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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침상을 가지고 가라 (마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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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침상을 가지고 가라 (마 9:1~8)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4)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예수님께서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기적은 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돼지 2천 마리가 몰살당하는 모습을 본 데가볼리 사람들이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힘들게 배를 타고 이곳 지역으로 오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풍랑으로 인한 위험을 무릎 쓰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산상의 손실을 더 크게 생각한 그 지역 사람들의 불신 때문에 더 이상 기적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수많은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셨던 예수님은 불과 귀신들린 자 둘만 고치시고 그 곳을 떠나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셔야만 했습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은 선물을 주시길 원하시는데 그것을 거부한 사람들을 보며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요? 우리가 그러고 있지는 않습니까? 돼지 같은 것을 끌어안고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을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받으려 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주실 수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그 문을 여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지만, 그 문을 열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배를 타고 돌아오는 주님의 마음도 무거우셨을 것입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그런데 예수님의 주요 활동무대인 가버나움에 오시자 주님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오늘 읽은 말씀의 중풍병자와 그 친구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주님께 우리가 무엇을 잘 해드려서 주님이 감동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감동받습니다. 주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데가볼리 지역 사역의 피곤함을 잊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시자 다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오늘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말씀은 마가복음 2장의 기사와 같은 내용입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중풍병자를 네 명의 사람들이 침상에 든 채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어떻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 계신 집의 지붕을 뜯기로 합니다. 팔레스틴의 집 지붕은 뜯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할지라도 지붕을 뜯으려는 생각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의 절박함에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나야 된다는 절박함이 지붕을 뜯게 만든 것입니다. 

부자 삭개오 또한 주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삭개오는 돌아서지 않고 근처에 있는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어른이며 세리장이라는 체면도 불구하고 뽕나무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절박한 자가 주님을 찾게 되어 있습니다. 절박한 순간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상상력이 발휘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찾아도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탓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우리의 절박함입니다. 간절히 구하면 주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전하시고 계셨는데 지붕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지붕이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먼지도 날리고 사람들이 다 그곳을 주목하여 쳐다봅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중풍병자가 침상에 들린 채 대롱대롱 밧줄에 매달려 내려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런 만남은 정말 희한한 만남이라 할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주님은 그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즉각 알아차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 속에서 낫고자 하는 그들의 간절한 소원을 읽은 것입니다. 

2절에서는 예수님이 저희의 믿음을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희의 믿음이라고 하였는데 누구의 믿음을 말합니까? 중풍병자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네 친구의 믿음입니까? 둘 다겠지요. 오히려 여기서는 친구들의 믿음이 더 컸다 할 것입니다. 중풍병자는 꼼짝 할 수 없었고, 이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은 침상을 들고 온 네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중풍병자가 받았지만 그는 네 친구의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함께 하는 공동체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개신교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일대일 믿음이 강합니다. 내가 결단하고 내가 믿어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협력하여 받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수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대학교 들어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냥 선배 따라서 기독교 진리를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를 믿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그것이 저 혼자만의 결단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예수 믿기를 위해서 오랜 동안 기도했던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군대 3년 동안 작정하고 저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는 축복은 내 자신이 열심히 기도하거나 잘해서 그렇게 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 사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주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중보기도가 바로 그렇습니다.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데 나무 스스로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가 물을 주어야 나무가 자랍니다. 물이 없으면 자기 눈물이라도 뿌려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이런 은혜를 입게 된 것은 누군가 우리를 위해서 눈물 뿌려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중보의 기도를 통하여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눈물 뿌려 기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서로 기도해 주고 기도의 은혜를 받는 공동체가 있다면 무엇보다 든든할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친구들 뿐만 아니라 중풍병자에게도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중풍병자의 믿음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중풍병이라는 병이 주는 육신의 불편함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마음의 중풍병입니다. 평생 침상에서만 지내야 하는 사람의 부끄러움을 여러분은 이해하십니까? 자기가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의 수발을 받아야 한다는 무능력함이 그 마음마저도 굳게 만듭니다. 이제 침상에 들려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대롱대롱 매달려 공중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그렇지만 주님 앞에 나오기 위해서는 부끄러움도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별로 잘난 것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대단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체면을 세우려 합니다. 은혜 받는 데는 체면도 버려야 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중풍병자입니다 하며 나올 때 구원의 은혜가 임합니다.

다윗의 모습 속에서 이런 겸손함을 봅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을 살인교사하는 큰 죄를 범합니다. 이 죄를 알고 나단 선지지가 그 죄를 지적하며 책망합니다. 그러자 그는 왕임에도 불구하고 잘못을 지적당하자 즉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12:13) 하며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다윗처럼 왕의 자리에 앉지도 않았으면서도 마치 대단한 존재나 된 마냥 회개하지 않습니다. 잘못이 드러나면 자기 체면이 깎일까봐 숨기고 아닌 채 합니다. 감추면 치료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연약함이나 잘못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최근에 미국 어느 대형 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이 공개적으로 자신이 간음죄를 범했음을 고백해서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미국 사회야 이혼이 다반사 이며 또 간음은 법적으로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회자로서는 큰 도덕적 결함입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되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일을 기쁘게 감당하였습니다. 우리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무조건 덮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 결국 우리 마음의 중풍병이 들고 영영 치료받지 못하는 무기력한 인생을 살고 맙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주님은 중풍병자와 네 친구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을 치유해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이 병을 치유하시는데 다른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치유하십니다. 2절입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원래는 6절처럼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으로 끝냈어야 했을 것입니다. 지금껏 주님은 그런 식으로 병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장면에서는 달리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를 통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것을 알게 하십니다. 

첫째 주님은 우리가 단순히 육신의 병만 고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육신의 병은 언젠가는 다른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는 죽음에도 이르겠지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바로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신 의도입니다. 이는 단순히 중풍병의 원인이 죄이기 때문에 그 병의 근원을 치료하신 사건이 아닙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파괴된 관계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주님은 이 죄를 사하심으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죄사함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 양심의 짐을 가볍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관계의 회복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의 문제 해결이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육신의 병을 고치신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 것의 가시적 증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우리가 육신의 병을 얻거나 고난을 당하여 그를 계기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병이 아니라 축복이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죄 사함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6절의 말씀대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주님 편에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이 더 쉽고 편합니다. 왜냐하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벌써 수많은 사람들을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문제가 될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신 이유는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단순히 병의 치유가 아니요 인간의 근원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이미 천사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예수님은 산상수훈이라는 아름다운 교훈을 전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스승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을 고치시시 위해서 오신 기적의 신인이 아닙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골고다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값없이 죄 사함의 은총을 주십니다. 진짜 예수는 산상수훈이나 갈릴리에 있지 않습니다. 골고다에 있습니다. 선한 도덕에서 예수를 구하지 마세요. 기적이나 축복에서 예수를 구하지 마세요. 진짜 예수님은 피 흘리는 십자가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며 마음에 분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입니다. 그들은 죄사함의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예수님이 죄를 사하시는 모습을 보면 참람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이들의 태도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죄가 용서를 받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판자일 뿐이었지 구원자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눈은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마음은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은 이 죄 사함의 권세를 이제 사람들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6절에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인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렇지만 이 용어는 다른 식으로도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곧 죄사함의 권세가 이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도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죄 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선포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믿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8장 18절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땅에서 매고 푼다는 것은 땅에서 믿는 자들이 행하는 결정을 말합니다. 그 중요한 결정중에 죄에 대한 용서나 심판이 들어갑니다. 이는 요한복음 20장 23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에 근거하여 가톨릭에서는 사람들이 행한 고해성사에 대해서 죄사함의 권리를 사제들이 행사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개신교와 교리적인 문제가 붙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에게 죄사함의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어떤 사람을 축복할 수도 있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의 죄를 사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 권위를 주님은 교회 위에 주셨습니다. 그러니 교회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곳입니까? 주님은 교회 위에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오늘날의 교회는 이 죄사함의 권세를 귄위 있게 사용하지  못합니다. 첫째는 교회가 성결의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요 둘때는 죄 사함의 권세를 일방적으로 개인에게 맡겨두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정의는 네 가지로 이루어 집니다. ‘하나의’ ‘보편적이며’ ‘거룩한’ ‘사도적’ 교회입니다. 각각의 뜻이 있지만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교회는 거룩한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로 이미 거룩해진 공동체이면서 또한 거룩을 추구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거룩해야 죄사함이라는 귄세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불행히 그 권위를 잃고 말았습니다. 누구를 죄사하기 전에 자신들의 죄 문제나 잘 처리하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을 뿐입니다. 참 부끄러운 것은 교회에서 문제가 생기면 교회 안에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꼭 사회법정으로 끌고 가서야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에 이런 놀라운 권세를 주셨는데 우리는 그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또 죄사함의 권세와 관련하여 유념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이 말씀들을 하실 때 단순히 한 개인을 향하여 주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라는 인격과 그 신앙고백 위에 천국열쇠를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8장에서는 교회나 두 세 사람의 기도나 결정에 대해서 땅에 매고 푼 것에 대해서 하늘에서도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에서는 제자 공동체를 향하여 죄사함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죄사함의 문제는 단순히 한 개인이 골방에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개신교가 약한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너무 하나님과 일대일만 강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처럼 특정한 사제에게 이런 일을 맡겨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라는 공동체에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서로 위하여 기도하며 용서하는 것이 성경적입니다. 모든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도록 권위를 주셨습니다.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주님은 근본적인 문제인 죄사함을 선포하신 후 이제 중풍병자의 육신을 치유하십니다.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는 즉시 중풍병자가 벌떡 일어나 자기 침상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갑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조금도 꼼짝 못하여 늘 침상에 매여 지내던 사람이 그 침상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저는 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왜 그냥 일어나 걸어가라 하면 될 것을 침상을 들고 가라 하셨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여기뿐만 아니고 주님은 요한복음에 의하면 베데스다 연못 가에 누워있는 38년 된 중풍병자를 향하여서도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자리나 침상은 가 같은 단어인 ‘크라바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크라바톤은 접고 펴고 할 수 있는 지푸라기 담요 같은 상입니다.

여기서 침상이나 자리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38년 된 중풍병자는 38년 동안 그 자리에 매여 살았습니다. 그 자리를 벗어나서는 한 치의 땅도 밟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옮겨갈 때는 그 자리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 침상에는 이 중풍병자의 눈물과 한숨이 배어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빌어먹다 흘린 음식 자국들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침상을 들고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네가 지금껏 침상에 매여 살았다면 이제는 그 침상을 들고 부리는 존재로 살아가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할 것입니다. 다른 식으로 한다면 지금껏 우리 인생이 운명에 매여 사는 수동적 존재였다면 이제는 운명을 짋어지고 사는 능동적인 존재가 되라는 뜻일 것입니다.

복음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를 꼼짝달싹 못하게 했던 침상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운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성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저리나게 떨쳐 버리고 싶은 것들입니다. 복음은 바로 그 운명의 침상을 들고 가게 만듭니다. 복음은 우리 운명을 바꿉니다. 운명을 바라보는 우리 태도가 바뀌는 순간은 곧 운명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전에는 눈물 흘리게 만들었던 곳이 기쁨으로 바뀝니다. 불안의 현장이 찬양의 현장으로, 불평의 현장이 감사의 현장으로, 근심의 현장이 기도의 현장으로 바뀝니다. 무기력과 패배의 현장이 능력과 승리의 현장으로 바뀝니다.

다하라 요네꼬라는 분이 쓴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입니다. 이 사람은 어떠하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두 발도 없고 왼 손도 없이 달랑 오른손과 그에 딸린 세 개의 손가락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감수성 예민한 여고시절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녀는 고3 때 기차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두 발과 왼손을 잃었고 오른손 중에 두 손가락이 잘려져 나갔습니다. 극도의 절망감에 빠져 수면제를 모으며 자살을 준비하던 그녀는 병원에서 타하라 아키토시란 한 신학생의 전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도지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그 말씀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신학생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시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한 계획이 있으니 예수님을 믿으세요”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 후 주님께서 그 마음 가운데 감사의 마음을 불어 넣기 시작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절망하며 죽으려던 그녀는 오른손에 세 손가락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격하게 됩니다. 삶을 감사로 받게 되자 점차 그녀의 내면은 아름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청년, 곧 그녀에게 복음을 전했던 신학생과 결혼을 하게 되고 두 딸까지 낳게 됩니다.

그녀가 쓴 책 속에 “감자와의 전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음식을 준비하면서 감자 껍질을 벗기려는데 세 손가락으로 하려니 동그란 감자가 떼구루루 굴러가기만 하더랍니다. 필사적으로 감자를 따라 다녔지만, 마치 감자가 자신을 비웃듯 계속 손을 벗어났습니다. 극한 절망감이 그녀를 사로잡았지만, 그 때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를 위해 감자 요리를 하게 도와 달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더랍니다. 도마 위에 감자를 올려놓고 반을 툭 하고 자른 뒤에 그것을 세워 놓으니 감자가 도망가지 않더랍니다. 그 날의 식탁은 세 개의 손가락으로 껍질을 벗겨 만든 감자 요리 때문에 더욱 풍성해 졌습니다. 

사실 삶의 행복은 큰데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작은 것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 때 그녀의 생이 끝났다면 결코 산다는 것이 황홀한 것임을 경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삶이 바뀐 것은 삶의 조건이 바귀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감자와 전쟁을 벌여야 할 만큼 더 열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삶이 황홀하다고 느끼며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운명의 침상에 매여 있던 그녀의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침상을 들고 가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은혜요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2천년 전 팔레스틴 어느 땅에서 중풍병자를 일으키셨던 예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육신의 중풍병, 마음의 중풍병을 앓고 있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 분 앞에 우리 마음을 내어 놓을 때 우리 운명의 침상을 들고 가게 하시는 놀라운 기적을 베푸실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산다는 것이 황홀하다는 고백이 나오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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