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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에 감동되어 사는 삶(2) (창 41:3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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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에 감동되어 사는 삶(2) (창 41:37~43)

(창41:37-43)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 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목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1. 어떤 부잣집 주인이 회갑을 앞두고 어떤 짐승을 잡아서 잔치를 벌일까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짐승들을 집합시켜놓고 민주적이고 신사적으로 잔치에 죽어 줄 짐승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가장 만만한 닭에게 말합니다. “이번 잔치를 위해서 네가 죽어줘야겠다.” 그랬더니 닭이 말합니다. “주인님을 위해서 죽는 것은 영광입니다만 내가 죽으면 새벽마다 깨워주는 것과 계란을 낳아서 주인님 영양을 보충해 주어야하는데 누가 하겠습니까?” 

주인이 생각해 보니 그럴만합니다. 그래서 개에게 말합니다. “네가 죽어 주어 내 회갑을 즐겁게 하라.” 그러자 개가 말하기를 “주인님! 내가 죽으면 도둑놈은 누가 지키며 애가 똥을 싸면 누가 청소합니까?” 라고 합니다. 

주인이 생각해보니 개도 안 되겠다 싶어서 소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우 선생이 죽어줘야겠다.”고 말하자 “주인님, 나도 힘들어 죽고 싶습니다. 허구한 날 밭 갈고 논 갈고 써레질하고 죽도록 부려먹고 밥도 아니고 죽만 주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죽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잘 됐습니다. 주인님 회갑 잔치에 좋은 일하고 죽겠습니다.”

이렇게 항의 겸 순교를 자청하자 죽만 먹인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농사지을 일도 걱정이어서 주인의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돼지에게 죽어 줄 것을 주문하고 혹시 죽지 못할 이유가 있으면 말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돼지는 아무 생각이 없는지 꿀꿀거리면서 먹기만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하는 일이라고는 없고 먹고 자고 싸고 하는 것밖에 떠오르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인님, 물 끓이세요.” 하고는 수육이 되어 접시에 실려 나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고 하셨습니다. 

육체의 본능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곧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 성령에 감동되어 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1) 육체를 따라 살면, 즉 자기 본능,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빈껍데기만 남는 허무한 삶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전5:11-17) 재산이 늘면 그만큼 소비도 많아진다. 그 소유주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노동자는 먹을 것이 많든 적든 단잠을 잘 수 있으나 부자는 재산이 많으므로 이것저것 걱정하다가 잠을 자지 못한다. 나는 또 하나의 다른 심각한 문제를 보았다. 사람들은 억척스럽게 돈을 모으고서도 그 돈으로 위험한 투기를 하여 일이 잘못되면 하루 아침에 재산을 다 날려 버린다. 그는 아들이 있어도 물려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람은 태어날 때 벌거숭이로 나왔으니 아무리 수고하여 얻은 것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할 것이다.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온 그대로 떠날 수밖에 없으니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은 수고가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2) 육체를 따라 살면, ‘하나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말씀을 막아, 생명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가시덤불 속에 뿌린 씨와 같은 인생이 됩니다.(마13:7-22) 3) 육체를 따라 살면, 마음이 둔해지고 뜻밖에 덫에 걸리는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눅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러나 성령에 감동되는 삶을 살면, 

1) 지혜롭게 행하며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령에 크게 감동되자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며 그 이름이 심히 존귀하게 되었습니다.
(삼상16:13)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18:12-14)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삼상18:30)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나오면 그들의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2) 성령에 감동되는 삶을 살게 되면, 메마른 골짜기에 샘물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북 이스라엘 여호람 왕과 함께 모압 정벌에 나섰다가 에돔 광야에서 그만 물이 없어 사경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7일 동안 물이 없자 군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 물자를 나르던 짐승들까지도 속속 쓰러져 갔습니다. 전쟁을 해보지도 못한 채 지리멸렬, 멸절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여호사밧 왕은 제일 먼저 선지자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찾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 왕의 정직한 믿음을 보시고 엘리사를 감동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에 감동된 엘리사의 지시에 따라 골짜기를 파자 무너진 둑처럼 샘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한편 모압 왕 메사는 이스라엘 동맹군이 자기 나라로 진격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즉시 젊은 자나 늙은 자나 무기를 들 수 있는 사람은 모조리 소집하여 국경 지대에 배치했습니다. 예비군까지 총동원된 모압 진영은 사기충천했습니다. 그 이유는 적군인 이스라엘 동맹군이 물이 없어 지리멸렬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압 군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해가 물에 비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압 병사들에게는 그 물이 마치 피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 섭리로 아침 해가 들판에 가득한 물에 비취자 그것이 온통 붉은 피로 보였던 것입니다. 모압 왕은 거기에 물이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물이 십상 전부가 피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모압 왕은 ‘저 피를 보라. 동맹군들이 서로 싸워 죽인 피가 분명하다. 자, 어서 저들의 것을 노략하자’ 고 외치면서, 전혀 싸울 채비를 갖추지 않은 채 그곳으로 자기 군사들을 몰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동맹군들이 물을 얻고 나서 다시 사기가 충천하여 단단히 전쟁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모압 군사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속임수에 빠져 전혀 전쟁 채비를 하지 않은 채, 단지 노략물만 취하려고 밀려들다가 미리 대기하고 있던 동맹군의 복병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동맹군은 넋빠진 채 몰려드는 적들을 가차 없이 공격하여 식은 죽 먹듯 너무나 쉽게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왕하3장) 

이처럼 성령의 감동은 메마른 골짜기에 샘물이 터지게 하여 삶을 승리로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2. 성령에 감동되는 삶을 위해서는

1)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을 근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거짓을 버리고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더라도 죄를 짓지 말고 해가 지기 전에 곧 화를 풀어 마귀가 틈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도록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도움이 되는 유익한 말, 덕을 세우는 말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엡4:25-32)


2) 성령에 감동되는 삶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이나 뜻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만 합니다. 노아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저마다 육체를 따라 자기들이 좋아하는 여자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죽어야 할 육체이므로 내 영이 영영 사람에게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내가 그들에게 120년 동안의 여유를 주겠다.”(창6:1-3) 앞으로 120년 동안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면 다시금 성령의 감동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120년 동안 회개하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죄악이 가득했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이었습니다. 결국 120년 후 홍수 심판으로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부터 약 3200년 전, 이스라엘 단 지파 중 마노아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마노아에게 아들을 낳게 하시며 구별되게 키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으로 키우라는 것입니다.

(삿13:3-5)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잉태하지 못하므로 생산치 못하였으나 이제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서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지며 무릇 부정한 것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치운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이렇게 해서 이른 바 그 유명한 삼손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삼손이 자라매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하나님의 성령이 감동하셨습니다.

(삿13:24-25)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삼손이라 하니라.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더니 여호와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

삼손이 어느 날 자기 부모와 함께 딤나의 포도원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젊은 사자 한 마리가 그를 보고 으르렁거리며 달려 나왔습니다. 그 순간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이 그 사자를 새끼 염소를 찢음같이 찢어 버렸습니다. 과연 성령에 감동된 삼손은 그 힘에 있어 누구도 당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삼손하면 힘, 힘의 대명사가 된 것입니다. 한 번은 들릴라의 성화에 못 이겨 새 밧줄 두 개로 단단히 결박되어 블레셋 사람들 손에 넘겨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결박된 삼손을 손쉽게 죽이고자 덤벼들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자 그의 팔을 묶었던 밧줄이 불탄 새끼줄처럼 끊어져 그 손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당나귀 턱뼈 하나를 주워 블레셋 사람 1,000명을 죽이고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귀 턱뼈 하나로 무더기에 무더기를 쌓았으니 내가 나귀 턱뼈 하나로 천 명을 죽였다네’ 이렇게 삼손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 때, 성령의 감동으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해서 나라 백성을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삼손은 어떤 블레셋 처녀를 보고 부모에게 그 처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그의 부모는 ‘네 친척이나 동족 가운데 여자가 없어서 네가 이방 민족인 블레셋 사람과 결혼하려고 하느냐?’ 하고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블레셋 기생 들릴라에 빠져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자다가 그만 머리털이 몽땅 삭도에 밀려버리고 말았습니다. 들릴라가 확인하기 위해 삼손을 괴롭혀 보았지만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내 들릴라의 눈짓에 따라 블레셋 사람들이 몰려와 그를 사로잡아 두 눈을 뽑고 끌고 가서 놋사슬로 묶어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했습니다. 삼손이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에는 천 배의 힘이 있었지만 성령이 소멸되면 비참한 인생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죄를 범하면 성령이 근심하고,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성령께서 탄식하며, 계속해서 하나님의 경고에 불순종하면 성령이 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즉 떠나고 맙니다. 성령이 소멸되면 더 이상 성령의 감동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위해 죄는 즉시 회개하고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항상 바르게 되어 있어야 성령의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삼손은 뒤늦게나마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간구합니다. 

(삿16:28)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그런 다음에, 삼손은 그 신전을 버티고 있는 가운데의 두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또 하나는 오른손으로 붙잡고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고 외치며, 있는 힘을 다하여 기둥을 밀어내자, 그 신전이 무너져 내려 블레셋 통치자들과 모든 백성이 돌더미에 깔려 죽었습니다. 그 때 삼손이 죽으면서 죽인 사람이, 그가 살았을 때에 죽인 사람보다도 더 많았습니다. 

주후 4세기 경, 데오드로라는 딸과 단 둘이서 살던 홀아비가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려고 수도원에 들어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규칙 때문에 데오드로는 남장을 해야 했습니다. 남장을 하고 수도원에 들어간 데오드로는 요리와 빨래를 하면서 생활했고, 수도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런 일들을 계속 했습니다. 수도원 가까이에 여관이 있었는데, 그 여관 주인의 딸이 어느 군인과 놀아나다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당황한 여인이 울며 매달리자 냉정한 군인은 “저 수도원의 잘 생긴 수도사에게 당했다고 하면 될 것 아닌가” 라고 내뱉고는 멀리 떠나가 버렸습니다. 

결국 난처해진 여자는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했고, 흥분한 아버지가 수도원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데오드로는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데오드로는 수도사 중에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가 쫓겨나면 정말 타락하게 될 것을 걱정하여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 쓴 채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녀는 수도원 앞에서 “불쌍한 죄인입니다.” 라는 팻말을 들고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결국 원장의 용서로 다시 수도원에 돌아오게 되었지만, 사람들의 멸시와 손가락질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조롱 속에서도 말없이 일하고 기도하던 데오드로는 너무 많은 일 때문에 과로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죽은 뒤 수도사들이 시신을 씻길 때, 비로소 그녀가 여자임을 발견했습니다. 수도사들은 남의 죄를 대신 덮어쓰고 고통을 감수했던 데오드로의 희생정신에 크게 감동을 받았고 그동안 그녀를 멸시했던 자신을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수도원 전체에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고귀한 믿음을 지녔던 그녀는 “성녀 데오드로”라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는 악한 세상에서도 훌륭하게 믿음을 지킨 여인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의 생각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없이 오직 세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 세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줄 알면서도 세상에 미혹되어 세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생각뿐이지 몸은 죄를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환난과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오직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성령에 감동되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3) 성령에 감동되는 삶을 위해서는 성전을 사랑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고 하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님으로부터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뵈올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이스라엘의 위로가 되실 그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자 마침 부모가 정결 의식을 행하려고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성령의 계시대로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눅2:29-32) 주권자이신 주님, 이제는 약속하신 대로 이 종을 놓아 주셔서 내가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본 주님의 이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신 것으로 이방인들에게는 주님의 뜻을 보여 주는 빛이며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된 것입니다.

시므온은 죽지 않고 살아서 온 인류의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대로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보고 너무나 감격해 하며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기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아기를 믿지 않아 망하기도 하고 믿어서 구원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눅2:34) 당시 또 안나라는 나이 많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안나는 일찍이 과부가 된 후로부터 여든 네 살이 되기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렇게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성전에 나와 기도함으로 성전을 섬기더니 마침내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눅2:37-38)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성전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영원히 경배받으실 거룩한 하나님의 거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대하7:15-16)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시132:13-1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을 사랑하며 성전을 주야로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함으로 섬겼다고 했습니다. 성전을 사랑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성전에 나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 혹 이방인이 되어 성전에 나와 기도하지 못하고 성전을 향해 기도한다해도 그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대하6:32-33)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에게 대하여도 저희가 주의 큰 이름과 능한 손과 펴신 팔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

말과 행동보다 먼저 기도함으로 성전을 사랑하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되어 성령에 감동되는 복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로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하는 곳입니다.(막11:17) “자기 피로 사신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이 죄 사함을 받았다고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 거룩한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전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솔로몬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상 숭배와 불순종으로 성전을 더럽히면,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성전이라도 던져 버려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조롱거리가 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오늘날 교회는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합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증거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과 눈이 항상 함께 하는 곳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향한 교회가 되어질 때, 교회는 만민의 복의 근원이 됩니다. 성전을 사랑하고 기도함으로 섬기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시84:4)고 했습니다. 그 마음을 항상 성전에 두고 사는 사람이 복된 것입니다. 교회생활이 삶에 가장 우선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천 날을 보내는 것보다 복된 것을 믿고(시84:10), 시온의 복, 예루살렘의 복, 교회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평생토록 받아 누리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시128:5) 

하나님의 마음과 눈은 세상에서 어디, 누구를 향하시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 값 주고 사신 교회에 하나님의 마음이 향하시고 있습니다. 기도함으로 성전을 섬기는 성전 중심의 신앙생활로 성령의 감동이 충만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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