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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오직, 믿음 (롬 1: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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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 (롬 1:16~17)
  

1517년 10월 31일 독일의 Wittenberg 성당 정문에 1500년 동안 끄떡없이 그 면모를 자랑해오던 로마 가톨릭교회에 일파만파의 충격을 불어넣는 기폭제가 된 중대한 공고문이 붙여졌습니다.

독일의 젊은 신부였던 마르틴 루터가 쓴 95개 조항의 면죄부에 대한 반박 논제였습니다.
당시에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막대한 예산이 필요했습니다.
그 예산 충당의 방법으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면죄부(indulgence)였습니다.

이른 바 헌금함에 던진 돈이 딸랑하고 소리를 내면 연옥에 있는 영혼이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게 된다는 거짓 가르침에 대한 반박이었습니다.

루터는 95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반박문에 대다수를 면죄부에 대한 그릇된 가르침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작성했습니다.

95개 조항의 21번입니다.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부로 사람들이 모든 형벌에서 해방이 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면죄부 판매에 모든 설교자들은 오류에 빠져 있다.”

27번입니다.
“헌금궤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면 동시에 영혼이 연옥에서 벗어나 올라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28번입니다.
“돈이 헌금궤 안에서 울릴 때마다 이득과 탐욕이 자란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성직자의 중보의 응답 여부는 하나님의 선한 여부에 달려 있다.”  

단지 세 가지의 조항을 소개했는데 당시의 루터의 이러한 면죄부에 대한 반박문은 실로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이유는 중세의 가톨릭교회는 절대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던 시기였고, 가톨릭 산하 종교재판은 소위 인민재판보다도 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는 때였기에 루터의 이러한 행동은 말 그대로 죽기를 각오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마르틴 루터의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더 이상은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가톨릭교회의 중차대한 타락을 바로 세우기 위해 1517년에 종교개혁의 불을 마르틴 루터에게 점화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491년이 되는 해가 오늘이고 개신교에서는 해마다 10월의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주일로 드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을 당긴지 491년째가 되는 2008년의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오늘의 우리들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분명한 하나님의 뜻으로 종교개혁을 통하여 태동된 개신교회의 후예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루어가고 있는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단의 유일한 교단신문은 성결신문은 아주 보수적인 교단지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비판적이거나 진보적인 글은 아예 편집 과정에서 제한적으로 삭제가 되는 그런 어떻게 보면 편향된 신문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10월 25일자 1면 톱에 실린 기사를 보면서 가히 급하기는 정말로 급한 느낌을 갖고 있구나 하는 기사를 싣고 있었습니다.

제목: 성장 멈추고 선교 막혀, 한국교회의 최대의 위기
소제목: 대형화, 세속화 영적인 침체 불러... 실천 없는 신앙도 문제.

중요한 기사 내용 발췌 요약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기독교 영성의 약화로 교회들이 세속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위에 교권이 있고, 교권 위에 대형교회가 있다.”

진보적인 신문에서 평가한 내용이 아니라 성결신문에서 평가한 내용이라서 더욱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을 바라볼 때 종교개혁 시기의 중세 가톨락에 비해 더하면 더하지 덜 하지 않다는 비판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을 저의 이론적인 동의이기도 하지만 많은 깨어 있는 동역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공통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한국교회는 불과 10년 안에 존재의 가치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부교역자들과 함께 나누는 뼈아픈 농담이 있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하겠지만 염려가 되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목회를 65세에 은퇴를 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 나는 이제 목회를 한 연수보다 목회를 해야 할 연수가 더 짧다. 이제 불과 나는 15-6년을 하면 은퇴를 하게 되니까 괜찮겠지만 부교역자들이 목회를 할 때 교회의 존재 의미가 과연 존재할지 염려가 된다.”

이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바로 한국교회가 정신을 차리지 않고 이대로 가면 실제로 일어날 현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국교회가 이미 존폐의 위기에 있다는 이야기를 저는 불과 2-3년 전에 우리 교우들에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무신론자 교수인 리처드 도킨슨(Richard Dawkins)이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은 많은 영국인들에게 어필되었고 그는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두 말 할 나위 없이 영국교회의 무너짐 속에서 이제는 본질적인 하나님의 영역이 도전 받게 된 실례입니다.

그런데 그 도킨슨의 지지 하에서 이제는 공공 버스 광고판에 이런 광고가 내년 1월부터 실린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

무슨 뜻입니까?
“아마도 하나님은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인생을 즐기십시오.”

이 광고 문구를 지지하고 후원할 사람들이 벌써 줄을 서서 광고를 통한 대박을 꿈을 꾸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지금 영국교회가 얼마나 무너져 내렸으며 또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영국교회의 일입니까?
한국교회가 환골탈태의 모습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볼과 10여년 안에 볼 수 있는 영적인 그림자입니다.

영국은 종교개혁국가입니다.
다시 말하며 뿌리가 기독교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뿌리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어떤 외부적인 요건으로 기독교가 무너져 내린다면 그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전제로 하여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이런 위기에서 빠져나와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은혜로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오늘 우리는 진단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요?
두 말 할 나위 없이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르틴 루터가 죽음을 무릅쓰고 사역을 감당했던 종교개혁 정신은 과연 무엇입니까?


1. 오직 믿음만으로 (sola fide)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중세 가톨릭에서 주장한 구원의 방편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행위 중심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필수요소를 선행이라고 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선한 행위가 드려져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것은 중세 가톨릭을 결국은 무너뜨린 면죄부 사건입니다.

헌금을 내는 행위의 선함이 이미 죽어 지옥과 연옥에서 거주하는 가족들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수단으로 변질시켰는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지금이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또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지도 않겠지만 유일하게 라틴어로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었던 시기에는 선한 행위를 해야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적인 내용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줄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헌금의 선한 행위를 통해서라도 구원을 받으려는 성도들의 마음이 부합되어 무지몽매하게도 그렇게 면죄부를 구입하게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표면적인 부분에서는 선한 행위의 한 수단이었던 면죄부가 단지 구원의 티켓을 구입하는 정도의 것으로 간과될 수 있는 것이었지만 근본적인 문제점은 구원의 방법이 믿음이 아닌 다른 행위로 말미암는다는 그릇된 신학적인 바탕 때문이었음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요즈음에 한국교회가 자꾸만 위기에 직면하여 그 원인을 찾아보려는 시도를 해보았더니 진단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대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조금 쉽게 말하면 교회끼리 끼리만 생각하는 아주 이기적인 모습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에 일견 동의합니다.

맞습니다.
한국교회가 그 동안 너무나 집단적인 이기주의의 온상으로 교회만을 위한 부흥을 꿈꾸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대사회적인 참여와 교회 밖에서의 봉사와 우리 교회의 표어처럼 축도 이후에 더 관심을 가지는 사역을 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바로 이러한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주일을 맞이하여 한 가지 꼭 집고 넘어가야 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회적인 교회의 참여와 활동과 섬김이 교회의 본질이 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혼을 구원하는 방법이 교회가 선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쪽으로 변질되는 것을 민감하게 경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사회적인 부분에서 교회의 몫을 담당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부추기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아닙니다.
교회의 우선순위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죄인 된 인간을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 만드는 구원의 행위가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며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교회가 행하는 선한 행위로 구원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행한 착한 행위를 보고 찾아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만약에 그것만이 진리라고 믿고 있다면 그 사람은 교회에서 선한 행위를 중단하면 다시 신앙을 팔 사람이 됩니다.

그러기에 교회에서 행하는 가장 최우선의 본질을 영혼을 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영혼을 건지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뿐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한국교회가 이 믿음에 대한 사수가 흐려졌습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이 복음에 대한 외침에서 타협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외쳐져야 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율법을 통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성서적인 근거입니다.
선행은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축복의 도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일찍이 로마서 3:10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갈파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구원의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유일한 구원을 믿는 믿음입니다.
sola fide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이 종교개혁의 신앙으로 돌아가는 우리 교회 그리고 한국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둘째로 오직 성서만으로 (sola scriptura) 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 당시의 상황 중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서 이외에 교황의 말씀은 틀림없다는 교황무오설을 주장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황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명령이며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자이며 교황이 해하는 모든 말씀은 거짓이 없으며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첨부해서 성서 말씀의 권위보다도 교황의 말이 더욱 더 큰 권위가 있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성서 말씀은 도외시되고 오직 교황의 말씀과 권위를 더욱 강화하는 잘못된 길로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권위였습니다.

그런데 이 절대적인 권위에 루터는 반박문을 종교 개혁문에 실었습니다.
반박문 5번은 당시로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교황의 고유 직권으로나 교회의 법규로 부여한 징벌을 제외한 어떤 벌도 교황이 사할 권세나 의지를 갖지 못한다.”

6번입니다.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확증하는 것 이외에 어떤 죄도 면제할 수 없다. 기껏해야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들만을 사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도 그러한 그의 사죄 권리가 무시되면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

교황 무오설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루터는 이렇게 교황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도전을 했습니까?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성경을 왜곡하는 것을 더 이상은 묵과하지 않겠다는 성직자로서의 살아 있는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루터의 이러한 선포에 1000% 지지를 표합니다.
교황의 말이 틀림이 없는 완전한 말인가?
교황은 과연 완전한 자인가?
소가 웃을 일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교황 역시 원죄를 지닌 그리고 자범죄를 지닌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교황도 인간이기에 잘못된 신앙을 가질 수도 있고 범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성서에만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은 유일무이의 진리입니다. 
말씀에 입각한 신앙생활만이 참된 신앙생활 입니다. 
말씀만이 우리의 참된 길입니다.
말씀을 넘어가면 불행이 시작됩니다. 
말씀을 넘어가면 잘못된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행 6: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 문제로 인해 분열의 위기에 있을 때 그 위기를 극복한 방법입니다.

사도들이 각오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에스라가 수문 앞 광장에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뒤 성벽 봉헌식을 앞두고 영적 대각성 성회를 인도하는 어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느 8:8-9절 전반절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에스라가 이렇게 성회에서 엄청난 역사를 나타나게 한 원동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답을 에스라 7:10절은 분명히 알려줍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하나님의 말씀에 올인하여 그 말씀을 증언하는데 모든 것을 바친 사역자였기에 수문 앞 부흥회에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난 15일에 진보적인 계통의 신학자들의 연구모임인 우리 신학연구소에서 ‘종교다원주의 시대의 구원의 의미’라는 제목으로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대표적인 종교다원론자 정양모 신부는 그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하느님’이라는 신조 버린 지 오래인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동일시한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AD 1세기 당시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이들은 예수를 너무나 존경했다. 그러다보니 좋다는 존칭은 다 붙였다. 한없이 존경스러우니 최고의 존칭을 드린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를 하느님으로 보는 신조를 버린 지 오래다. ‘예수는 하느님이다’는 것은 시적인 고백언어다. 찬양하는 노래다. 자신이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태양’이라며 “오 솔레 미오!”라고 고백하며 노래하는 것과 같은 신앙 고백적 시어다. 성서 전체의 맥락을 보면 예수는 하느님 자비의 화신이다.”

한국교회에 많은 곳에서 이렇게 성경을 난도질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신학이라는 명분으로 성경을 찢고 있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경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성경을 난도질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성경의 가장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왜곡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시적인 언어의 찬미 대상으로 하나님이 되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창세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 당신이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던지시고 비하하셔서 우리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 분은 우리들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들은 오직 성경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학은 성경을 성경으로 인정하는 길을 제시하는 도구이어야 합니다.
신학이 구원의 길을 제시한 성경을 난도질을 할 때 이미 그것은 인간학이지 신학일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 교우들이 순교적인 사명으로 오직 성서만으로 본질적인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성경을 사수하는 교우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마지막으로 오직 은총만으로 (sola gratia) 의 신앙의 회귀입니다.  

인간이 거듭날 수 있는 것과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이 인간의 선행에 의한 믿음의결과이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인간에게 주시는 은총으로 가능하냐의 문제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수많은 논란이 되어왔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천주교회 (Roman Catholic Church)는 인간의 선행을 통한 구원을 주장하며 우리 개신교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통한 믿음에 의한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입는 것이 꼭 우리의 선행의 결과인양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은총적인 대속은 무시한 채로 단지 불쌍한 이웃을 구제하고 선한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선하다고 칭찬받는 듯한 자기만족의 신앙생활 하십니다. 
즉 자기위주의 신앙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신앙이 아니라 즉 오직 은총만으로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잘하니까, 내가 착하니까 하는 식의 자기위주의 신앙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영원한 형벌로서 죽음을 당해야 마땅한 우리들을 사랑의 은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기에 우리가 그 예수를 믿을 때에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자기 위주의 신앙은 불신앙이며 결국 자기 교만의 결과입니다.

“어느 한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그 권사님은 자기의 신앙이 최고의 신앙인 줄로 착각하고 있는 권사님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몹시 내리던 날이었습니다. 우연히 징검다리를 건너다 발을 헛디뎌서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급류 속에 휘말려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권사님은 그 와중 속에서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바로 그 때 어떤 한 사람이 그 권사님을 살리기 위해서 튜브와 밧줄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권사님은 하나님께서 직접 살려 주실 것을 믿고 튜브와 밧줄을 거들 떠 보지도 않고는 계속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살려 주실 것이다. 세상 그 어떤 것과 타협하거나 도움을 받지 않고서도 능력의 하나님은 나를 살려 주실 것이다’라고 믿으면서 기도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권사님은 더욱 더 깊은 곳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제 헬리콥터가 동원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은 헬리콥터에서 내리는 사다리도 거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죽었습니다.

결국은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습니다.
심판대에 서서 하나님께 막 따졌습니다.

하나님,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어떻게 응답하시지 않고 나를 죽게 만들었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들떠 봤으니까 밧줄과 튜브를 던졌고, 헬리콥터와 사다리를 보내지 않았니? 그런데 네가 거절하니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단다.”

만들어 낸 이야기이지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 권사님의 신앙이 무슨 신앙입니까?
결국 자기만족, 자기 교만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통한 신앙에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자력으로는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불가능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은총으로 인간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의 은총을 이룩하기 위해서 죽이셨습니다.
모든 것을 양보하신 예수님은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5:24절도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히 9:12절은 연속적으로 이렇게 선포합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은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오직 은총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로마서를 우리가 주일에 강해를 통해 살펴보고 있기에 이미 은혜를 받은 말씀이지만 로마서의 주제절이기에 다시 종교개혁 491주년 아침에 곱씹습니다.

롬 1:16-17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정금 같은 말씀을 세태가 악하지만, 우리를 흔들어 놓는 일들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지만 이 말씀을 사수하여 한국교회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우리 모든 교우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성경으로만, 은총으로만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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