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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머니의 기도 (삼상 2: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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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기도 (삼상 2:18~26)


지난번 자녀의 출산을 앞둔 한 가정의 기도 요청을 받고, 허겁지겁 병원에 달려가서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어느 가정, 어느 부부치고 아이들을 선물로 받으면 기뻐하지 않을 가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아이들이 방바닥을 기고 걸음마를 시작하면 웃음이 저절로 넘쳐납니다. 몇 살이 안 되어 글자라도 읽고 그림이라도 어설프게 그리면 집안에 천재가 났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합니다. 사람은 아이일 때가 제일 예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악이 무언지도 모르고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일도 없고 그냥 품에 안기니 이때처럼 귀여울 때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청소년기와 청년기로 들어가며 성장하고 나면 얘기는 아주 달라집니다. 어릴 때 그토록 사랑스럽던 자식이 뿔난 소처럼 치어 받으며 반항합니다.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사회에 반항하고 이런 저런 문제들을 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어느 부모의 표현처럼 “이럴 줄 알았으면 무자식이 상팔자일 뻔했다” 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지 않습니까?. 또한 집안에 며느리가 들어온 후 달라지는 아들을 보며 쓰러질 것처럼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들이 수없이 많지 않습니까? 딸이 결혼한 후 명절이나 휴가에 시집으로 곧장 달려가는 장면 앞에 망연자실한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정도이면 다행인 것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그 정도의 주관이 생기는 것은 성장의 한 부분이기에 뭐, 탓할 일도 아닐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렇게 사랑스럽던 아들이 도박에 빠져들어 자기 돈 뿐 아니라 회사 돈까지 손을 대고 경찰에 끌려가는 모습 앞에 부모는 혼절을 하듯이 주저앉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지방 대학에서 자취를 하던 아이를 보러 갔다가 그 자취방에서 살림을 차리고 살아가는 아들을 보고 망연자실한 부모의 이야기도 듣습니다. 오, 이것이 내게서 난 아이가 맞습니까?! 이런 아우성들이 이 곳 저 곳의 가정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정말 자식은 받는 대상이 아니라 키워야 할 대상입니다. 정말 어떻게 자녀들을 키워야합니까?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두 가정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두 결과의 종말을 보게 됩니다. 한 가정은 엘리라는 제사장의 가정으로 이스라엘의 명문가정입니다. 제사장 가정으로서 온갖 영적인 공급과 육적인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가정에서 자란 홉니와 비느하스.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가정에서 자랐지만 불행한 인생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제물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성전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을 합니다. 나중에는 법궤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지를 몰라서 전쟁터에 무기로 가지고 갔다가 빼앗기며 동시에 한날에 두 형제가 죽게 되는 비극을 맞게 됩니다. 그 아내는 아이를 낳다가 죽으면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이 가정에서 떠났다’는 뜻으로 짓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그 소식을 듣고 의자에 앉아 있다가 떨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우리는 한 가정의 종말, 나아가 한 민족의 종말을 이 사건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불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그것은 엘리라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져야 되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는 엘리의 아내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 그 이유는 두 가지 중에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는 엄마가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거나 또 하나는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했을 것입니다.

만약 엄마가 없었다면, 엄마 없는 자녀를 보는 엘리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했겠습니까? 죄를 지어도 그 아이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이 아이를 가르쳐야 될 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부모 품을 떠난 자녀는 아버지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 줄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성전에 제물로 가져온 고기를 함부로 건져 먹고, 성전에서 일하는 여인과 동침해서 백성들 사이에서 말이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정은 한나의 가정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한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가 받은 상처와 고통은 너무도 컸습니다. 삼상 1: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격동한다'라는 말의 히브리어(카아스)는 '마음을 슬프게 하다', 또는 '괴롭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마음을 아프게 하고 괴롭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브닌나는 한나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롭혔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브닌나는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자신보다 더 사랑한 것 때문에, 질투심에 불타서, 한나의 불임을 더욱 자극하며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렇게도 한나는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문제를 그대로 하나님께 가지고 그가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기도입니다. 그는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했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눈물로 기도합니다. 삼상1:10절에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 ” 그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습니다.‘사무엘’이란 이름은 히브리어 ‘솨마’(듣다)와 ‘엘’(하나님)이 합쳐진 단어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셨다”는 뜻입니다. 한나의 신앙 고백이 들어있는 이름인 것입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괴로운 한 여인, 그 여인으로부터 시작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으로 인해 구별된 삶은 사무엘이라는 자식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사사시대로부터 왕정시대로 넘어가는 큰 역사적인 시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앙적으로 결단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큰 영향력을 준 인물입니다. 동시에 다윗이라는 훌륭한 지도자를 발굴해서 키워내는 선지자로 세워졌습니다. 그의 그런 삶은 바로 한나에서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나는 기도로 얻은 아들을 또한 기도로 키웠습니다. 이 기도의 삶은 사무엘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입니다. 삼상 12장에 보면 그 역시 한 시대를 섬기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질 때 백성들에게 고별의 인사를 남깁니다. 그는 퇴임식에서 사울 왕과 백성들 앞에 공개적으로 묻습니다. 혹시라도 자기가 부정을 저지른 적이 있는지 말해 보라고 말합니다. 삼상12:3절을 보면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그러자 백성들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삼상12:4 “그들이 가로되 당신이 우리를 속이지 아니하였고 압제하지 아니하였고 뉘 손에서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나이다” 그는 정말 백성들 말대로 깨끗하게 사사의 직무를 감당했습니다. 그리고 퇴임 후에도 백성들을 말씀으로 가르치고 기도하는 진정한 원로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삼상12:23절에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 그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까지 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여길 정도로 기도의 삶을 인생의 최우선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과 기도도 있었겠지만, 부모의 간절한 기도, 특히 어머니 한나의 기도 덕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의 인생은 그 부모가 드린 눈물의 기도를 듣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걸작품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도 모두 하나님의 걸작품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한다 해도 자기 작품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설사 자기 작품으로 만든 다 해도 그것은 뻔한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걸작품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작품을 만들겠다고 나서다 오히려 망치고, 주물러 터뜨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애초부터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며 키우는 게 최선입니다. 그럴 때 정말 자식도 복을 받고, 부모도 흐뭇해하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아름다운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이태리의 한 예배당에 대낮부터 한 부인이 들어오더니, 교회 안에 앉아 막 흐느끼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너무 크게 흐느끼면서 울고 있는 그 모습을 그 교회의 감독이 지나가다가 보았습니다. 그 감독은 울고 있는 부인의 어깨를 치면서 “부인, 무슨 일이 있었나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 아들이 이단에 빠졌습니다. 죄악에 빠졌어요.” 그 감독은 이 어머니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부인, 기도하는 어머니의 자식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어거스틴은 결혼도 하기 전인 18세에 사생아를 낳는 등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30세 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가 남은 생애를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해서, 후세에 ‘성자’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땅위에 가득해지는 것입니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외롭게 자란 사람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그 사랑 이상으로 큰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들보다도 더 풍성한 사랑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특별한 은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미국 현 정부에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있지 않습니까? 이분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국무장관입니다. 흑인여성입니다. 우리나라는 외교부장관이 따로 있는데 미국은 국무장관이 외교부의 모든 일, 국내외의 일을 다 진두지휘합니다. 미국의 외교는 세계를 이끌어 가는 외교입니다. 전 세계를 조절하는 외교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이 약한 여성이 어떻게 이렇게 큰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몇 년을 지금 한 결 같이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고 나면 국무총리가 바뀌는데 이분은 보십시오. 계속 잘 감당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얼마 전 신문에 났습니다. 이분이 어떻게 일을 감당하느냐? 그 비결이 어디에 있느냐? 늘 기도한다는 겁니다. 항상 아침마다 기도하고, 백악관에서 금식기도까지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로 부르짖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어디에서 왔느냐? 이미 어려서부터 아버님이 목사님입니다. 어머니는 일찍이 돌아가셨지만, 그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것이 라이스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위대한 힘이 점점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기주의에 사로잡혀서 자녀들을 돌보지 아니하는 부인을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입장이 불리하면 얼마든지 자식을 내버릴 수 있는 어머니, 자식의 수치와 실패 앞에서 그것을 마치 남의 일처럼 등을 돌려대는 어머니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회는 그만큼 악해지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결여된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이 나중에 가서 무서운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나요? 그것은 마치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노인과 바다'등 불후의 명작들을 한 두 번쯤은 다 읽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쓴 작가 헤밍웨이는 노벨 문학상을 탄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의 마지막이 좋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명성을 뒤로한 채 그는 자살로 그의 인생을 마감합니다. 

작가 헤밍웨이가 엽총 자살한 이유는 어머니의 영향력 때문이라고 합니다. 20세기의 대표적 작가 헤밍웨이는 네 번 결혼하는 등 불행한 결혼생활을 거쳐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그의 어머니 그레이스였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집안 일을 싫어하여 아이들을 직접 돌보려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편집증적으로 욕심이 지나쳐 매일같이 아이들을 엄격하게 닥달했다고도 합니다. 

헤밍웨이는 그러한 어머니를 극도로 증오했으며 어머니에게 반항하여 가출을 시도하였다고 하며, 그의 아버지도 그의 어머니의 이러한 성격을 견디지 못하여 권총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헤밍웨이는 성격이 강한 여자를 제일 싫어했고, 부인이 조금이라도 간섭하면 이혼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너무 강한 어머니의 성격이 아들에게는 콤플렉스가 되어 매사에 균형감각을 잃고 반항 일변도로 빠지는 성품을 빚어냈고, 결국엔 자살이라는 비극까지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는 자녀의 실패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자녀의 무능력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자녀의 방황을 기쁨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한 줄 아십니까? 그것은 한나와 같이 자녀를 위한 끈임 없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결코 포기하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만이 갖는 힘, 이 위대한 사랑의 힘이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인생을 가꾸는 것입니다.

로버트 알 브라운이라는 시인은 ‘십자가의 기적’이라는 책을 썼던 사람입니다. 그가 쓴 이 책 내용 중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 하는 자리에 서 있는 마리아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조소하며 침을 뱉었지만 어머니 마리아만은 예수님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몸을 적시며 아들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그의 고통에 동참하며 서 있는 대목입니다. 그 순간을 로버트 알 브라운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그 발치에 서 있는 어머니는 생명을 주는 관계에 있었다. 아들은 육신이 못 박혔지만 어머니는 그 영이 못 박혀서 서로가 고통에 참여하므로 어머니는 그 아들을 지탱해 주고 아들은 어머니를 지탱해 주었다. 여기에 영원한 승리가 있었다.”

저는 브라운의 주관적인 해석이 퍽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참으신 것이 인간적인 사랑 때문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어머니라는 관계에서 볼 때는 브라운의 묘사가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같이 나누는 자리에는 위대한 승리가 따라 옵니다. 또 그 위대한 승리를 가져오는 데에는 어머니의 사랑만이 갖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방탕한 자식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눈물을 흘려 보십시오. 그 어머니의 눈물 속에 아들을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놀라운 사랑이 숨어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합시다. 자식의 장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식의 장래는 기도하는 부모의 무릎에 달려 있다.” 사실 우리가 자녀들을 뒷바라지한다고 하지만 얼마나 잘 할 수 있겠습니까? 하루 24시간 내내 할 수 있나요? 어디든지 따라다니며 할 수 있나요? 우리 인생이 짧은데 자녀의 평생을 책임져 줄 수 있나요? 어림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뒷바라지를 하고 기도의 뒷바라지를 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부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좀 부족해도 기도 뒷바라지를 잘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렘33:3절을 보십시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러므로 자녀를 위해 소망을 잃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탈출입니다. 한나는 기도해서 절망에서, 고통스러운 삶에서 탈출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힘으로 탈출할 수 없는 모든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기도하면 우리는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가정에 있는 모든 불행, 저주, 멸망, 질병, 여러분을 덮고 있는 감당할 수 없는 모든 검은 먹구름들을 기도할 때 우리는 거기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이런 저런 자식들을 끌어안고 기도하려고 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땅에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모든 어머니들과 함께 자녀를 위해 기도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누가 예외가 있겠고, 여기에 누가 기도 없이도 살아갈 자신만만한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어머니 기도회가 빨리 교회에 시작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제 이번 주 8일 수요일부터 어머니 기도회는 우리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현장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부모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어지러운 이 세대에 자라나는 이 땅의 우리의 자녀들이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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