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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 : 사랑 (요일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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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 사랑 (요일 4:7~12)


요즘 유명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어떤 이유든지, 그가 누구이든지간에 사람의 죽음을 본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고 슬픈 일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을 다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은 더욱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자살의 문제를 다시 한 번 더 생각 해봐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야만 하는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근본원인을 사랑의 문제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사랑의 문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결국 사랑이 없어서 남을 헐뜯고 비방하고 사랑이 없어서 사람을 죽게 하기도 합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남이야 어떻게 되든지 죽든 말든 독설을 하고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유포하기도 하고 책임 없다 해버리고 맙니다. 그런가하면 사랑을 잊어버려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도 합니다. 아직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오직 내 사랑을 받아야 할 그 사람을 잠깐 잊어버리고 내 스스로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 근본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성경 요3:16의 말씀을 모르는 분이 없을 것입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하나님의 사랑은 누구나에게 열려있고 나 또한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 사랑을 기억해야합니다. 

여러분, 인간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을 가만히 보면 사랑이 없어서 거짓말하고, 사랑이 없어서 미워하고, 사랑이 없어서 질투하고, 사랑이 없어서 다툽니다. 그리고 사랑이 없기에 무책임합니다. 사랑한다는 말도 참 많이 하고 사랑했노라고 제법 큰 소리도 쳐봅니다.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도 하고 사랑을 받으며 산다고 하는데도 여전히 문제가 남는 것은 올바른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더라도 제대로 된 사랑을 해야 하는데 잘못된 사랑, 빗나간 사랑, 이것이 문제를 만듭니다. 

예일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로버트 스턴버그(Robert Sternburg)]라는 분이<사랑의 삼각 이론>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랑은 균형이 잡힌 정삼각형의 가운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할 그 삼각의 첫째 요소를<친밀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에는 친밀함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사랑한다고 하는데 친밀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건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느낌이란 게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은 하지 않는데도 전달되는 느낌이 다릅니다.'저 사람은 나를 이해하는구나, 나의 사정을 잘 알아주는구나.'하는 친밀감이 있습니다. 이런 정서가 사랑입니다. 혹은 비록 몸이 조금 떨어져 있어도'가까이 있다. 저가 나를 생각하고 있다.'하는 이러한 친밀감, 그것이 사랑입니다. 

두 번째 균형은<정열>입니다. 말 그대로 사랑이란 서로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그 사람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생각도 없이 무언가를 자꾸 말하고 싶어집니다. 살아가는 이유가 꼭 그 한사람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정서가 사랑입니다. 

세 번째 균형의 요소는<약속과 책임>입니다. 사랑에는 약속이 있고 그 약속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약속이 확실하고,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믿어지지 않으면 그건 더 이상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요 저의 실수가 나의 실수라고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나와 상관이 없다는 듯이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임을 지는 마음이 사랑이요. 무책임하게 비판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 올바른 사랑이란 이렇게<친밀감>과<정열>과<책임과 약속>이 삼각형처럼 꼭 균형을 이룰 때 올바른 사랑이 된다고 합니다. 

어느 한쪽으로도 지나치게 치우치면 비뚤어집니다. 친밀감에 너무 치우치면 감상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또, 정열에 치우치게 되면 욕망에 사로잡혀서 정신을 못 차립니다. 그런가하면 약속과 책임, 즉 의무에 지나치게 치우치게 되면 사랑이 아주 메마르게 됩니다. 그런고로, 이 세 요소가 함께 합쳐서 정삼각형처럼 세 변이 같은 길이로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루어야 참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 노력으로 이런 사랑을 만들어 가려고 하는데 오늘 사랑의 전령자로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실체를 들여다봅시다. 

사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이란 이 삼각형의 사랑으로는 모자라서 사각형, 육각형, 아니 그 보다 더 많은 도형으로 사랑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몇 각형의 도형이냐가 아니라 균형을 이루어가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빗변이 더 길기를 원해서 불균형을 이룹니다. 어떤 이는 명예의 변이 남보다는 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물질의 변이 그 사람보다는 길어야한다고 생각하여 양보가 없습니다. 학력의 빗변이 남과 같아서는 안 된다고 여기며 삽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모양이 삐죽 삐죽하게 볼품없는 도형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불신앙적인 요소에서 비롯되었다는데 그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변의 길이를 맞추어 나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봉사의 빗변을 맞추지 못하고 삽니다. 기도의 빗변이 다른 사람보다 아주 많이 짧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을 만들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이웃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합니다. 예배도 열심이고, 봉사도 열심이고, 헌금생활도 나무랄 데가 없는데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온전한 사랑의 삼각형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는 잘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좋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릅니다. 교회 안에서도 늘 주도적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친교에는 뛰어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여 신앙에는 열등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는 이렇게 균형이 맞지 않는 신앙생활, 늘 이게 문제입니다. 

흔히 사랑의 형태를 이야기 할 때<만약에의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조건적인 사랑으로써"네가 사랑해 준다면 나도 너를 사랑하겠다."는 주고받기 식의 사랑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때문에의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보상 심리적인 사랑이라고 하는데"당신이 나에게 잘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사랑한다."는 어쩔 수 없는 사랑의 형태입니다. 즉 상대방이 베푸는 가치에 따라 내가 하는 사랑도 달라집니다. 그런가하면<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상대방 나를 사랑하든, 안 하든, 심지어는 나를 미워할지라도 나는 너를 먼저, 많이, 적극적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지도 않고 내가 사랑해야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건과 상황에 상관없이 베푸는 사랑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준 사랑이 이런 사랑이며, 그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우리들은 바로 이런 사랑 앞에 서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이건만 사랑은 못할망정 미워하고 있다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사랑을 하려면 미움의 감정을 버려야합니다. 온전한 사랑의 삼각형을 이루려면 제대로 되고, 올바른 기둥으로 변을 삼아야만 하는데 미움과 질투라는 비뚤어진 기둥으로는 안 됩니다. 자존심이라는 굽은 기둥으로는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사랑하지 못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자존심이 그 이유입니다. 체면이 그 이유입니다. 그래서 먼저 사랑하기가 그렇게 어려운 겁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그래서 선 듯 못 지키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곳이 있는데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섰다가, 아들의 모습이 눈에 띄자 기다리지 아니하고 먼저 아버지가 먼 거리를 단 숨에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당시의 문화적 환경을 생각하면 이 사실은 가히 파격적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어른이 먼저 달려간다는 표현이나 실제로 달려가는 상황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당시 남자 성인 유대인이 발목이나 발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모욕하는 행위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은 상대방이 다리를 꼬고 앉으면 자신들을 모욕한 것으로 간주하고 더 이상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자리를 뜨고 만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버지가 집 나갔다가 돌아 온 자신의 아들을 알아보고서 먼저 달려가 그를 맞이했다고 하는 예수님의 이 비유의 의중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 것이 사랑입니다. 상황도, 조건도, 자존심까지도 뛰어 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면도 포기하는 것은 물론 남의 손가락질까지도 감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먼저 달려 나가 아들을 맞이하는 사랑 많은 아버지의 모습을 비유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도의 시인[타고르]는"사랑의 다른 이름은 이해"라고 했습니다. 이해란 내 쪽에서 먼저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이란 내가 먼저 달려 나가 맞이하는 것입니다. 오기를 기다리고, 사랑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먼저 이해하고자 달려가는 마음, 이것이 곧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할 수 없이 큰 죄에 빠져 있었습니다. 감옥을 살아도 몇 년을 족히 살아야하고, 죄질로는 사형을 받아야 마땅했습니다만 우리를 먼저 이해하고, 다가와서 사랑을 베풀어주신 분이 계십니다."어떻게 하면 저들을 살릴 수 있을까?"를 고민 고민하시다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의 목숨을 주고라도 살릴 만큼 우리를 측은히 여기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오늘 성경이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인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말씀이고 그 열매로 사랑을 맺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9절-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받은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마땅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마땅히, 그리고 당연히 맺어야 할 신앙의 열매가 사랑임을 오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이해하고 사랑하는 믿음으로 세상을 바꾸어나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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