했지만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 밀려서 저 앞서 가고 계십니다. 여인은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뒤에서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겉옷을 만졌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을 덥석 붙잡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대었다, 만졌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살짝 대었을 뿐입니다. 이는 이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움츠러들어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자신의 부정이 예수님에게 전달될까봐 두려워, 또 예수님이 자기 존재를 알아볼까봐 두려워 살짝 대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가복음 5장 29절에서는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고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순간 그분의 몸에서 흘러나온 따뜻한 기운이 자기 몸을 뜨겁게 하면서 동시에 그 습하고 역겨웠던 혈루 근원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 주님께 손 내밀어 그분을 만지십시오. 그분의 사랑은 꽁꽁 얼어붙은 남극의 빙하를 녹일 정도로 뜨겁습니다. 우리 가슴이 냉냉한 것은 예수님과 접촉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부르짖을 때 그분은 우리의 근심과 염려를 녹여 버리십니다. 메마른 사막에 꽃이 피고, 말라버린 강 위에 물이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여자가 손을 대는 동시에 예수님은 자기 몸에서 그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았습니다. 마가복음 5장 30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수많은 사람들이 떠밀고 수많은 사람들의 손이 예수님의 옷과 등에 다았지만 예수님은 그 중 가냘픈 한 여인의 손끝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돌아보시며 누가 자기에게 손을 대었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처럼 예민하지 못하고 둔감했던 제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에워싸 밀고 있는데 누구 손이 닿았는지 어떻게 알겠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리들 사이에서 연신 그 여인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예민한 눈과 귀를 가지고 있습니까? 현대인들에게는 아마 불가능할 것입니다. 아침마다 출근길에서, 비좁은 지하철 안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장애물이요 피해야 할 거추장스러운 존재들입니다. 현대 도시문명은 매일같이 우리로 무정하게 사는 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하철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사람,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 멍하니 광고물만 보고 있는 사람, 열심히 책을 읽고, 이어폰을 끼고 열심히 무언가 듣고 있는 사람들. 이 사람 한 사람 한 사람들은 다 사연이 있고, 또 그 안에는 아픔들을 간직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 갈 길을 가기에 바쁠 뿐입니다. 

교회 또한 그렇습니다. 비록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옆의 사람이 무슨 아픔이나 근심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골길로, 한적한 곳으로 자주 나가셨는지 모릅니다. 사람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현대 사회가 아무리 무정하고 각박해진다하여도 예수님처럼 그 예민한 눈과 귀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을 살리는 것은 사랑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삽니다. 현대 우리 한국사회가 각박해진 것은 사랑을 잃고 자기만을 아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공감(共感)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공감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무리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정확히 혈루증 앓는 여인의 아픔에 공감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공감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신비적인 능력으로 그 아픔을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요는 관심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우연 중 겉으로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냉소적인 말 한 마디는 그 마음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지나치게 허세를 떠는 말 속에서 우리는 그 사람이 불안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깔끔한 사람은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음을, 지나치게 너저분한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그 가정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오바마가 미국 4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오바마가 선거에서 승리한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사람들이 중요하게 들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그의 탁월한 연설입니다. 오바마의 연설에 사람들이 곧잘 눈물을 훔치는 것을 화면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케네디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이래로 그런 감동적인 연설은 처음이었다고 고백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연설은 단지 그 기교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삶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런 연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바마의 연설이 탁월한 이유는 그가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감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바마 또한 이것을 인정합니다. 공감이 자기 윤리의 핵심이고 그는 이 공감의 능력을 자기 어머니로부터 배웠다고 말합니다. 오바마는 어린 시절 자신이 받았던 교육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머니가 정말 화내는 경우는 하나였습니다. 누군가 괴롭힘을 받을 때, 누군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입니다. 제가 그런 짓을 하는 걸 보시면 정말 불같이 화를 내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네가 그 사람의 입장이라면, 네 기분이 어떻겠니?’ 이 간단한 생각을 어려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생각은 언제나 저와 함께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기르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은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 존재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오바마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끌어안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오바마를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든 것은 이 공감의 능력입니다. 오바마를 슈퍼스타로 만들었던 2004년 전당대회 연설의 한 대목입니다. 

“시카고 남부 흑인 빈민가에 글을 못 읽는 아이가 있다면 비록 제 아이가 아니더라도 저한테는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어르신이 약값을 낼까 집세를 낼까 고민하고 있다면 비록 그분들이 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라도 제 인생은 가난해집니다. 어떤 아랍계 미국인 가족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거나 정당한 법 절차를 적용 받지 못한다면 그건 제 자유가 위협받는 겁니다. '나는 내 형제를 지키고 내 누이를 지키는 자라' 이 나라를 움직이는 것은 이런 기본적인 믿음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에게도 필요한 능력이 이 공감의 능력입니다. 가난한 자와 약자와 고통을 당하는 자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느끼는 능력입니다. 불행히도 우리 정치사는 힘 있고 표가 되고 돈 많은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지 서민들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번 선거를 보면 미국에서 거듭났다고 고백하는 복음주의자들의 74%가 맥케인을 지지했고 불과 24%만 오바마를 지지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종교 정치적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연설에 나타난 평면적인 이유만을 볼 때 맥케인보다는 오바마가 더 예수님을 닮은 신앙인처럼 보입니다. 우리들의 눈은 어느새 예수님의 예민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놓쳐버리고 교리나 따지는 차가운 바리새인의 눈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오바마 또한 실제 정치 행위 과정에서 이 따뜻함을 잃어버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만든다 할지라도 공감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고 그런 점에서 오바마의 길은 아직까지는 옳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여인을 찾았던 것은 여인의 육신뿐만 아니라 그 영혼을 고쳐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인이 가진 영혼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다른 무엇보다도 너무 오랫동안 혼자 외로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여자를 찾아서 무리 가운데 세웁니다. 여인은 이번에는 뒤에 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정면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막5:33). 주님은 여자로 하여금 자기 일을 고백하게 하고 그 부정함에서 이제는 깨끗하게 되었음을 모든 무리들이 알 수 있게 합니다. 이제 이 여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부끄러운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입은 당당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그 여자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절입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은 그 여자를 딸이라 부릅니다. 그 여자는 이제 부끄럼 없는 이스라엘의 딸입니다. 그녀는 군중 속에 묻혀버린 존재가 아니라 그 작은 신음 소리에도 예민하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소중한 하나님의 딸입니다.

그런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선언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이신데 어떻게 우리 믿음이 구원을 보장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판단보다 예수님의 판단이 옳습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호수에 물이 가득 차 있다 할지라도 수도관이 없으면 먹을 수 없습니다. 엄청난 양의 전기를 비축하고 있다 할지라도 전선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신선한 물이 우물에 있다 할지라도 두레박이 없으면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믿음의 관계가 그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며 엄청난 능력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먹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물과 전기를 끌어들이는 수도관이요, 두레박이요, 전선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그의 등에 손을 대었던 사람들이 어디 한두 명 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때 구원 받았던 사람은 어째서 혈루증 앓는 여인 한 사람뿐이었습니까? 그녀만 믿음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그 옷을 만지자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이 흘러와 여자의 병을 낫게 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은 간절함입니다. 믿음은 신뢰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향하여 믿음의 손을 내어미십시오. 그분이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그분이 무정해서라거나 손이 짧아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손을 내어 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분앞에 우리의 진심을 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손을 내어미십시오. 부르짖으며 그 옷자락을 붙잡으십시오. 주님은 여인을 향하여 “딸아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두 이 은혜대로 근심과 문제에서 놓여 평안하고 병에서 놓여 건강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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