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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 (빌 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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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주인이신 예수님  (빌 3:4~14)


역사를 말할 때에는 서력기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2008년 10월 5일, 이것도 서력기원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약칭으로 서기(西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해를 서기 1년이라고 하고, 태어나기 한 해 전을 기원전1년이라고 합니다. 다른 역법체계와 같이 0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역사를 말할 때에도 기원전과 기원후를 사용해야 합니다. 기원전을 BC라고 하고, 기원후는 AD라고 합니다. 기원전이라는 말은 BC라고 하는데, 영어의 ‘before Christ’를 줄여서 BC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이전을 말합니다. 기원후라는 말은 AD입니다. 이 말은 라틴어인데, ‘안노 도미니’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애노 다미나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우리 주님의 해(年)” -in the year of our Lord'라고 합니다. 역사라는 말을 할 때에 ‘history’ 라고 하는데, 그 말은 his story ‘그 분의 이야기’라는 말이 줄어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이전과 이후”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저는 세례 받으려는 이들에게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예비 공부를 하신 이들은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죄인이기에 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를 믿어 구원받으려고 한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예비공부를 하지 않으신 이들 중에는 “마음에 평화를 얻기 위하여 믿는다”고 하는 이도 있고, “하는 일마다 잘 되지 않아서 예수를 믿으면 잘 될 것 같아 믿는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의미를 알고 믿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간단한 질문 같지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요,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입니다. 롬10:9-10에 보면 “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했습니다. 

고백하지 않은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고백은 사람이 말할 수 있는 중에 가장 소중한 결단입니다. 

마10:32-33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충성을 약속하면서 당신은 나의 주님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를 위해서 목숨이라도 내놓겠다는 각오로 그 앞에 엎드리고 “당신은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로 예수님은 나의 왕이요,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며, 예수님은 나의 중심에 와 계시고, 나의 목적이 되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살아갈 이유가 생겼고, 예수님 때문에 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생명이시고, 나의 전부가 되시며, 나는 주님을 알게 된 것으로 충분하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고백할 수 있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 나는 충분합니다. 나는 다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다 깨어지고 부서졌는데, 아직도 주변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중간에 믿음을 버리고 산속 종교로 가는 사람을 보면, 그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진정한 신앙이란, 그리스도가 목적이요, 주인이요, 중심이 되시고, 전부가 되신다는 신앙입니다. 

고백이란 정말 중요한 신앙입니다. 고백하지 않은 사랑이란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시인하고 고백해야만 신앙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고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합니다.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고, 모든 것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어떤 말을 할 때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무슨 행동을 할 때면 예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인지, 가치가 변화되었습니다. 달라져야 예수 믿은 것이 확실하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달라지지 않으면 예수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것인데, 이제 예수 믿으면서 예전에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것들이 다 부끄럽기만 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좋아하던 것을 지금도 좋아하고, 세상을 버리고 끊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푹 빠져야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고후5:17에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전에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이었는데, 이제는 해롭게 느껴집니다. 유익하던 것인데, 무익하게 여겨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인데, 나는 희열을 느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으나, 나는 그렇게 소중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그렇게 살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잘 나가던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사울이라는 바울입니다. 바울은 젊어서 모든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육체를 신뢰하고 있었습니다. 육체에 할례를 받은 것을 자랑하였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엄청난 공로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자신의 옛날을 회고하면서 자랑할 것이라고 하면 자기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은 육체를 자랑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상대하려니, 어쩔 수 없이 옛날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라고 입을 열었습니다. 육체를 신뢰한다는 말은 육신적인 드러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5절입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유대교에 개종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많아도 무조건 할례를 받아야만 유대교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삭의 이복형제인 이스마엘이란 사람은 13살에 할례를 받았지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를 받았다는 말은 자기의 몸에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증표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족속이었습니다. 바울은 정통 이스라엘 족속의 혈통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직계 혈통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말은 언약의 백성이라는 말이요, 하나님의 언약안에 들어와 있는 백성이라는 긍지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 베냐민이란 아들은 야곱의 사랑받던 부인 라헬의 둘째 아들로 아들로는 막내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통일 왕국의 초대 왕이 사울이었는데, 그가 바로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여러 지파 중에서 아주 인정받는 지파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습니다. 두 부모님들이 다 히브리인이었고, 그 사이에서 혈통적으로 조금도 섞이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히브리말로 양육을 받은 히브리말을 사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말리엘 문하생이 되어 율법을 공부하려면 당시에 가장 힘든 히브리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바리새인의 교육을 받았는데, 바리새파는 유대의 여러 종파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로, 구약의 말씀을 확대 해석하여 율법만이 아니라, 선지서와 다른 성문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나사렛 형제라는 사람들을 없애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을 준행하고, 율법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외형적으로는 조금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자랑스러운 사람인데, “그러나”라고 하면서 말씀을 반전시키고 있습니다. 

7-8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고 하셨습니다. 정말 멋진 반전이요, 전혀 새로운 결단이었습니다. 전에는 지금 말한 그런 인간적인 조건들이 자기에게 유익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보니, 그런 것들이 다 해롭게 여겨졌습니다. “무엇이든지” 어느 것은 버리기에 아까워 숨겨놓을 수도 있을 터인데, 전혀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이든지”라고 했습니다. 전에 같으면, 자기의 학벌을 자랑하고, 자기의 로마시민권을 자랑하고, 자기의 의를 자랑할 것인데, 무엇이든지 다 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유명한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오늘 본문을 설명하면서 “이전의 plus(+)가 zero(o)가 된 것이 아니라, 이전의 plus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minus(-)가 되었다”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바리새인으로 의로운 척하면서 살아간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이며, 거짓투성이요, 생각해보면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짓이었습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해로 여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때때로 생각하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기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악한 사탄이 발목을 잡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전에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다 무익하게 여겼고, 무익한 정도가 아니라, 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좋아하던 것, 예전에 자랑하던 것, 예전에 괜찮다고 하던 것, 예전에 잘 나가던 것들이 예수님을 알아가고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방해거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다 해로 여긴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난 후에 버린 것이 있습니까? 무엇을 버렸습니까? 바울은 옛사람의 가치관, 전에 좋아하는 것 모든 것들을 깨끗이 버렸습니다. 

우리 할머니가 예수를 믿고 나서 이전에 신주로 모시던 모든 것들을 버리는데, 정말 바깥마당에 한 짐 내다 놓고 전도사님을 모시고 찬송 부르면서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렇게 많던 불교의 서적들, 신주단지, 그림들, 부적들, 그리고 정말 아까운 고서들까지 다 우상의 책이라고 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런 결단, 동리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고, 일가친척들이 왕래를 끊는다고 하였지만, 그런 결단의 믿음이 있었으니, 그의 손자가 목사가 되었고, 그 할머니의 기도 속에서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할머니를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89세를 살게 하시고 모든 자식들 다 예수 믿게 하고, 일가친척들 다 믿게 하고, 동리를 변화시켰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그냥 보내지 않았습니다. 사랑채에 전도사님 내외를 모시고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전도사님에게 쌀이 떨어지지 않고, 나무가 떨어지지 않게 채워드렸습니다. 전도사님의 사모님이 유산할 때에 그 모든 수발을 다 들면서 정말 최선을 다하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과거에 그렇게 나를 돋보이게 하고, 나를 세워주던 것 모든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얻었으니, 주님 안에 발견된 것이 소중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오직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 

눅14:26-27에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마16:24에서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포기한 것이 있어야, 지금 새롭게 살아가는 것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포기하고 얻을 것이 있어야, 귀한 줄로 알게 됩니다. 

저는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습니다. 토요일에 결혼하고 보니, 바로 내일이면 주일이고, 주일이 되면 전도사로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어디를 가겠습니까? 담임목사님은 한 번 주일을 빠지더라도 신혼여행을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신혼여행이 뭐 그렇게 바쁜 것입니까? 주일을 지키고 내일 떠나지요. 결혼 후 처음 맞이하는 주일인데, 아무데서나 맞이할 수 있습니까?” 정말 그랬습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좋았습니다. 내가 주일을 범하면서, 누구보고, 주일을 지키라고 할 것입니까? 그 때는 그랬습니다. 하루 신혼여행을 미루었는데, 결국은 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전도사였으니, 힘이 들었지만, 어른들이 마련해준 여행비용으로 내가 쓰던 책상은 동생에게 주고, 새 것으로 책상 사고, 책꽂이 사고, 책 사서 보면서 그렇게 보냈습니다. 

우리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우리 마음 깊이 담아두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소중합니다. 가장 고상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높여줍니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십자가 복음만 알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고전2:2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십시오. 이 세상에 과도하게 쌓아두려고 하는 어리석은 부자들이 되지 마십시오. 손해보고 사십시오. 이기고 살려고 하지 말고, 지면서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에, 가서 보십시오. 세상에서 그렇게 잘 나가던 것, 다 소용이 없습니다. 적은 권력, 적은 지위, 명예, 인기, 그것 가지고 주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생각하시면서 참으셨습니까? 주님이 알아주십니다. 주님 때문에 받을 것 다 받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다 넘치게 갚아주십니다.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해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능력이 되신 주 나의 모든 삶 변화 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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