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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축복하는 말을 선포하라 (약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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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축복하는 말을 선포하라 (약 3:1~12)

교육학 이론 중에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로젠탈이라는 심리학자가 발견한 이론인데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로젠탈은 이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이들이 새 학기가 시작할 때 담임교사에게 아이들의 명단을 건네주면서 특별히 그 아이들의 명단 중에서 몇 명의 이름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이 반을 맡으실 텐데 이 아이들은 특별한 아이들입니다. 아주 잠재적인 능력이 있는 아이들이고 뛰어난 아이들이니까 특별히 이 밑줄 그은 아이들은 관심을 가지고 봐주세요. 잘 할 때 마다 꼭 칭찬을 잊지 마시고 격려를 해 주세요.” 이 아이들은 우수한 아이들이라고 아주 열심히 선전을 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는데 담임선생님은 특별히 그 아이들에게 주목합니다. ‘로제탈 선생님이 이렇게 지목해서 뛰어나다고 말씀해 주신 이 아이들, 내가 더 관심을 가져야지.’ 관심을 자기고 잘 할 때마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1년이 지났을 때 그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월등하게 성적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인간관계도 좋아지고 모든 학습태도도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선생님은 생각했습니다. ‘역시 우수한 아이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밑줄을 그어준 아이들이 무작위로 선발된 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아이들이 아닙니다. 그냥 똑같이 평범한 아이들 중에 몇 명의 아이들의 이름에 밑줄을 그어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선생님이 관심을 가지고 칭찬을 계속했을 때, 그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월등히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칭찬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로 우리에겐 따끔한 지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오히려 비판은 상대방의 마음의 문을 닫게 하고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로 만들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칭찬과 격려가 오히려 어린아이들에게나 학생들에게, 또 사람들에게 더 유익한 영향을 끼치더라는 실험입니다. 여러분! 말이란 이와 같이 타인에게나 자신에게나 매우 중요한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 우리의 말,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을 다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한 왕이 신하들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가서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을 찾아가지고 오너라.” 또 한 부류의 신하들에게는 “너희는 다니면서 세상에서 가장 천한 것을 찾아가지고 오너라.” 하고 명령을 했습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 그 신하들이 돌아왔는데 가장 존귀한 것이 무언가 상자를 열어봤더니 사람의 혀가 들어있었습니다. 또 가장 천한 것이 무엇인가 또 다른 상자를 열어봤더니 거기에도 역시 사람의 혀가 들어있었습니다. 사람의 혀는 가장 존귀하기도 하지만 가장 천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 혀를 잘 쓰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가치 있는지 모릅니다. 낙심한 자를 일으켜 세우고, 절망한 자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혀를 잘 못 쓰면 그렇게 천하고 악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 낙심과 좌절과 절망을 안겨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잠언 18장 21절에 보니까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말로 한 도시를 세우기도 하고 한 도시를 허물어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니! 한 나라를 세울 수도 있고 한 나라를 허물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요즘 금융위기를 경험하면서 이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영향이 큰가를 생각해 봅니다. 증권가에 나도는 유언비어들, “한국이 곧 망한대, 곧 부도가 난대, IMF때보다 더 힘들대.” 그런 말들이 계속해서 주식을 팔아버리게 만들고 밑바닥까지 추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정말 말은 그렇게 무섭습니다. 또 그런 유언비어가 한 탤런트를 죽음으로 몰아가기도 했습니다. 정말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가 인터넷에 보면 악플이라고 해서 그 사람을 무조건 비방하고 비난하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진 말들을 악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엔 굿플운동, 선플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선한 댓글을 달자. 좋은 댓글을 달자.” 그래서 굿플운동, 선플운동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 악의적인 말이 보이지 않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지 모릅니다.

또한 한 사람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기도 하고, 파멸로도 이끌기도 하는 것이 바로 이 혀의 위력입니다. 그래서 말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 말을 잘 활용하면 정말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언어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말을 잘못 오용하면 얼마나 나쁜 저주와 참으로 패배의 언어로 쓰이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로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와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로 서로를 축복할 수가 있습니다. 그 축복은 그 사람에게 놀라운 유익을 나눠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 서로를 격려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따듯한 격려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십시오. 말의 부정적인 용도를 보십시오. 말로 우리는 서로를 비난합니다. 말로 서로를 저주합니다. 말로 서로를 공격합니다. 또 말로 서로를 조롱할 수 있습니다. 모건 블레이크라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짧은 글을 썼습니다. 여러분! 한번 정답이 무언지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나는 죽이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파괴한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인생을 파괴한다. 나는 바람의 날개를 타고 여행한다. 아무리 순결한 사람도 내게는 무력하며 아무리 깨끗한 사람도 내게는 무력하다. 나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경멸한다. 나는 나의 희생자를 전 역사에 가지고 있다. 나는 바다의 모래보다 더 많은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나는 결코 망각하지 않으며 나는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내 이름은 무엇일까요?

바로 중상모략입니다. 중상모략은 아무리 결백한 사람도 아무리 깨끗한 사람도 참으로 무력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중상모략의 노예가 되어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 본문은 혀의 위력에 대해서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그렇습니다. 먼저 여기 이 배의 키의 비유가 나옵니다. 

여러분! 바다를 항해하는 큰 배가 있습니다. 그 배의 방향을 트는 것은 배 밑에 있는 작은 키입니다. 방향키가 움직일 때 거대한 배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바로 그 작은 키에 배의 운명이 달려있는 것입니다. 항로를 바로 잡으면 그 배는 순항할 수 있지만 항로를 잘 못 잡으면 암초에 걸릴 수도 있고 태풍을 만나 고통당할 수도 있습니다. 파선할 수도 있습니다. 그 작은 키가 배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의 작은 혀, 세치도 안 되는 혀가 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혀의 위력입니다.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혀는 힘이 있으되 더구나 위험한 것입니다. 혀는 너무나 위험한 것입니다. 6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곧 불입니다. 지옥에서 올라오는 불처럼 많은 것을 태워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작은 성냥개비의 불도 큰 집을 태울 수 있고, 한 도시를 태워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혀가 온 세상을 다 태워버릴 정도로 위험한 것입니다. 한 가정을 망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한 공동체를 파멸에 이르게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혀의 위험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더구나 혀는 통제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성경 7절~8절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짐승은 능히 길들일 수 있습니다. 서커스를 보면 무서운 사자나 호랑이도 조련사의 한 마디에 꼼짝 못합니다. 앉으라고 하면 않고, 일어서라고 하면 일어나고, 가라고 하면 가고, 먹으라고 하면 먹고, 그렇게 순한 양 같을 수 없습니다. 잘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은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습니다. 말은 통제가 안 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사람의 말하는 것을 보면 그의 인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인격의 깊이, 수양의 깊이가 그의 언어를 통해서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가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린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워주소서.” 또한 성령님께 우리 혀를 위탁해야 합니다. “성령님! 우리의 언어를 통제해 주세요. 내 인간적인 의지대로 내 혀를 움직이지 않도록 저를 통제해 주세요.” 늘 성령님께 부탁하셔야 합니다. 내가 지배하기 어렵고 조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특별히 우리가 금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먼저는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거짓말이라는 범죄를 저지르면 안 됩니다. 사실이 아닌 말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은 생사람을 잡습니다. 거짓말은 마치 살인과 같습니다. 십계명의 9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내 이웃을 해치려고 거짓증거하지 말라.” 거짓말은 살인죄와 같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또한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거짓말 같지 않은 거짓말, 이것은 도대체 분간이 안 됩니다. 얼마간의 진실에다가 얼마간의 거짓말을 섞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이 말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말도 말의 뉘앙스를 바꾸면 다르게 들려질 수 있습니다. ‘아’다르고 ‘어’다릅니다. 똑같은 말도 전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다르게 편집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거짓말입니다. 시편 15편 1절 이하에 보니까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 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장막에 거할 자는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여호와의 장막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 입술에 거짓을 제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두 번째로 금해야 할 말이 수군수군하는 비방의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신자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의 입에서는 이제 그런 말을 제거해야 합니다. 로마서 1장 29절 이하에 보니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이것이 불신자가 짓는 죄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수군수군하고 비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의 입에서는 그것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렇게 앉아보면 뒤에서 누군가 수군수군하면 느낌이 다릅니다. 참 불쾌한 일입니다. 수군수군 대는 것, 비방하는 것, 좋은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장 1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1절에 보니까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비방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의 목록에 들어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해서는 안 될 말이 있습니다. 저주의 말입니다. 성경은 저주를 금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3절에 보니까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우리는 저주할 권세가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주를 밥 먹듯이 하는 그런 분들도 있습니다. 또 목사님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를 떠나면 저주 받는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안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축복할 권세만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주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린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를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저주는 곧 돌아서 내게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축복하면 그 축복이 내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저주하면 그 저주가 곧 나에게로 돌아온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열방대학에 가서 3개월 동안 강의 듣고 할 때에 강사 한분이 강의를 위해서 부메랑을 가지고 왔습니다. 부메랑이라는 것이 꼭 한국의 낫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던지면 그것이 돌아서 자기 손에 정확히 돌아옵니다. 우리가 무술 영화를 봐도 그런 것이 나오지 않습니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강사가 강의 전에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이것을 교실 안에 던지면 다시 내게로 돌아오겠습니까?” ‘교실이 좁고 천장도 낮은데 그 부메랑이 돌아갈까?’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그 부메랑을 던졌더니 교실을 한 바퀴 돌더니 강사의 손에 딱 돌아왔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놀랐습니다. 입을 딱 벌리게 되었습니다. 강사가 묻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아십니까?” 한 학생이 재밌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이 미제라서 그렇습니다.” 국산은 안 돌아오나요?

말은 부메랑과 같습니다. 내가 남을 축복하고 격려하면 그 축복과 격려가 결국 내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내가 남을 저주하면 그 저주가 곧 나를 향한 저주가 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황금률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여러분 내가 남에게 축복을 받고 싶으면 여러분도 남을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가 저주받고 싶으면 남을 자꾸 저주하세요. 그럼 그 저주가 내게로 돌아온다는 부메랑의 원리가 성경에도 엄연히 적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또 남의 말을 옮기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는 아무런 생각 없이 말로 옮기지만 그것이 곧 이간질의 결과를 가져오고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할 때 꼭 3가지를 유의해야 합니다. 첫째, 정말 이 말이 진실 된 말인가? 둘째, 정말 이 말이 필요한 말인가? 꼭 이 자리에서 이 말을 해야 하는가? 세 번째로 이 말이 모두에게 유익한 말인가? 여러분이 교회 공동체 속에서, 또한 가정과 직장에서 어떤 말을 하시더라도 이것만은 꼭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진실 된 참된 말인가? 이것이 꼭 필요한 말인가? 이것이 모두에게 유익한 말인가?

여러분! 이럼 속담이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철학과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천한 사람들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은 “김 집사는 요즘 어떻고 백 집사가 어떻고.” 사람에 대해 자꾸 이야기하는 사람은 천한 사람입니다. 좋은 이야기는 흥미가 없습니다. "어느 집 아이가 공부를 잘했대. 상도 받고." 이런 건 별로 관심 없습니다. 안 좋은 이야기. 그것이 우리 입맛에 맞습니다. 왜일까요? 우리 마음에 마귀의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의 뿌리가 있어서 우리는 악한 것을 좋아하고 죄 짓는 것을 좋아합니다. 남이 안 되는 걸 좋아합니다. 그래서 자꾸 그걸 말로 옮기는 것입니다. 

좀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어떤 교회에서는 주방을 없앴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방에서 모든 말이 생겨납니다. 음식하면서 심심하니까 한마디씩 자꾸 자꾸 합니다. 그래서 주방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을 다 내보내고 유급직원을 씁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교인들에 대해 모르니까 말을 안 합니다. 너무 주방에서 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이는 곳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구역에서 모일 때, 무슨 월례회 모일 때, 끼리끼리 모일 때 거기서 우리가 범죄하는 것입니다. 기껏 예배당에서 은혜 받고, 나가서는 다 은혜를 쏟아버립니다. 집에 가면 ‘내가 오늘 뭐 하러 교회 갔나?’ 은혜는 다 잊어버리고 남의 이야기만 하다 왔거든요. 일주일동안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신나는 뉴스를 들었더니 오늘 참 살맛난다. 뉴스 들으러 교회 옵니다. “요즘 새로운 뉴스 없어?” 그 뉴스가 관심사입니다. 복음의 뉴스가 아니라 사람들의 추한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때에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말을 하면 그 말에 내가 얽히기 때문입니다. 잠언 6장 2절에 보니까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혔느니라” 내가 말하면 그 말 때문에 내가 올무에 걸리는 것입니다. 말에 책임을 져야 하고 말에 영향력이 내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쉽게 누에고치의 예를 자주 듭니다. 누에고치가 입에서 실을 냅니다. 결국 누에고치에서 나온 그 실이 자기의 집을 만듭니다. 여러분이 우리의 입에서 나온 말이 우리의 집을 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영광스러운 집을 짓고, 어떤 사람은 저주의 집을 짓고, 실패의 집을 짓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이웃들에게, 가족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집을 결정하고 나의 집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말은 무섭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대게 언어습관을 고치지 못하면 그 사람의 운명이 밝을 수가 없습니다. 정말 이 사람은 성공할 사람인데 그 말 때문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보니 길에서 한 상인이 물건을 파는지 사람들이 몰려있는데 이렇게 써 놨습니다.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 드립니다. ‘야! 성공하는 법이 뭔가? 요즘 불황인데 그것 좀 배워야겠다.’하고 다가갔습니다. 그랬더니 뭐 물건은 아무것도 없고 사람들만 모여 있습니다. 돈을 얼마 내면 성공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호기심이 나서 돈을 내라는 만큼 냈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가만히 귀에 대고 한마디 합니다. “성공하는 법은 이것입니다. 말조심해.” 

당신이 직장에 있던, 사업을 하던, 말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말조심하는 것, 똑같은 말을 일생동안 반복하면 그것이 내게 주문이 되고 그리고 내게 악한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축복의 말을 하면 선한 영향을 끼치겠지만 악한 말을 하면 저주의 영향력을 미치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초가집을 보면 비오고 나서 비가 멈춰도 처마 밑에 낙숫물이 떨어집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그 낙숫물이 똑똑 떨어지지만 그것이 20~30년 떨어지면 바위가 구멍이 뚫립니다. 우리의 말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말이 계속 쌓이고 반복되면 내 인생을 결정하고 다른 사람의 운명을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 이제는 우리 입술에서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으로 나사로를 일으키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풍랑아 잔잔해지거라.” “내가 나음을 입었다.” 명령하시니 그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태초에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말에도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제 어려움이 있고 절망이 있을 때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십시오. “절망은 떠나갈 지어다.” 명령하십시오. “이 모든 풍랑아! 멎을 지어다.” 명령하십시오. 마음의 유혹이 찾아올 때 명령하십시오. “이 모든 유혹은 내게서 떠나갈 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할 때 여러분에게 그것이 그대로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믿음의 말을 선포해야 합니다. 치유의 말을 선포해야 합니다. 축복의 말을 선포해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현실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아니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믿음의 말을 선포하십시오. 희망의 말을 선포하십시오. “내 병이 다 나았다.” 치유의 말을 선포하십시오. 그 말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말대로 되는 것입니다. 말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더구나 예수의 이름으로 믿음으로 하는 말은 능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습니다.

김석봉 사장이라고 있는데 이분은 길거리 CEO라고 합니다. 이 김석봉이라는 분이 원래 신학생인데 너무 생활이 어려워서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어 학교를 다녀야겠다.’생각하고 시작한 것이 토스트 가게입니다.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해서 지하철 역 옆에서 토스트를 팔았는데 처음에는 녹번역에서 팔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하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죽지 못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 모자를 뒤집어쓰고 파는데 아무도 사가지 않았습니다. 생각을 해보니 ‘자리가 안 좋아 장사가 안 되나보다.’하고 그래서 홍제역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역시 장사가 안 되었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는데 ‘야! 너 그렇게 자신 없이 해서 어떻게 장사가 되겠냐? 네가 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다. 아침 못 먹고 가는 직장인들에게 싼 값에 토스트를 제공하는 것, 얼마나 좋은 일이냐? 너는 남을 섬기는 즐거운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왜 우울해하냐? 왜 부끄러워하냐? 그리고 너는 지금은 한가하게 하지만 앞으로 바빠질 거야. 앞으로 네가 바쁜 기업가가 되도록 항상 바쁘다고 말해야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너를 쳐다볼 때 너는 너무 멋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아침에 밖에 나갈 때마다 거울을 보고 이렇게 외쳐. 나는 너무 기쁘다. 나는 너무 바쁘다. 나는 너무 예쁘다.’ 

그 생각을 마치고 나서 매일 그는 거울을 보고 외쳤습니다. “나는 너무 기쁘다. 나는 너무 바쁘다. 나는 너무 예쁘다.” 그랬더니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남을 섬기니까 기뻤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인데 나는 당연히 예쁘지. 나는 바쁜 기업가야. 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야. 왜? 나는 토스트 가게의 주인인데 바쁜 사람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나갔더니 그때부터 토스트가 잘 팔리고 그게 입소문에 입소문을 타서 서울에만 해도 석봉토스트 가게가 몇 개인지 모릅니다. 전국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는 CEO가 되었습니다. 토스트가게 하나 시작해서 이렇게 큰 사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좋은 말을 선포하고, 축복의 말을 선포하는 것, 너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우울함이 찾아올 때, 낙심될 때, 좌절될 때, 희망의 말, 승리의 말을 선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꾸 불평을 했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여기까지 나와서 우리가 죽는다고. 그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갚아줄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그들의 말대로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의 말은 하나님이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하나님의 갚아주십니다. 우리 입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미래를 향해서, 여러분의 자녀의 앞날을 향해서 축복을 선포하시고, 믿음을 선포하시고, 치유를 선포하시고, 은혜를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의 입술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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