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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돌아오기까지 (눅 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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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돌아오기까지 (눅 19:11~27) 
  
지금 저 북한의 공산독재정권 하에 있는 이북의 동포들 중에는 아직도 옛날 해방 직후의 땅문서를 몰래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땅 자체는 물론 공산당의 소위 토지개혁 때 다 몰수당하여 국유화되고 협동농장 따위로 재분배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그 땅문서는 현 상태에서는 휴지조각이나 다름없는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발각되면 당장 반동분자로 잡혀 죽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런 땅문서를 깊이 감추어 두고 있는 이유는 바로 통일의 날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북한이 자유민주주의의 해방을 맞이하게 되면 그 땅문서도 인정을 받고 옛날의 자기 땅 혹은 자기 조상의 땅을 되찾을 수 있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붙들고서 그것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비록 자기네 몸은 현재 공산독재정권의 압제에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지만, 그 마음으로는 오직 미래의 통일된 조국의 새 정부를 소망하며 살고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기독신자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바로 그런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몸은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 위에서 현재를 살고 있지만, 그 심령으로는 오직 장래의 어느 한 날, 천국이라는 영원한 나라가 서게 될 그 한 날만을 확실히 믿고 간절히 소망하며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날이 없다면 우리 기독신자들이란 그야말로 헛꿈 속에서 사는 인생들, 뜬 구름을 붙잡으려 하는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실제로 세상의 불신자들의 눈에는 우리 신자들이 그렇게 보이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기독신자들은 그와 같은 장래의 어느 한 날만을 그렇게 사모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한 날을 약속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날이 오게 되면 정말 엄청난 가치를 발휘하게 될 최고의 '땅문서'들을 보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 기독신자들에게 있어서는 의심하려야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없는 예수님께서 그날을 예언하며 약속해 주신 까닭에, 이날은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는 날이 결코 아니라 확실히 맞이하게 될 날로 믿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주님의 재림의 날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바로 그날을 위하여 무엇을 고이 간직하고 있어야 하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별 가치 없는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지키려다가 손해나 핍박까지도 당하게 되지만,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그 주님께서 인정을 해 주시고 크게 빛을 보게 될 우리 기독신자들의 '영적 유가증서'와 같은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 왕의 심판권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1절로 14절에 기록하기를 "11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12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13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4그런데 그 백성이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가로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노이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마지막 걸음을 걷고 계심을 앞에서부터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해 오고 있었는데, 특히 오늘 본문의 비유의 말씀을 하실 시점에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을" 때였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과 또한 주변에 있던 대중들의 분위기를 가리켜 본문은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고 밝혔습니다.
  
즉 그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로마제국의 압제를 뒤엎는 독립운동을 주도하실 것이고 그렇게 유대인들이 자주권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잘 살게 되는 그런 식의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임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의중을 다 알고 계셨던 까닭에 이 본문에 기록된 "비유를 더하여" 즉 그런 잘못된 기대를 고쳐주시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이 비유를 첨가해 주셨던 것입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떠나감"으로써 그 비유의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요즘 시대에서야 정권을 잡으려면 자기 나라 국민의 지지를 얻고 선거에서 표를 얻어야 하는 것이지만, 당시 로마제국 산하에 있던 나라들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유대 역시 마찬가지여서, 헤롯 대왕이나 그 아들 아켈라우스 같은 이들도 그 왕위를 인정받기 위해서 멀리 로마까지 직접 찾아 갔어야 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그런 상황을 여기 비유에서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물론 여기서 말씀하고 계시는 "귀인"이란 그런 세속적인 왕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예루살렘에 가시면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이라고 기대에 들떠 있는 유대인들을 일깨워 주시기 위하여서, 지금 당신께서는 '왕권을 인수하기 위하여 잠시 먼 나라로 떠나간' 귀인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장차 심판권을 가지신 왕으로서 재림하실 날을 준비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을 잠시 떠나실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믿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훼방하려는 자들도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그 '귀인'이 떠나자마자 '저를 미워하는 백성들'이 자기네들의 대표들을 뒤로 몰래 보내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반역을 시도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그런 자들의 모함이 그 뒤에 어떤 결과를 낳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혀 아무 효과도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는 '헛일'일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장차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은 이 세상의 불신자들과 배교자들과 우상숭배자들이 제아무리 부인하고 핍박한다 해도 조금도 방해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기정사실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마지막에 보면 바로 그런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밝혀놓으셨습니다.
바로 27절에서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헤롯 아켈라우스가 왕위를 받기 위해 로마로 갔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었고, 이로 인하여 나중에 그가 돌아왔을 때에 거기에 연루된 약 3천 명의 사람들이 사형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상 나라에서도 누군가 왕권을 가지게 되면 거기에 반대하던 사람들은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일이 흔히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와 꼭 같은 일이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 재림하실 때에도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신 것닙니다.

아켈라우스 같은 악한 왕을 반대하던 사람들도 죽임을 당했다면,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 중의 왕을 거역하고 반대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내려질 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또한 승천하신 예수님은, 현재 우리에게는 바로 '심판주의 권세를 받아가지고 다시 오시기 위하여 천국에 가 계시는 귀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초림하셨을 때에는 '비하된 신분'으로 오셨고 사람들의 눈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모습'으로만 보였습니다.
  
베들레헴의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님은 '왕 중의 왕'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모습은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로 믿기에는 너무나도 비참할 뿐이었습니다.
또한 바로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못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오시게 됩니다.
바로 '왕위'를 받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오십니다.
천군천사들을 대동하시고 온 하늘의 영광을 다 등에 업으신 모습, 세상의 어느 군왕도 보여 줄 수 없었던 사상 최대최고의 화려하고도 장엄한 장면이 예수님 재림 때에 연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날에는 신자들은 물론이요 초림 때와는 달리 불신자들까지도 한눈에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게 됩니다.
재림하실 때의 예수님의 모습이란 전 세계 모든 만민들이 다 그분이 바로 '절대적인 심판권을 가지고 오시는 왕'이시라는 사실을 단박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귀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예수님이 바로 그런 '왕위'를 가지고 돌아올 것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 귀인이 왕이 되어 다시 돌아오게 될 때에 그 왕권으로써 베풀어 주실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 왕의 눈에 완전히 잘못보이는 처지로 전락되어 무서운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을 보고서도 그 분을 절대주권자로 모시기를 거부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현세와 내세를 주장하시는 왕이 되심을 원치 아니한 사람은, 장차 재림하실 왕에게는 그저 최악의 '원수'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현재 흘러가고 있는 시간에 대하여, 역사의 종말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추측하고 상상합니다.
'이 우주라는 것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존재 세계라는 것이 과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며 어떤 끝을 보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과학자로부터 시작하여 점쟁이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그럴듯한 가설들이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루머들에 휩쓸리거나 동요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족집게 같은 예언자가 무슨 소리를 했고 외계인이 방문한 증거가 어떻고 하는 소리에 조금도 복잡하게 생각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 확실한 사실, 단 한 가지 꼭 믿어야만 할 사실만 정확히 알고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는 현재로부터 종말이라는 마지막 순간까지의 시간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돌아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위를 받아 돌아오시기 위하여 멀리 성부의 집에 가 계신 때'인 것만 확실히 알고 있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 이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예수님께서 절대적인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2천 년 전에 구세주로 이 세상에 비하된 모습으로 초림하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장차 하늘 영광을 입으시고 영원한 왕으로 반드시 재림하실 것이라는 이 믿음을 확실히 지킴으로써, 그 왕이 다시 오실 그 날에 그분의 천국 왕국에 꼭 들어가게 되는 천국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는 날까지 '그 주인께서 주신 사명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종'들이 되어야 합니다. 

15절부터 19절에 "15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16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7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18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19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1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귀인"으로 불렸던 이 비유의 주인공이 16절 이하에서는 "주인"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고 있는 것을 유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백성"들에게는 '귀인'이요 '왕'이 되시지만, 동시에 "종"들에게는 '주인'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귀인은 자기가 멀리 떠나 있을 동안의 기간을 아무 계획도 없이 그냥 낭비하는 어리석은 주인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열 명의 종들(3절)이 있었는데 이들이 자기 부재중이라고 해서 마냥 시간만 보내고 빈둥거리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인은 자기의 종들에게 각자 할 일을 맡겨 놓았습니다.
그 열 명의 종들에게 열 므나, 즉 한 사람에게 각각 한 므나씩의 은돈을 주고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구체적인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한 므나는 약 백 데나리온, 즉 당시 일반 노동자의 백일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 귀인은 자기 종들 각자에게 똑같은 조건을 제공하면서, 자기가 떠나 있을 동안에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할지를 명백히 일러주고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윽고 그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는 자기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저희들을 불렀습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무슨 일을 시켰으면 그 일을 얼마나 잘 했는지를 따져보는 것 역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순서인 것입니다. 
  
그 결과 첫째 종은 열 배를 남겼고 둘째 종은 다섯 배를 남겨서 주인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 주인은 이제 자기의 왕권에 속하게 된 "고을의 권세"를 그들에게 상급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주인이 왕이 되어 돌아올 것을 확실히 믿고 열심히 충성했던 종들에게 너무나도 어울리는 상급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종들이 다 해피엔딩을 맞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20절 이하 27절까지의 말씀에 "20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두었었나이다 21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2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23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24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25저희가 가로되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26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27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세 번째 종은 자기에게 맡겨진 므나를 "수건으로 싸" 두었었습니다.
그 이유를 두고 그는 스스로 변명하기를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엄한 사람"이란 말은, 그 뒤에 이어지는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사람"이란 말과 상통하는 것으로서, 무슨 사업이나 돈벌이를 할 때에 눈곱만큼의 인정도 없이 그저 남의 피와 땀을 짜내어서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 냉혈한이란 뜻입니다.
그 종은 분명 자기 주인을 사랑하거나 존경하기는커녕 이전부터 불만만 가득 품고 있었음이 분명했습니다.
  
자연히 그는 자기 주인의 유익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그런 까닭에 그는 그 므나를 이용하여 그 기간 동안 모을 수 있었던 최소한의 이윤, 즉 은행에 넣어두어서 "변리"라도 벌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주인이 그를 가리켜 "악한 종"이라고 꾸짖은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어졌던 한 므나는 열 므나를 가지고 있던 종에게 주어졌습니다.
  
첫째 종은 열 고을의 권세와 함께 자기가 벌어서 주인께 드렸던 열 므나까지도 이미 상급으로 돌려받았으니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상태였는데 거기에다가 또 한 므나까지 더 받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날은 바로 이처럼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날이 됩니다.
자기 생에 주어진 것들을 가지고 주인으로 모시는 주님, 왕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충성한 것이 '있는 자'는 상급을 '받게' 되고, 아무 것도 주님 앞에 남긴 것이 '없는 자'는 모든 것을 다 '빼앗기는' 날이 바로 예수님 재림의 날인 것입니다.

열 명의 종들이 있었지만 이 세 명 이후 나머지 일곱 명의 종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이 비유에서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처음의 세 종들과 똑같은 식으로 각각 행한 바를 따라 상급 아니면 심판이 내려졌을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나머지 '일곱 명의 종들'에 대한 자세한 언급 대신에 '당신의 왕 됨을 원치 않았던 원수'들에 대한 심판을 이 세 번 째 종에 대한 책망에 즉시 연이어 말씀하시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므나를 받고도 장사하지 않았던 불충한 종'은 '애초에 귀인의 왕 됨을 원치 않았던 백성'들과 오십보백보에 해당됨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충성된 생활이 따르지 아니하는 교인은 실상 그 마음으로는 그 주님을 그저 '엄하고 무서운 주인'처럼만 대하고 있음에 틀림없고 그것은 아예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자들과 비교해서 조금도 나은 것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자기 주인이 장차 왕권을 가지고 돌아오실 것을 믿지 않는 종, 그런 까닭에 그 주님의 왕국인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충성할 마음이 전혀 없는 교인은 그 예수님께서 심판주의 권세를 가지고 재림하시는 날에는 여지없이 '악한 종'으로 영벌 받아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명령을 내리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 왕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이 기간 동안에 그저 자기 인생이나 즐기면서 제멋대로 살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성자 하나님으로, 왕 중의 왕으로 정말 믿는 신자라면 그 준엄한 명령을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없습니다.
주인이 잠시 여행 중에 있다 해도 종들이 집에서 놀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법인데, 하물며 그 주인께서 '그 동안에 장사하라.'고 명하시면서 '므나'까지 우리 각자에게 나누어 주셨으니 더욱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 인생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어려운 질문이 되어 왔습니다.
왜 자기라는 존재가 이 땅에 있게 되었으며,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자신의 인생이 가치 있게 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사람들은 거의 평생을 걸쳐 내내 고민하며 대답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그 생을 끝내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런 질문에 대해서 아직도 방황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며 섬기고 있는 신자에게 있어서 그 대답은 너무나도 명확한 한 가지뿐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는 이 예수님의 명령 속에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존재 의의와 목적이 명백히 밝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인 교회와 그 복음운동에 유익한 일들을 위하여 충성되이 섬기는 것에 자신의 전 인생을 투자하고 헌신함으로써, 반드시 속히 오실 주님 앞에서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라는 칭찬과 '열 고을의 권세'를 상급으로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나 지금이나 교인들 중에서는 예수님을 믿으면 당장에 자기 눈앞에 좋은 일이 벌어져야만 할 줄로 생각하는 자들이 수두룩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조금 신앙생활을 해 보다가 곧 실망하고 돌아서는 '왕의 원수'가 될 것이며, 평생을 교회 출입한다 하더라도 주님 위한 충성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 '악한 종'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우리에게 이 비유의 말씀을 남기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흥했다가도 망하고 성했다가도 쇠하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유엔에 등록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결코 흐지부지한 나라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초림하신 구세주께서 세우셨고 재림하실 심판주께서 완성하실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명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보면 주인공 스칼렛의 아버지가 남북전쟁 당시에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해서 사 놓았던 남부연맹의 채권증서들을 멍하니 바라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남군이 패배하고 남부연맹이 끝장난 상황에서 그 채권증서들은 그야말로 휴지조각에 불과했습니다.
그 스칼렛의 아버지는 아무 '권위가 없는 정부'를 믿고 투자했다가 자기 생애 전체를 망치고 만 것이었습니다.
  
요즘 국제적인 금융위기가 계속 되면서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을 합쳐서 약 70조억 원이 증발했다고 합니다.
그 주식 소유주들은 '아무도 보장해 줄 수 없는 경기'를 믿고 투자했다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재산을 날려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리 정부가 보증을 서 준다고 약속을 해도 그 패닉현상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신자들에게는 '절대로 휴지조각이 되지 않을 유가증권'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자신의 인격 속에 간직하고 있는 '예수 신앙'과 자신의 생활 속에서 지키고 있는 '충성의 행위'입니다.
그 신앙과 행위를 지키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성도의 인생은 결코 헛수고나 헛된 꿈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날을 약속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헛된 공약을 남발하거나 자기 백성을 실망시키실 수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마지막 한 날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금세와 내세의 영원한 왕 중의 왕으로 높이는 '믿음'과 그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충성을 다하면서 모아 놓은 '므나'는 예수님 재림 때에 가서 진짜 빛을 발하고 최고의 가치로 상종가를 치게 될 '영원한 우량주'인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지금이란 시간의 세계는 당신께서 장차 왕위를 받아 다시 오려고 먼 나라로 떠나가 계신 때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믿음'을 자기 심령 속에 끝까지 지키는 '백성'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것은 당신께서 돌아오기까지 각자에게 주어진 므나를 가지고 장사해야 할 때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충성'을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므나로 남겨 놓는 '종'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믿음과 충성'은 지금 세상에서는 별것 아닌 것으로, 아니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오히려 방해만 되는 것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에는 반드시 빛을 보게 될 '구원증서'요 '상급문서'로서 저와 여러분의 인격과 삶 속에서 절대로 잃어 버리지 않고 끝까지 간직해야만 합니다.
  
'내가 왕위를 가지고 돌아올 것을 믿고 그때까지 장사하라.'는 이 말씀을 깨닫고, 왕권을 받아오실 귀인을 믿고 기다린 백성이 누리게 될 구원과 주인이 맡기신 므나로 충성되이 장사한 종이 받게 될 상급을 꼭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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