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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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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가를 만났는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보편화된 신앙과 성경이 제시하는 신앙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많은 기독교적인 용어들에 대하여 <참된>이란 수식어를 붙여서 사용해야 한다. 기독교와 참된 기독교, 성도와 참된 성도, 기도와 참된 기도...

우리의 신앙이 성경을 벗어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십자가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설교자들조차도 십자가를 지적으로만, 교리로서만, 알고 있지 그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아름다운 숲을 실제로 걸어보지 못하고, 단순히 그림으로 보는 것과 같아서 생동감이 없다. 

그러나 참된 신앙, 성경적인 신앙을 갖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인격적으로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하여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맛본 사람들이다.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사람만이 주님을 사랑하게 된다. 체험하지 못한 예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만져보지 못한 십자가를 위해 어떻게 자신을 헌신할 수 있겠는가?

이 시간 조용히 질문하자. “나는 십자가를 만났는가? 내가 경험한 그 십자가는 나를 사로잡고, 나로 하여금 십자가 앞에 헌신하게 하는가?”

2. 초대교회와 다른 교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성경이 보여주는 초대교회의 모습과 너무 다르다. 그 이유는 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잊혀져 가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복음이 오늘날의 교회에서 단지 절기 때만 기억되고 있지 않는가? 사실 우리가 고난주간을 특별히 정해서 따로 지켜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는 항상 십자가의 복음을 기억해야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항상 십자가의 멧시지가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고, 십자가가 설교자나 성도들에게 고난주일을 연상시키는 설교주제가 되었다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했다. 초대교회사를 읽어보면 그들은 매주일 성찬식을 행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했다. 
왜? 그들은 모일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기억했을까? 
→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자신의 생애 가운데 가장 충격적이고,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을 통해 성도들의 삶이 거기에 붙잡혀 있었다. 교회가 있는 곳에는 언제든지 십자가 사건을 인하여 감격하는 교인들이 있었다. 그러한 교인들이 있는 교회는 십자가 사건을 말함으로써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십자가가 절기 때만 기억나는 메시지라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십자가 사건이 별로 의미없는 사건이었다는 의미인 것이다. 

십자가는 신약성경이 가장 강조하는 메시지이다.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건은 시간적으로 불과 하루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4복음서는 이 때 일어난 사건을 13장에 걸쳐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라. 십자가에 대한 선포없이 책장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십자가에 대한 교회의 선포로 이어지고 있다. 서신서들도 마찬가지이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를 자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형틀인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고백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에 대해서 십자가보다도 더 정확하게 말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한다. 당신에게도 십자가가 자랑거리인가?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 사건을 단지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일회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십자가가 자신에게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어떤가? 구원받은 이후에 십자가 사건이 당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3. 구별된 삶을 살게 하는 십자가

어떻게 성도가 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고,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댓가, 보상을 기대하고 그러한 삶을 산다. 이 세상에서 잘되고, 천국에서 상받기 위해, →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기적이지 않는가? 오히려 그보다는 이미 내게 주어진 십자가 사건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죄로 얼룩진 나의 모습,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전혀 합당치 않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 은혜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십자가의 정신에 지배를 받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단순히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성도의 삶을 온전케 하는 능력이 되는 것이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고>라고 하였을 때 그것은 이전에 일어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일회적 고난이나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체험한 일회적 체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현재완료 시제로 사용되었는데, 한 번 십자가에 못박힌 사건이 계속해서 현재까지 바울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유명한 모라비안 지도자인 진젠도르프 백작이 <그리스도의 초상화>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 그 그림에 적힌 글귀가 그의 인생을 뒤집어 놓았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내 널위해 죽었건만, 넌 날위해 무얼 하느냐?” 그는 이 질문에 오직 한가지 대답만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내가 가진 한가지 열정은 주님 한분뿐이다.>라고 고백하고 그의 남은 생애를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 

4. 자유를 주는 십자가

그 십자가 앞에 나올 때 십자가는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자유를 상실한 인간
자유란 무엇인가? 존 칼빈 -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할 수 있고 우리가 마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간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은 하지 못하는 아픔 속에서 산다. 자유하지 못한다. 자유하기는커녕 오히려 끌려다니고 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고, 하기 싫은 것을 어쩔 수 없이 행하는, 나도 어쩔 수 없는 그 무엇에게 이끌려 가고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데 가만히 보면 내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부려먹는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지만 죄에게 끌려 다닌다.  건강하고 싶은데 질병에 끌려 다닌다.
자녀를 내 맘대로 키우고 싶은데 끌려다닌다. 높이 올라가서 보면 사람들은 큰 조직 속에 한 부속처럼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깨달아야 겠다. 죄에 억매여 있고, 죄의 종된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하겠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는 자유케 하는 능력이 없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죄악의 사슬을 끊을 수 없다. 아무리 도덕적 결단을 내리고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이 사슬을 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요8:36절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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