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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에 참예한 자 (빌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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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빌 1 : 1 - 11  
제 목 : 은혜에 참예한 자 

저는 성경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과, 또 여러 교회들을 살펴보면서, 자주 자주 이런 생각을 가져 봅니다.   성경에 많은 인물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께 칭찬을 들으며, 넘치는 은혜와 축복을 받는 모습이 나오는데,  또 어떤 이는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을 들으며,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또 어떤  경우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모습들도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일곱 교회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교회들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칭찬만 들은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책망만 들은, 사데 교회와 같은 교회도 있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들을 성경을 통해서 바라볼 때마다, 저는 이런 생각을 가져 봅니다.  내 신앙은 과연 어떤 신앙인가?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실 때, 과연 내 신앙은 어떤 신앙으로 평가되어질까?   내 이름, 전승빈 이라는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진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록되어져 있을까?   
내 현재의 신앙을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같은,   그런 뛰어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지는 못할지라도, 엘리사 시대의,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던, 숨은 칠천명의 무명의 신앙인들과 같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되어져 있을까? 

아니면, 민수기에 나오는 발람 선지자와 같이, 나귀도 알아보는 하나님의 사자를 못 알아보는 영안이 닫혀진, 거짓 선지자와 같은 신앙인으로 기록되어져 있을까?  저는 이런 생각을 자주 가져봅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우리 성천 교회도 이 땅에 세워진 5만 교회 중에 하나인데,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판단하실 때, 어떤 교회로 판단하실까?  우리 성천 교회라는 이름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진다면, 만약에 계시록의 일곱 교회 중에, 우리 성천 교회라는 이름이 있게 된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록되어져   있을까?   서마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은 칭찬 듣는 교회일까?  
아니면, 사데 교회나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책망 받는 교회일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생각 한 번 안 해보셨습니까? 
제가 목사이기에, 목회자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바라본 것입니까?   
목회자적인 관점에서 신앙을 이해한 것입니까?  물론 그러한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하면서, 이러한 질문은 여러분 스스로가 한 번 던져 볼만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신앙생활에, 무슨 발전이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하는 어떤 일에 대하여 고민이 있고, 연구가 있다면, 결코 그 일은 실패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이런 생각이나 고민 때문에, 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지요.  어제보다 나는 오늘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이러한 질문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스스로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신앙은 어떤 평가를 받겠으며, 또한 우리 교회는 어떠한 평가를 받겠는가?   
아마 이에 대해, 자신 있어 하는 성도들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왜입니까?  우리 스스로가 생각해 보아도 부족한 면이 많은 신앙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런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크게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우리는 지금 완성된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유보적인, 아직까지도 발전 가능성이 남아 있는, 그러한 신앙  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무엇입니까?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남은 시간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 인정하실만한 신앙으로, 또한 하나님께서 칭찬하실만한 신앙의 모습으로, 가꾸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모습이 없다고 한다면, 그저 세월만 보내며, 연륜만 자랑하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와 같은 신앙과 교회라고 한다면, 결국에는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은 발람이나, 버림받은 사울 왕과 같은,   그런 신앙이 될 수밖에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아주 좋은 대안을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오늘 우리가 어떠한 신앙을 추구해 나가야 하며, 또한 어떠한 교회의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야 하겠는가?  이러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빌립보 교회는 어떠한 교회입니까?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던 중에 개척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이 모두 3차 전도 여행을 했는데요,   그 기간 동안 정말 수많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 교회는, 그 가운데서도 좀 특별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세운 다른 교회들과는 달리, 아주 은혜롭게 성장해 나가고 있는 그러한 교회였다는 겁니다.  또한 성도들도, 아주 열심히,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그러한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바울이 전도 여행 중에 개척한 교회는, 빌립보 교회와 같이 다 은혜롭게 부흥하고 성장해가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실제로는 모든 교회들이 다 그러하질 못했습니다.  오히려 바울로 하여금   근심을 하게 만든 교회들이 더 많았다는 겁니다.  

바울이 세운 대표적인 교회 중 하나가 어떤 교회입니까?  고린도 교회이지요. 이 고린도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정말 골치 아픈 교회였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믿음이 퇴보하며, 그 신앙이 타락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형편없이 망가져 가는 그러한 교회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서를 보게 되면, 교회를 향한 칭찬이 별로 없어요.  
계속해서 책망과 권면이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세운 교회, 어느 곳 한 군데인들 소홀함이 있었겠습니까?  얼마나 큰 사랑과 관심으로 그 교회들을 살펴보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관심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성장하는 모습은 각기 다 달랐다는 겁니다.  어떤 교회는 고린도 교회와 같이 근심이 되고, 염려가 되는 교회가 되어졌는가 하면, 또 어떤 교회는 바울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칭찬을 하게 하는 교회로 성장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빌립보 교회가, 바로 그러한 교회였다는 것이지요.  바울로 하여금 안심하며, 소식을 접할 때마다 기쁨의 소식으로, 그의 마음을 즐겁게 했던 교회, 바울로 하여금 늘 칭찬을 하게 만들었던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3절 말씀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라고, 칭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기쁨이 넘쳐났고, 그 교회를   향한 감사함이 항상 넘쳐 났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성천교회가, 빌립보 교회와 같은 이러한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회자가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하는 교회, 정말 열심으로 신앙생활하며, 여러 가지 모습으로 봉사하며 헌신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목회자의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는 교회,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정말 칭찬해 주고 싶고, 그저 성도들에게 복을 내려주기를 원하시는 그러한 교회,  이런 교회가, 우리 성천 교회가 추구해 나가야 될, 교회의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왜 이처럼 빌립보 교회를 향해, 이렇듯 애틋한 마음을 품게 되었을까?   그 배경을, 우리가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생겨난 것은, 한 여인의 헌신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하던 중, 빌립보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때 누가 와서 바울을 맞이했는가 하면, 자주 색 옷감 장사를 하던 루디아라는 여인이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바울이 전하던 복음을 전해들은 루디아는,   그 마음에 크게 감동함이 있었고, 복음을 전한 바울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강권하여 머물게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시초가 되어져서, 빌립보   교회가 탄생하게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루디아라는 한 여인의 헌신, 여러분 이는 그저 숫자 하나의 개념이 아닙니다. 
마치 한 알의 겨자씨와 같은 작은 헌신이었지만, 그 헌신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헌신이 되어졌을 때, 큰 나무가 되어져서, 많은 사람들의 영적 안식처를 제공하는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칭찬함에 있어,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라고 했습니다.  
은혜에 참예한 자, 여러분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루디아라는 한 여인이, 바울의 전한 복음에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 은혜를 깨닫는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헌신하는 모습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에 참예하는 모습이었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우리가 은혜에 참예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루디아와 같은 신앙이 있어야 하고, 또 그녀가 나타냈던 귀한 헌신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은혜로 알고 감사하며, 또한 그 은혜를 우리의 헌신으로 꽂을 피우며, 자라게 만드는 성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과 그 은혜를 함께 나누면서, 자신의 신앙을 좇아 바른 신앙생활 하게 만드는 성도, 이러한 성도가   은혜에 참예하는 성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 중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며, 헌신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그렇게 칭찬했던 것은, 이와 같은 헌신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지 못했던 고린도 교회는, 늘 바울로부터 책망만 들었습니다.  

이런 대조적인 모습, 똑같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회는 칭찬을 듣고,   어떤 교회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성도들 마음속에 은혜가 있느냐?  없느냐?   그 성도들의 생활 속에   주를 향한 헌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부흥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부흥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부익부 빈익빈의 원리가 교회에도 적용이 됩니까?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교인이 많은 교회는 더 많이 부흥해 나가지만, 교인이 적은 교회는 백날 천날 가도 부흥하기 힘들다고 말을 합니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습니다.  실제로 또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는 마귀의 속삭임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속삭임에 절대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교회는 많은 숫자를 필요치 않습니다.  주님은 적은 숫자일지라도, 기드온의 3백 용사와 같은, 아니 주님의 열 두 제자와 같은, 소수의 인원이지만, 주님을 향한 헌신자들을 필요로 하시는 줄 믿습니다.   

한 아이가 광야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는, 그 아이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 아이 외에, 약 2만 명이나 되는 군중들이 있었습니다.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던 중에, 제자들이 주님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주여, 이제 저녁때가 다 되어 가는데, 저들에게 먹을 것이 없습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 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무슨 돈이 있었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주님이 우리의 형편을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 어찌 우리더러 먹을 것을 주라  하시는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의 귀 담아 들었던 한 아이가 제자들을 찾아와, 자신의 도시락을 내어 놓습니다. “여기 제 도시락이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그 아이가 가진 도시락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였습니다.  
그저 한 아이가 먹을 만한 양식이었습니다.  수많은 군중입니다.  
여자와 아이 외에 5천명이라고 했으니까, 약 2만 명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어찌 도시락 하나로, 그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이가 주님의 손에 자신의 한 끼 양식을 드렸을 때, 그 수많은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가 남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거기에 도시락을 가져온 사람이, 이 아이   하나뿐이었겠습니까?  분명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날이 저물 것을 예상한  많은 사람들이 도시락을 준비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이 원하실 때에, 그 아이와 같이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이기주의적인 모습입니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광야로 나아왔습니다.  그곳에는 주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광야는 교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말씀이 있는 곳, 여러분 그 곳이 교회가 아닙니까?  
그런데, 군중만 있고, 은혜의 나눔이 없는 교회라고 한다면, 그 곳은 주님의  책망을 듣는 교회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무관한 교회가 어찌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광야 교회는 다행스럽게도, 이런 은혜의 나눔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한 은혜의 나눔이었습니까?  한 아이의 헌신 때문이었습니다.
그 작은 아이의 헌신이, 주님으로부터의 축복의 통로가 되어졌고, 그 축복이   그 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성도가 은혜에 참예한 성도이겠습니까?  
광야 교회의 한 아이와 같이, 자신의 것을 주님께 드릴 줄 아는 성도,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은혜를 함께 나누기를 소원하는 성도, 그래서 오병 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며, 교회의 큰 부흥의 원인자가 되어지는 성도, 이런 성도가, 오늘 바울이 말한 은혜에 참예하는 성도인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뿐만 아니라, 우리 성천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런 은혜에 참예하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감사했던,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과의 처음 맺었던 관계가 중단되지 아니하고, 식어지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유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식어지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뜨겁게  그 관계가 발전되어져 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5절을 보게 되면,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했습니다. 
그저 단순히 바울 자신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한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했던 이유는, 이런 표면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보다 더 근본적인 깊은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무엇 때문이라고 했습니까?  복음으로 교제함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정말 감사하게 생각했던 것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신실한 신앙생활을 계속해서 해 왔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게 되면, 이와 같은 상황을 바울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복음으로 말미암은 고락을, 항상 같이 해 왔던 빌립보 교회를 향한, 감사가   베여져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다름 아닌, 복음 전하는 일에, 빌립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동참하고 있는 것을, 바울은 칭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빌립보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러한 변함없는 믿음과 신앙이,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 아니라,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변함없을 것을, 간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간절한 바램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 성천  교회를 향한 간절한 바램인 줄로 믿습니다. 
복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항상 진리와 함께 하며, 어떠한 악의 무리의   대적이 있을지라도, 끝까지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는, 그런 교회가 되어지는 것, 우리 성천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또한 우리 성천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되 풍성히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만 받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교회가,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교회가, 우리 성천 교회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하여, 또한 이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11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빌립보 교회가 이제까지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이 이렇게 간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도 빌립보 교회는 열매를 충실하게 맺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그러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왜 이러한 간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빌립보 교회가, 더욱 더 은혜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더 축복이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9절로 10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라고 했습니다.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이것이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바램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계속해서 머물며, 역사하는 교회들을 바라보게 되면,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두가 열매 맺기에 힘쓰는 교회라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크게 발전을 하는데, 그들은 “성장” 이라는 말을 쓰지를 않습니다.  무슨 말을 씁니까?  “부흥” 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장과 부흥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장은 단계별로, 어떤 데이터에 의해서 자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저께가 하나였다면, 오늘은 둘, 내일은 셋, 이러한 자람을 성장이라 말을  합니다.  그러나 부흥은 다릅니다.  부흥은 단계를 생략합니다.  데이터를 무시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저께가 하나였다면, 오늘은 열이 됩니다. 그런데 내일은 백이 됩니다. 
이것이 부흥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바로 이러한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간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성천 교회를 향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 성천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장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무엇을 하나님이 기대하고 있습니까?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향해 이러한 기대를 하고 계신다면, 우리는 그저 당신의 뜻대로 순종하여 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잘 차려 놓은 밥상에, 수저만 들면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열심으로 기도하고 전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우리 교회에 붙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름 떼와 벌 떼와 같이 몰려든다는 말이 실감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으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시작하고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새생명 전도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마다 새생명 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하는데, 하나님은   이러한 행사를 통하여 우리의 무엇을 확인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열심을 확인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더욱 더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또 열심히 전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자손의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냥 그 축복을 허락해 주셨습니까?  시험을 치루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해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밖에 없는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믿음을 확인해 보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그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열국의 아비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흥은 아무 교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열심이 있는 성도들이 있는 교회,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같이, 저마다 은혜에 참예하는 자들이 있는 교회가 부흥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 속에 나 한 사람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기대대로, 교회가 부흥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에 헌신하는, 성숙한 성도들이, 그래서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마음껏 축복하시는   귀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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