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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례식] 거룩함을 향한 출발 (롬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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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함을 향한 출발 (롬 6:1~11) 


마음이 선량한 어떤 부자가 읍내에 나갔다가 구걸하는 거지 아이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물어보니 고아였다.
-너 아저씨하고 함께 살래?
-네!

그 아이를 데려다가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혔다. 맛있는 음식을 먹였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호적에 올렸다. 이제 그 거지 아이는 그 부잣집의 아들이 된 것이다. 그런데 밤에 그 아이는 침대에서 자지 않고 방구석에 구부리고 자고 있었다. 아이를 안다가 침대에 눕혔다. 아침에 가보니 역시 방구석에 구부리고 자고 있었다.

그리고 공부를 시키기 위해 학교에도 데리고 갔다. 그런데 늦게까지 돌아오질 않아서 찾아나섰는데 읍내에서 구걸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야, 너는 이제 내 아들이야. 우리 가족이야. 그리고 여긴 너의 집이란다. 그리고 이 방은 네 방이야. 여기 있는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란다.

그렇게 말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는 여러 차례 집을 나가서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그 아이를 찾아왔다. 그리고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해주었다. 이 아이는 비로소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다시 가출하지 않았다. 그 집 주인의 아들로 반듯하게 잘 자라게 되었다.

이 예화를 통해서 본문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 7절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의롭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문제가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거리에서 데려온 고아 아이와 같이 이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본문 1-2절에서 지적하고 있다.

(롬 6: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롬 6: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분명히 우리의 신분이 ‘의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성향이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 동료인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죄사함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죄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까?’ 그러자 상대방이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를 덧 입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여러분, 이 대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은혜를 받기 위하여 죄를 짓는다는 말은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려는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롬 5:20의 말씀에 대한 오용이라 할 수 있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의 죄에 대하여 깊이 회개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뜻이지, 죄를 짓는 자에게 은혜를 더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 교계에 유력한 목사님들 가운데는 과거에 폐병을 앓은 병력 있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래서 이전에 이런 말들을 하기도 했다. ‘유명한 목사가 되려면 폐병이나 암에 걸렸다 낫는 경험이 있어야겠네!’ 그러나 그분들이 유명해지기 위해 폐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니까 은혜 받으려고 죄를 범한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 가운데 그런 위험에 빠질 것을 염려하면서 강력하게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를 경험한 신자들이 예전의 습관대로 범죄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다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느니라.“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의롭다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죄의 자리로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원인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한 마디로, 세례 받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례에 대한 중요성과 그 의미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관심’이라 할 수 있다. 아니면 남들이 받으니까 유익이 될 것 같아서 따라서 받았다는 말이 된다 예)진중 세례식.

여기서 말하는 세례는 일차적으로 물세례라고 말할 수 있다. 세례는 문자적으로 ‘잠근다’ 또는 ‘씼는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세례의 방법에도 물을 뿌리는 방법 말고도 침례교에 행하는 ‘침례’라는 방법이 있다. 강이나 또는 수조에 세례자를 담그는 의식을 행하는데 훨씬 더 실감나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에 잠글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일으킬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러나 세례라는 의식이나 방법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게 하는 것이 아니요 천국에 들어감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 속에서 고백의 증거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가 단순히 그리스도인됨의 표시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과거 중세 천주교에서 면죄부를 남발했던 과오를 반복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죄와의 단절이 없는 로마교회의 신자들에게 대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1. 세례의 의미

사도 바울은 세례를 한 마디로 ‘연합’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것이다. 이 연합은 두 가지 면에서 이뤄졌는데...

1)죄에 대한 죽음이다.
본문 중에서 사도 바울은 계속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2절에서 11절까지 한 번도 빠짐 없이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왜 ‘죽음’이라는 용어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사용하고 있는가? 그 이유를 6절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예수님과 함께 죽을 때 죄의 문제가 해결된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셨기 때문이다.

2)살리심이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살아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신자는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게 될 것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신앙이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이 세상에서 죽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산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은 믿는 자 심령 속에 내주하신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갈 2:20상)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에 함께 동참하는 것이다. 신자가 더 이상 죄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사실과 부활의 영원한 소망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2. 세례의 목적

그렇다면 세례의 목적은 무엇인가? 4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있는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은 것은 그 부자의 사랑이었다. 그 아이는 아무런 공로가 없으나 그 부자에게 은혜를 입은 것이다. 이젠 그의 거처가 거리의 처마밑이나 다리밑이 아니라 그 부자의 집이다. 이제 그 부잣집 아들로서 살려면 그 집안의 습관을 배워야 한다. 

마찬가지로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옛사람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들이다.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 생명을 얻었으면 그 가운데로 걸아가야 한다. 다시 죄인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죄에게 종노릇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성화’라 한다. 거룩한 삶을 향한 출발점에 선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룩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3. 거룩함을 향한 성도의 자세

1)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
2절,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나의 신앙고백이 진실한 것이라면 더 이상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 이미 우리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성들에 대하여 죽이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성령께 의지하면서...

2)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몸이 되었다는 사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황해도 완악에 유명한 깡패였던 김익두가 예수 믿고 난 후에 장인 어른에게 부고장을 보냈다고 한다. ‘김익두는 죽었습니다.’ 이전의 내가 아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성령으로 인치셨다. 떨어지면 고통스러울 뿐이다. 주님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라.

3) 거룩한 선포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라’는 말은 의식화하라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향하여 선포하는 것이다. 내 마음 속에 혈기가 일어날 때,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다’ ‘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나의 존재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거리에 버려진 고아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아 죄악의 자리에서 떠나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예수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의 습관을 익혀야 한다. 

오늘 세례 받는 분들과 교우 여러분들을 향하여 권면의 말씀을 드린다.

1. 오늘 세례 받은 분들에게

이 세례 의식을 통해서 오늘부로 ‘나는 죽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죽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나도 살아났다. 이제는 죄의 줄을 끊고 거룩한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2. 세례 받은 분들에게

이미 과거의 어느날, 하나님 앞과 교회 앞에서 서약했던 일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동안 죄악을 끊지 못하고 죄의 자리에 머물렀던 것을 회개하라.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으로서 다시 한 번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결단하라.

(벧전 4: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새 생명 가운데로 행하는 삶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주님과 함께 하며 새 생명의 길로 걸어가는 복된 인생이 되길 축원한다. (원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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