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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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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마가복음 5:25-34 ) 
 

어느 날 신밧드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 동네에서 가장 큰 부자의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온갖 먹음직스러운 음식이 아주 비싼 그릇에 담겨 고급 식탁 위에 차려져 있고, 일류 음악가들이 초청되어 아름다운 음악을 잔잔히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그 잔치를 준비한 부자를 보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의 이름도 신밧드였습니다.
청년 신밧드는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젠장, 이 사람은 무슨 팔자가 이리도 좋을까. 똑같이 신밧드인데 누구는 찢어지게 가난하고 누구는 엄청난 부자이고... 하나님 참 불공평해"
그런데 그 소리를 우연히 부자 신밧드가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부자 신밧드는 청년 신밧드를 부른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이 신밧드. 내가 이렇게 큰 부자가 된 것은 팔자 때문이 아니야.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되었는지 한번 들어나 보겠나?" "예"
그렇게 해서 부자 신밧드가 자신이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하여 보물상자를 찾아온 이야기를 해 준 것이 그 유명한 '신밧드의 모험'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분야에서 나름대로 일가견을 이루고 성공했다면 그 사람에게는 그동안 혼자서 감당할 수밖에 없었을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고의 나날이 있었을 것입니다. 팔자타령만하고서도 어떤 분야에서 일인자나 일인자가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만족스럽게 살아왔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팔자 같은 것은 없습니다. 팔자라는 것은 게으른 사람들이 자신의 게으름을 변명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핑계입니다. 팔자타령 할 시간에 성실하게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팔자타령만하는 수동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팔자를 만들어가는 능동적이고 자동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능동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의도는 오늘 본문 말씀인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에 잘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이 인생살이를 해가다보면 형통할 때도 있지만 곤고할 때도 있습니다. 곤고한 일을 만났을 때 은혜를 입는 길은 스스로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대신 기도해주고 대신 믿어주고 대신 해결해주는 일 같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주님의 은혜를 입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능동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대단히 불리한 환경과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5절을 보면 이 여인은 같은 질병으로 열두 해를 앓고 있었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계속해서 26절 말씀에 보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의사도 소용이 없었고, 그 좋다는 약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있던 것까지 질병 때문에 다 허비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무효험도 없었고 그 병은 나날이 중하져만 갔습니다. 오랫동안 병으로 시달린 터라 지칠대로 지치고 허약할 대로 허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녀가 12년 동안 앓고 있는 혈루병이라는 질병은 레위기의 전통이나 그 당시의 정결법으로 하면 부정한 질병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이 여인은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당할 수 밖에 없는 여자였습니다. 부정한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성전에 나갈 수가 없었고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혹시 가게 되더라도 다른사람들이 부지중에라도 접촉을 피할 수 있도록 "나는 부정한 여인이로다. 나는 부정한 여인이로다"하고 소리를 쳐야 합니다. 
  
이 여인은 어디로 보나 능동적으로 자동적으로 인생을 살아가기에는 부적절한 상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상황을 보면서 결코 우리의 상황이 이 여인의 상황보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무리 중에 끼여 뒤로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나 지금에나 예수님의 소문은 다 좋은 소문만 있는게 아닙니다. 당시에도 예수님의 소문은 나쁜소문도 있었고 좋은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나쁜 소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좋은 소문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대한 소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대한 나쁜소문과 좋은 소문이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나쁜 소문에만 안테나를 높이세워서 그것만을 귀 기울입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좋은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구원을 받고 문제해결을 받고 평안을 누립니다. 

오늘 예수님의 소문은 들려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그 옷자락을 휘날리며 우리의 곁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다음 기회로 미루고 그냥 따라만 가면 안됩니다.
이 여인은 기회를 만났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중으로 미루지 아니하였습니다. 늘 이 기회가 마지막 기회다. 오늘이 마지막 기회다 라고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을 수 있는 능동적이고 자동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으며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옷자락을 잡으라고 명한 일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여인에게는 자신이 하려고 하는 일에 방해꺼리만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으로 예수께로 달려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앞으로 와서 잡을 수 없으니 뒤로 와서라도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이 여자의 믿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능동적이고 자동적인 이 여인은 자기의 환경과 처지와 조건과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바꾸어졌습니다.
자신의 환경은 전혀 바꾸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자신이 예수를 의지하는 사람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예수의 옷깃을 붙잡는 사람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였을 때 그는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이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믿음이 기적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예수에게 속한 사람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맞추어지기를 기다립니다. 환경이 바꾸어지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이 바꾸어지는 길을 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다가오시기가 힘든 환경임을 깨달은 이 여인은 자신이 예수님께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옷자락을 잡은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부정한 자 더러운 자가 다른 사람과 접촉하게 되면 그 사람도 더러워지고 부정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떤 것으로도 더렵혀 지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모습을 가지고 있더라도 주님이 거절하실 이유가 없으십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율법을 어겼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이 율법보다 더 크신 주님이심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율법보다 크며 주님의 능력은 질병의 권세보다 크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람이 어찌 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뿐이었겠습니까?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은 이 여인에게만 나타났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만이 믿음으로 예수님늬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도 이 사건은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누가 이 여인처럼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잡겠느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속한 모든 것은 주님의 옷자락입니다. 믿음으로 만지면 믿으로 붙잡으면 반드시 기적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병을 고쳤습니다. 
병에서 놓여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의 믿음이 능동적이고 자동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천국은 지금도 침노를 당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능력도 여전히 침노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능동적인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을 때에 예수에게서 능력이 나갔습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주님의 능력을 침노한 것입니다. 
  
이 여인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주님의 능력이 침노를 당하는 것을 주님은 반기시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같은 자동차이지만 자동차의 기어를 전진으로 놓으면 앞으로 나가고 후진 기어를 놓으면 자동차가 뒤로 가는 것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믿음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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