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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근심케 한자의 사랑의 용서 (고후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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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심케 한자의 사랑의 용서 (고후 2:5~11)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을 변경하는 일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사도바울을 비난 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말씀을 지난 두 주에 걸쳐서 드렸습니다. 비난 하는 사람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사도바울을 비난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말과 행동이 다르다. 말로는 온다고 하고는 안 오는 그런 두 마음을 품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사도로써의 권위를 부정하고 더 나아가 그런 사람에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순전히 믿을 수 없다는 이런 과격한, 급진적인, 지나친 비난을 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지난주에 읽었던 내용가운데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을 연기한 두 가지 이유를 분명하게 하나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사도바울을 비난하는 그 일로 인해서 사도바울이 많은 근심과 걱정을 했었습니다. 사도바울을 비난하고, 비판하고 근심하게 만드는 일로 인해서 사도바울만 근심하고 비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런 교회안에 있는 잘못된 분위기로 인해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 다른 사람에게도 근심이 되고 걱정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가장이신데 사업이 잘 안되십니다. 또는 직장이 어려움이 있고, 건강이 안 좋다거나,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려움을 경험하게 될 때, 집안에 한번 들어오게 된다고 한다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말도 없고 걱정이 많은 것 같으며 아이들이 여러분의 얼굴을 바라보게 될 때 마다 아이들도 굉장히 무겁습니다. 부모님의 근심과 걱정은 가족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을 공격하고 비난했던, 근심하게 만들었던 그 근심으로 인해서 고린도교회 전반적으로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교회가 교회를 근심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비난하는 교회가 분명한 징계를 하게 되었습니다. 징계를 받은 사람이 너무강한 징계를 받게 되고 끝까지 징계를 한다면 낙심한 나머지 나중에 교회를 떠날까봐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서 이야기 합니다. 이제 그가 많은 사람들에서 징벌을 받았으니 그를 용서하고 사랑해 주어라. 나도 그들을 용서하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용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보여야 될 당연한 도리다. 라고 말씀하면서 오늘 본문를 마감합니다. 

제가 말씀 드린 이런 내용들이 오늘 본문을 요약해서 말씀 드린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곳은 공동체입니다. 나 혼자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믿음 생활하는 옆에 우리 신자들과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 합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이익 집단이 아닙니다. 돈 벌기 위해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권력이나 명예나 학식을 더하기위해 모인 곳이 아니고, 끝까지 사랑과 용서와 위로와 격려와 행복 공동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공동체 안에서 누구를 비판하고 근심하게 만들고 비난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 때문에 그 공동체가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이렇게 교회를 어지럽히게 만들고 교인들을 근심하게 만든 사람에 대하여 징계를 했다면, 이제는 사랑으로 그를 보다듬어 그가 하나님과 올바르게 관계를 맺고 교회가 그를 용서해서 화해의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를 합니다.

첫 번째,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5절)

근심하게 하는 자가 있었을지라도 이것은 누구를 근심하게 했다는 말일까요? 사도바울을 근심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 전체를 근심하게 만든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게 근심하게 하는 사람이 있었을지라도 나만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다 근심하게 만들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몇몇 사람이 사도바울을 비난하고 사도바울의 진정성을 의문을 갖고 비난하는 분위기를 자꾸만 만들게 되자, 그 비난을 받은 사람은 사도바울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린도교회 교인 전체를 비난하고 근심하게 만들고 비난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한사람을 비난한 것이 결국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전체를 비난하게 만들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람의 몸은 모두가 다 연결이 되어져있습니다. 발가락 끝에 종기가 나면 발가락만 아프지 않습니다. 몸이 아픈 것 같지요? 장기하나가 암에 걸리거나 상황이 안 좋게 되면, 금방 그 주의에 장기로 전이가 되서 결국은 암이 퍼져서 사람이 죽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수억 만개의 작은 세포가 다 연결이 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 26절)

성경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교회라는 곳은 예수그리스도 몸입니다. 교회 전체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예수님은 몸의 머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머리를 제외 하고 난 모든 몸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여러분과 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목사와 권사와 장로와 집사와 평신도들과 모든 사람들이 다 있는데, 어느 한 사람은 중요하고 어느 한 사람은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중요한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몸의 지체가 연결이 되어져 있듯이요.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근심을 하게 되면, 어려워하게 되면, 힘들어 하게 되면, 다른 옆에 있는 사람도 근심하게 되고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 합니다. 나를 근심케 한 것은 어느 정도 다른 사람들을 다 근심케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근심하게 되면 아내에게 전달이 되게 되고 아내에게 전달이 된 근심이 자녀들에게도 전달이 돼서 온 가족이 다 근심걱정에 싸이게 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다락방에 있는 사람, 구역에 있는 사람, 함께 한 신도회에서 일하거나 성경공부에서 일하거나 관계없습니다. 옆에 있는 교인들을 근심하게 만들고 눈물 나게 만들고 고통당하게 만들고 그 사람을 비난하게 되면 그 사람만 근심하고 비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교회 전체의 공동체를 힘들고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몸으로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유기체는 살아 움직이고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우리는 죽은 존재가 아닙니다. 발가락이 아프다고 잘라버릴 수 없습니다. 다 연결이 되어 있어서 함께 아픔을 나누고 함께 고통과 기쁨을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안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근심케 만들고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나만 근심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전체를 힘들고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근심하게 만들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5절)

교회를 근심케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첫 번째는 지도자를 비난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교회가 사도바울을 비난했던 것처럼, 사도바울은 그것을 가리켜 근심하게 하는 사람이 있었을지라도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들, 일꾼들, 예를 들어서 순장님들, 남녀신도회 회장님, 집사님, 부장님, 장로, 목사 등 이런 하나님의 일꾼들 지도자를 자꾸만 마음에 안 든다고 비난하고 근심케 하고 떠들고, 없는 이야기 만들고, 자기 마음에 안 든다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들로 인해서 교회는 시험에 듭니다. 왜냐하면, 내가 이런 말 하면 옆에 있는 사람도 그 소리 듣고, 몰랐다가 어 그래? 하고 다른 사람에게 또 이야기 합니다. 비난하는 것은 독버섯과도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수군수군대고 근심하고 비난하는 분위기가 댑니다.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금융환란을 가만히 보면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인가하면, 루머입니다. 한국경제 금방 망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바깥에서 듣게 되면, 한국경제가 다 망하게 돼서 IMF시대로 다시 되돌아간다는 등의 루머로 실제보다 한국경제를 더 악화시켜 어렵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그랬나요? 이번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를 통해서 한국경제가 되살아 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습니다. 그런 많은 루머가 남무 할 때 대통령과 여러 경제팀들은 미국과의 여러 나라와 공조를 하면서 나라를 회생시키려고 했는데 실제로는 루머들 때문에 아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느 한 가문에 좋지 않은 루머가 번지면 집안 간에 싸움이 벌어지고 형제들 간에 싸움이 벌어져 결국에는 콩가루 집안이 됩니다. 첫 번째 교회를 근심하게 만드는 사람은 이렇게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교회를 근심하게 만드는 사람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아주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그 교회를 근심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사회에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사기치고 거짓말하고 좋지 않은 범죄에 연류 된 사람이 교회에 나온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이야기 할까요? 도대체 저 사람이 다니는 교회에서는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나하나? 교회 가서는 거룩한 척 하겠지, 교회 가서는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하겠지,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말씀 듣겠지! 그런데 사회에 나와서는 저렇게 더러운 짓을 하는데 그 교회에서 그것을 알기나 하나? 그걸 아는 사람들은 그 교회에 절대로 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교회에 가려고 하면 그 교회에 가지 말고 다른 교회에 가라고 하겠지요? 교회를 근심하게 만들고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아야 될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 번째 교회를 근심하게 만드는 사람은 신앙적으로 이단이나 잘못된 교리에 빠져 그것을 교회에 가지고 들어와 교회를 어렵게 만들고 근심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정한 공식적인 성경공부가 있습니다. 각 교회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정한 공식적인 건전한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있는데 여기에 들어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고, 교회 바깥에서 하는 개인에게나 성경을 가르쳐 준다고 하는 기관에서 성경을 배우게 되면 잘못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가운데 신천지라고 하는 이단이 있지요?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분들이 암암리에 들어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천지는 교인이 50명만 넘는 교회라고 하면 100% 다 들어가 있습니다. 전국에 6만 명의 신천지 교인들이 있다고 하는데요, ‘이만희’라고 하는 주교를 재림한 예수님이라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 입니다. 아주 대단합니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이단 교리를 가지고 성경을 끼워 맞춰 그럴듯하게 만들어 지금 교회로 가지고 들어와 추수시대에 추수꾼을 만들어야 된다며 교회를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이단 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면, 교회가 이단사조에 휘말리게 돼서 교회를 어렵게 만들지요.

이 세 종류의 사람들, 교회를 비난하는 사람들,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지 못한 사람들,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면 교회를 근심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떠십니까? 교회를 근심하게 만드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교회를 건강하게 행복하게 기쁨으로 만드는 사람입니까? 교회 안에 들어와 누구를 비난한다거나 아니면 세상에 살면서 더럽고 추한 일 때문에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한다거나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단 신학 사조가 있게 되면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로 인해 우리교회가 행복한 기쁨이 넘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영향력, 행복한 영향력, 건강한 영향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끼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제가 잘 아는 어느 집사님, 이 분이 노처녀로 미국에 시집 오셨습니다. 본래 장로님 부인 되시는 분이 장로님하고 사이가 안 좋아 이혼을 하고 한 5년 정도 장로님이 혼자 살았는데 한국에서 온 노처녀하고 미국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장로님의 전 부인 되시는 집사님은 교인들에게 평판이 아주 안 좋았습니다. 남 이야기를 잘하고, 이야기를 하면 가시 돋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같은 교인이지만 교인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교인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장로님도 힘들어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혼을 하셨고 5년 정도를 혼자 살다 이 노처녀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이 노처녀가 마흔이었는데 신앙생활을 아주 잘 하는 분이었습니다. 두 분이 결혼 후에 장로님이 바뀌고 가정이 바뀌는데요, 제가 눈으로 보기에도 확연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전 부인 집사님과 살 때는 가게가 잘 안되어 매 번 문을 닫았다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또 열고 그랬는데 이 노처녀와 결혼 후에는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는지 모릅니다. 

매일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직장에 가서는 가게 문을 열자마자 두 분이 기도하고 문 닫기 전에 예배를 드리고 신앙으로 살고 더 좋은 것은 이 노처분이 그렇게 따뜻한 사람일 수가 없었습니다. 교인들이 다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그 분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아 그분 정말 사람이 좋을 수가 없어, 장로님 너무 너무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그 분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나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 분이 들어온 후 가정이 사업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올바른 한 사람이 들어오게 되면 가정과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이렇게 바뀌는 구나! 제가 그것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런 피스메이커(Peace Maker)가, 사랑과 화해와 일치를 가져다주는 건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두 번째, 교회를 근심하게 하는 자는 반드시 처벌이나 징계를 받아야 한다고 사도바울이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6절)

이런 사람! 근심케 하는 사람,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는 반드시 교회 안에서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들이 벌 받는 것이 마땅할까요? 그렇게 교회를 어지럽히고 힘들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힘들게 하거나 벌을 내리지 않고 솜방망이로 하면, 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벌이라고 하는 것은, 징계라고 하는 것은 아픔과 고통입니다. 그러니까 그 자신이 벌을 받을 때 징계를 받을 때, 내가 왜 이런 징계와 벌을 받게 되었는가를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도와주는 교정의 기회가 되지 않습니까? 형무소가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을 비난하고 저주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형무소에 있는 동안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어서 올바로 돼서 사회에 나와서는 건전한 사람이 되라고 형무소는 교정을 하는 곳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힘들게 만들고 공동체를 파괴하는 사람에 대하여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징계를 받은 사람은 충분한 벌을 받았으므로 이제는 그를 용서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교회는 한 손으로는 징계하고 벌을 들면서도 동시에 또 한손으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사랑과 용서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7절)

그렇게 그가 징계를 받고 난 다음에는 이제는 그를 용서하고 사랑해 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애당초 하나님으로부터 죄 많은 사람이었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여 비난의 화살을 쏠 수가 없는 이유는 나 자신이 죄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이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비난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용서를 하고 사랑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교회라고 하는 믿음의 공동체는 교회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잘못하고 범죄한 사람들에 대하여 교회가 징계하고 벌을 내리지만 그것이 끝났을 때에는 용서하고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사람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범죄한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에 범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면, 그를 용서해 주게 되면, 그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이 되고 또 그가 비난했고 그가 근심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용서를 해 주게 되면, 이제 사람 간에도 화해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관계가 회복이 되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7절)

너무 사람을 몰아세우고 비난하고 근심하게 만들고 잘못했다고 지적만 하게 되면 그 사람은 나중에 상심한 나머지 근심이 많아 교회를 떠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가는 것이 목적인가요? 아닙니다.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한 손에는 매를 들더라도 한 손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와 용서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해 주어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두 친구가 사막과 광야를 여행 중에 있었습니다. 둘이서 한 참 여행을 하는데 이런저런 여행 스케줄 때문에 말다툼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다툼이 고성으로 바뀌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의 뺨을 때렸습니다. 여행하다 친구에게 뺨을 맞았으니 얼마나 기분이 안 좋겠습니까? 뺨을 맞은 친구가 맞고 난 다음에 조용히 땅 바닥에 앉아 손으로 글씨를 쓰는데 모래위에 오늘 날 친구에게 뺨을 맞았다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하루 이틀 또 여행을 하는데 오아시스를 만났습니다. 아주 깨끗한 물을 만났습니다. 물에 들어가 수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뺨을 맞은 친구가 수영을 잘 못합니다. 그러니까 허우적거리다 죽을 뻔 한 것을 뺨을 때린 친구가 구해 주었습니다. 물 바깥에 나와 정신을 차리고 난 다음에 뺨을 맞은 친구가 바위에 못 같은 것으로 글씨를 새깁니다. 나의 가장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해 주었다고 기록을 한 것입니다. 

잠깐 걸어가다가 뺨을 때린 친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친구가 며칠 전 내가 뺨을 때렸을 때는 모래위에 기록을 하더니 이번에는 바위에다 기록을 해, 왜 그랬을까? 하여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뺨을 맞은 친구가 하는 말이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고 누군가가 나를 괴롭게 만들어 내가 상처를 받았을 때에는 그것을 모래위에 기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용서의 바람이 불어와 그것을 다 지워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고 용서해 주고 희망을 주었고 도와주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바위위에 새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람이 불어도 날라 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때때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고 근심케 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교회는 그런 사람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은 교회가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서 징계를 하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사랑과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요, 교회가 사람을 징계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징계할 때 그 사람이 깨닫게 되는데 사랑해야 하니까, 용서해야 하니까, 그리고 교회니까 남의 말 하기 싫으니까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으니까, 실수하고 교회를 어지럽히고 힘들게 한 사람이 교회를 버젓이 나오는 거예요. 

교회를 근심하게 하는 사람,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범죄한 사람이 깨달아야 하는데 그것을 누구하나 지적하지 않으니까, 징계하지 않으니까, 사회에서 그렇게 한 사람들이 한 번도 회개하지 않고 교회를 다닙니다. 그런 사람 때문에 교회가 어지럽혀지고 질서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합니다. 용서와 사랑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사랑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10절)

다시 말해서 예수님 때문에 내가 용서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과 제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죽이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를 하셨던 그 예수님의 그 용서를 담아 나도 그리스도 앞에서 당신들을 용서하노라.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믿음의 공동체를 누가 지켜 줄까요? 이 사랑의 공동체를 누가 건강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요? 예수님이 하실까요? 성령님이 하실까요? 근본적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사랑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들 자신입니다. 남을 향하여 비난하지 않고 우리들 자신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올바른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오고, 이렇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행할 때에는 반드시 그들에게 말씀으로 징계하고 벌을 주고 깨닫도록 하고 난 다음에는 그가 돌아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깊은 사랑으로 용서해 줄 때 공동체는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담임목사로써 우리 교회가 이렇게 건강한 교회가 되어가고 있음을 너무 감사합니다. 여러분 모두의 영혼이 건할 때 우리 교회가 건강해 질 줄로 믿습니다. 이런 근심하게 한 사람들을 용서로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 교회가 천국이 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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