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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에서 광풍을 만났을 때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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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광풍을 만났을 때 (막 4:35~41)

1. 삶의 광풍들

얼마 전 일본 오사카(大阪) 시 나니와(難波) 구의 한 DVD 방에서 46세의 한 남성이 한밤중에 불을 질러 15명의 목숨을 잃게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직장에서 정리 해고된 이 남성은 “사는 게 싫다. 빨리 죽고 싶다”며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그 사람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은 전철 막차를 놓친 30, 40대 샐러리맨, 사업에 실패하고 새 출발을 준비하던 50대 남성, 날품팔이 노동자 등 범인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6월 초에는 도쿄 한복판인 아키하바라(秋葉原)거리에서 길 가던 시민 7명을 살해하고 10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살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7월에는 도쿄 하치오지(八王子) 시의 한 서점에서 한 남성이 매장 직원을 칼로 찔러 살해한 일도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런 <묻지마 살인 사건>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길거리에서, 아무 때나,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일본에선 '도리마(通り魔)‘, 즉 ’길거리의 악마'라고 불립니다.

우리나라도 이런 사건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20일 오전 8시 15분 경, 서울 논현동의 D고시원에서 불을 지르고 피하는 사람들을 칼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2003년부터 그 고시원에 거주하던 ‘정○○’씨는 고시원에 화재를 일으킨 뒤, 화재연기를 피해 복도로 뛰어나온 피해자를 미리 준비하고 있던 칼로 찔러 6명을 죽게 하고, 총 7명을 다치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현장 검증 장면을 뉴스로 보다가 아직도 제 기억과 가슴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해자의 가족 중 한 사람, 중국 동포로 보이는 한 여자 분이 ”지금 집에 손이 오그라들어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아들이 있는데, 엄마가 돈 벌어 수술시켜 줄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이 무슨 날벼락이냐?“고 울부짖었습니다. 아마 이들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 모두가 이 날벼락 같은 일로 인하여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성실하게 살던 사람들, 실패한 이후 재기를 노리던 사람들, 가족들을 돌보고자 먼 타국으로 온 사람들 ․․․ 이들만이 아니죠. 어쩌면 이런 일을 저지른 사람 역시 삶의 광풍을 만난 사람들일 것입니다. 뜻하지 않는 삶의 광풍을 만나 그것을 왜곡되고 악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풀려했던 사람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들처럼 우리 모두 다 뜻하지 않은 삶의 광풍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그 바람은 우리를 피해가지를 않지요.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영국 출신의 가수 Sting의 “Shape of MY HEART”라는 노래를 우리나라 가수 ‘비’가 번안하여 불러 유명해진 “태양을 피하는 방법”이라는 노래가 있지요?

울고 있는 나의 모습 바보 같은 나의 모습
환하게 비추는 태양이 싫어 태양이 싫어 
(중략)
태양을 피하고 싶었어 아무리 달려봐도
태양은 계속 내 위에 있고 
(생략)

오늘 설교는 태양을 피하는 법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삶의 광풍을 만났을 때, 그것을 극복하는 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삶의 광풍을 만난 사람들을 통하여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2. 광풍을 피하는 법

1) 삶의 광풍

마가복음 4장 1절에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시고 그 배를 강단으로 삼아 바닷가에 둘러선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진리의 말씀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설교를 하신 이유는 너무나 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온종일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날이 저물 자,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여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피곤하셨기 때문에 잠시 쉬기 위하여 조용한 곳을 찾으신 것도 같고, 거라사 지방에도 복음이 전해져야 했기에 그 지방을 향한 선교 목적도 있으신 것 같고, 아님 제자들을 훈련시키시기 위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시고서 의도적으로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신 것으로도 보입니다. 

그런데 배가 갈릴리 바다를 한참 건너가고 있을 때에 갑자기 엄청난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에 의해 갈릴리 바다는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혀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다(37)”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남북의 길이가 21킬로미터, 동서의 넓이가 13킬로미터 밖에 안 되어 건너편이 훤하게 다 보이는 호수입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의 수면은 지중해 바다보다 2백 미터 정도 낮습니다. 그러니까 멀리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갈릴리 호수와 호수를 끼고 있는 계곡은 굉장히 낮은 협곡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 갈릴리 호수의 북쪽에는 우리나라 백두산과 비슷한 높이인 2815미터의 헤르몬 산이 있습니다. 이 헤르몬 산이 그 지역의 기후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요. 이 산의 정상에 있는 만년설 때문에 차가운 바람이 형성되면, 그 바람은 마치 커다란 바람통과 같이 생긴 갈릴리 계곡을 타고는 엄청난 속도로 갈릴리 호수로 치닫게 되어 있습니다. 갈릴리 계곡이라는 바람통을 타고 갈릴리 바다로 치달은 찬바람은 하루 종일 달구어진 갈릴리 호수 위의 뜨거운 공기와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이상기류가 형성되어 갑작스런 광풍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설명은 이렇게 해도 사실 광풍이라는 것은 언제 어떻게 될 지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튼 갈릴리 호수의 폭풍은 갑작스럽게 만들어지고, 그 세기는 너무나 맹렬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갈릴리 어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지요. 

성지순례를 하신 어느 목사님의 경험입니다. 갈릴리 바다에 가서 한 시간 동안 수영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해보다 물이 깨끗하고 주위가 아름다워서 퍽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 한 반 시간 정도 그렇게 지내고 있었는데, 난데없는 돌개바람 같은 것이 불면서 비취 파라솔을 날려버리고 거센 바람이 불어와서 질겁하고 나왔습니다. 거센 물결이 해변에 닥쳐오는데 겁이 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내원이 ‘30분만 기다리라’고 해서 집안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정말 30분 후에 광풍이 지나가고 평온한 태양 빛이 보여서 무사히 여행을 계속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광풍이 바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요, 성도 여러분! 이 “큰 광풍”이라는 말의 헬라어의 의미가 더욱 더 생생합니다. “광풍”이란 말은 헬라어로 ‘라일랍스(λαιλαψ)’라고 하는데요. 이 단어에 대해 쉬미트(Schmidt)라는 학자는 '일진의 돌풍이 아니며 또 꾸준히 부는 바람도 아니지만 격렬하며, 사나운 돌풍 속 검은 뇌운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폭풍우로서 다량의 비를 동반하고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였으며, 아리스토트(Aristot)는 '아래로부터 위로 회전하는 회오리바람'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다가 “큰 광풍”이라고 해서 “큰”이라는 말이 앞에 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날 밤 갈릴리 바다에 분 바람은 ‘엄청나게 강하고 대단한 위력을 가진’ “회오리바람” 혹은 “미친바람”이라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미친바람이었고, 그 바람이 만들어내는 파도 역시 질서 있고 리드미컬하게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가 아니었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바람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모든 것을 저 수심 깊은 데로 빨아들이는 것과 같은 파도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 여럿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가 다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들은 갈릴리 호수의 나가고 들어간 부분, 얕고 깊은 부분, 수심에 있는 암초까지도 상세하게 아는 사람들이요, 어떤 상황에서도 배를 운항할 수 있는 항해기술을 가지고 있는 베테랑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과 경험과 기술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항해에 비유합니다. 인생을 항해에 비유할 때에, 그 비유는 참 낭만적으로 들립니다. 저녁노을이 지는 잔잔한 바다를 배를 타고 가면서 바라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멋집니까? 그러나 인생 항해는 그런 멋진 날, 그런 아름다운 모습만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생의 항해에는 크고 작은 풍랑들이 끊임없이 불어옵니다. 때론 그 풍랑이 몇 년 전 우리나라를 강타한 태풍 “매미”와 같이 가정과 직장이라는 배를 파선시키기도 하고, 우리의 인생 항로를 전혀 예상치 못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강력한 풍랑이 되기도 합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중요한 시험에 실패하기도 합니다. 중한 병에 걸리기도 하고, 잘 자라던 자녀들에게 어려움이 닥치기도 하고 그 아이들이 빗나가기도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이런 풍랑들이 불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생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에게 어떻게 바람이 불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조금 양보해서, 비록 바람이 불어도 작은 미풍만 불어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우리 삶에는 정말 크고 작은 바람이 시도 때도 없이 불어 닥칩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자’고 하셔서, 그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탔는데도, 광풍을 만났습니다. 자신들이 탄 배가 언제 어떻게 뒤집어질지 모르는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도 여러분의 인생 항해에 대한 기상예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세계적인 경제 한파가 불어 닥칠 것인데, 그 찬바람과 이것저것이 잘 안되어서 여러분이 받고 계신 열과 부딪히면서 이상 기류를 형성할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직장에서 열 받지 마시고, 남편 때문에나 혹 아내 때문에 열 받지 마시고, 자녀 때문에도 열 받지 마시고, 늘 여러분의 인생살이를 조금 차갑고 냉정하게 만드시기 바랍니다. 


2) 풍랑이 예수님을 만나다

a. 모든 사람에게 삶의 바람이 불고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광풍이 분다면, 예수님을 믿는 성도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그 답이 있지요? 제자들 역시 큰 풍랑을 만나자 열심히 풍랑을 헤쳐 나가고자 애를 썼습니다. 한편으로는 배에 들어온 물을 열심히 퍼내면서 말이지요. 바람과 파도를 거스르거나 아님 그것을 이용하여 어찌하든지 뭍으로 가려고 죽을힘을 다하며 온갖 방법을 다 써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를 도무지 이길 도리가 없었고 어찌할 방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의 마음에 ‘이러다가 갈릴리 바다에서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고물에서 곤히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나 피곤하셔서 그 난리 통에도 꼼짝도 않고 주무셨는지, 아니면 주무시는 척 했는지는 알 수도 없습니다. 아무튼 그 예수님을 깨운 제자들은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으십니까?”라고 다급하게 살려달라고 구원 요청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인생의 풍랑 앞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과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제자들이야 당연히 예수님께 구원을 청하였지만, 이와 같은 태도는 잘못된 대상을 향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의지할 대상을 찾기 때문이지요. 바다의 해신이나 용왕, 하늘신, 바람신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인 필로는 배 위에서 큰 폭풍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무서워 떠는 것을 보고 같은 배 안에 있으면서도 폭풍에 괘념하지 않는 돼지 한 마리를 가리키면서 사람들을 격려하였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돼지머리를 바라보고 고사를 지내듯 돼지를 신처럼 여겨 의지하라고 했다는 것이죠. 

또 로마의 역사를 보면, 줄리어스 시저(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A.D. 100~A.D.44)의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 아닙니까? 이 시저가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별안간 거대한 폭풍우가 일면서 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고 사공도 불안에 휩싸여 젓던 노를 던져버리고 우왕좌왕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사공을 꾸짖었습니다. “노를 잡아라! 시저가 타고 있는 한 아무 걱정할 것 없다. 배는 침몰되지 않는다!” 물론 배는 침몰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시저의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 뱃사공은 노를 젓지 않고 머뭇거리다 큰 봉변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보십시오. 한 사람이 권위 있게 일어서서 “나를 믿고 따르라” 하니까 그것도 먹히지 않습니까? 효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돼지 머리든, 힘 있는 사람이든, 아님 어떤 신이든 그것을 의지하여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그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죽겠다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을 듣고 보신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잠잠 하라 고요 하라”고 명하시면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자, 거짓말처럼 그 미친바람과 회오리를 일으키던 파도가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창조주로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삶의 광풍과 파도도 잔잔하게 고요하게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 제가 여기서 여러분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 능력을 믿습니까? 그가 하나님이심을 믿습니까? 그가 여러분의 인생항해에 함께 하고 계심을 믿습니까? 세상이 뒤집어질 것 같은 광풍을 만나도, 여러분의 직장이나 가정에 뜻하지 않은 위기상황이 일어나도, 여러분들의 가족들이나 혹 건강에 이상이 생겨도 주님만 의지하면 그 바람들이 잠잠해질 것을 믿으십니까? 

제자들에게는 이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나무라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예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위기의 때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다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탄 인생의 배에 예수님께서 함께 타고 계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위기에서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위기 앞에, 신앙의 위기 앞에 흔들어 깨울 수 있는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인생의 풍랑도, 광풍 아니라, 그 어떤 미친바람도 주님 앞에서, 그리고 그 주님을 믿는 여러분 앞에서는 힘을 잃게 되어 있습니다.


b.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보다 더 크고 놀라운 특권이 성도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제자들이 깨우는 소리에 예수님은 깨어나셨습니다. 잠에서 깨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잠을 자서 미안해!’, ‘일기예보를 보지 않고 출발해서 미안하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지금 배가 난파되기 직전에 있기 때문에 무서워하고 있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같이 물을 퍼냈으면 좀 이해가 되는데, 제자들은 죽어라고 물 퍼낼 때 주무시다가 깨우니 겨우 일어나서 야단이나 치시고 ․․․,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제자들을 꾸짖으신 예수님은 이번에는 강한 바람과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꾸짖으셨습니다. “잠잠 하라, 고요 하라(막4:39)!” 누가 강한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바다를 꾸짖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꾸짖으시자 마치 힘차게 솟구치던 분수대의 스위치라도 내린 것처럼 그렇게 사납던 바다가 일시에 아주 잠잠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를 본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41)” 사람들은 문제가 해결되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다급할 때에는 ‘아이고 하나님!’ 하다가도 문제가 해결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 바뀝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이고 이제 살았네!’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고 잠잠케 하시는 예수님을 주목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며 예수님을 특별하고도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풍랑을 이기는 법을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분명하게, 바르게, 그리고 깊이 아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제자들과 여러분에게 가르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항해에서 만난 풍랑을 헤쳐 나가긴 했는데, 단지 풍랑만 해결하고 예수님을 배우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을 똑바로 알 때까지 또 다른 풍랑이 불어 닥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풍랑으로 주님을 알아가지 않으면, 여러분이 주님을 알 때까지 풍랑은 쉬지 않고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풍랑을 통해서 주님을 알아가고, 그 결과 믿음과 인격과 삶이 변하고 성숙해져 가는 것, 이것이 여러분의 삶에 풍랑이 부는 이유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난 삶의 인생 태풍에서 이런 것을 충분히 배우셨습니까? 그래서 앞으로 언제 어떤 바람이 어떻게 불든지 이겨낼 수 있는 준비가 되셨습니까?


3. 이 풍랑으로 인하여 ․․․

찬송가 373장 “고요한 바다로“를 다 한 번 찾아서 펴 보실까요? 이 찬송은 영국 목회자인 A. M. Toplady(1740~1778) 목사가 작사하고, Amzi Chapin이 작곡한 것입니다. 이 찬송이 우리 찬송가에 처음 채택된 것은 《찬미가, 1905》입니다(97장). 지금 가사는 《찬숑가, 1908》의 것을 수정 채택한 것입니다(169장). 1905년에 번역된 이 찬송가의 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만 물결 일어 쉬임 못 얻어도/ 천당 빨리 가게 하는 광풍 복됩니다.” 

1908년의 찬송에서는 “큰 물결 일어나 내 쉬지 못하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쉴 틈 없이 삶의 풍랑이 불어 닥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찬송가가 우리나라에서 불려진 역사를 보면 아주 특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찬송은 1905년 이후, 「조선」이라는 배가 난파되어 온 나라와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주 내게 순풍(順風)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하고 찬송을 부르며 순풍 불기를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 계속적인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풍랑 때문에 더 빨리 갑니다’, 즉 ‘일본의 등쌀 때문에 더욱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감사합니다.’ 하는 고백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다 같이 2절을 부르겠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도 인생 태풍이 붑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바람의 중심에 주님이 계신다는 것, 그 주님으로 인하여 그 태풍이 도리어 여러분에게 이익이 되고, 은혜가 되고, 또 다른 성취를 가져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도에게 부는 삶의 바람들, 그것은 여러분으로 주님을 더 알게 하고, 더 놀라운 축복의 자리로 이끄시기 위해 오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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