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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사 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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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사 53:1-3)


[4개교단제주총회]

지난 주간 제주 성안교회에서 제93회 교단총회가 열렸습니다. 형제교단 합동측과 합신측, 基長도 같은 기간에 각각 제주도에서 교단총회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모인 연유는,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셨던 이기풍 목사님이 1908년 에 제주선교사로 제주 땅을 밟은 지 10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함입니다(이기풍 목사님‘平壤’은,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였고, 순교자입니다). 

비행기로 한 시간 남짓 되는, 제주선교 100주년기념총회에 가는 발걸음이 참 죄송스러웠습니다. 100년 전, 이기풍 목사님은 선교사로 제주도에 가기 위해서, 목표에서 배를 타고 보름 이상 걸려 가셨는데(항해 중, 난파당하여 대다수의 일행이 목숨 잃었는데), 천신만고 끝에 밟은 제주 땅인데, 아무 고생 없이 비행기로 쉽게 가는 것이 참 죄송스러웠습니다. 

수요일 밤, 4개 교단 총대들과 제주교회교인들, 약 5000명이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분열 된 지, 60년 만에 처음으로 함께 모여서 연합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에서 함께 모인 5000여 총대들에게는 자랑보다는 부끄러움이 더 많았습니다. 60년 만에 만난 첫 연합예배였지만, 감사보다는 3가지 참회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 신사참배 가결하고 신사참배 했던 우리교단총회의 결의에 대하여 참회했습니다. 1938년 9월 9일 제27회 총회(평양 서문밖 교회), 총칼로 무장한 일본경찰 97명이 193명의 총대 사이사이에 끼여 앉아서 살기가 등등한 분위기 속에 결국, 우리교단 총회는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我等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하며, 써(以) 신사참배를 솔선 勵行하고(힘써 행하고), 추이(追而)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함”이라 결의했습니다. 

참회기도를 드리면서, 윤동주 선생님의 십자가란 시가 가슴에 비수처럼 와 꽂혔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식민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참회하고, 십자가를 지셨던 행복한 예수님을 감히 따라가겠노라는 결의가 묻어나는 시입니다. 

쫓아 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 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尹東柱 1941.

바벨론 포로 후 느헤미야처럼,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신사참배한 조상들의 죄에 대하여 참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사분오열된 장로교회의 분열의 죄를 참회했습니다. 1951년 고신, 1953 기장, 1959년 합동과 통합이 분열 되었습니다. 나름대로 다 이유야 있지만, 지금에 와서 우리가 공감한 우리 안에 있는 죄악은, 인간중심적인 지역갈등, 개인적인 감정대립, 교권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고 참회했습니다(100개넘음).

(3) 우리는, 해방과 건국이후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지만, 교회가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음을 참회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청소년 문제, 가정 붕괴, 교육문제, 윤리도덕이 해이해지고, OECD 국가의 평균보다 자살률이 두 배가 넘습니다. 알코올, 도박 중독국가가 되었습니다. 우울증환자가 300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 모두, 교회가 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죄악임을 참회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자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왜 한국교회가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기준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시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만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는, 예수님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은사가 귀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은사보다 더 귀한 것은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성령님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 13)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성령님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지울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영적 나침반을 잃어버린 것 아닌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수님 비슷한 것을 예수님인 줄 알고 막 쫓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두려움으로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 26-7). 이것이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따르고자 했던 바울이 가진 두려움이었습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가(사방을 둘러봐도 바다밖에 보이지 않을 때), 주변바다를 보면서는 항해하지 못합니다. 나침반이 있어야만, 항해할 수 있습니다. 좌우가 분변됩니다. 배의 위치가 어딘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 유일한 기준은 나침반입니다. 예수님은 항해하는 저와 여러분의 나침반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과 말씀에 귀 기울입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53장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를 줍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대다수의 유다 백성들(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내신 고난의 종,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영원하신 아버지라(사 9, 6). 구원자이십니다. 길이십니다. 진리이십니다. 생명이십니다. 빛이십니다. 양 의 문이십니다. 선한 목자이십니다. 생명의 떡이십니다. 가지 된 우리들에게 생명의 원천을 공급하시는 포도나무이십니다(요 15, 1-5).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따르지 아니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지 아니했습니다. 선지자는 주전 700여 년 전에 이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고난의 종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했습니다. 

▶ 선지자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여기 팔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뜻인, 하나님의 능력이 고난의 종 예수님에게서 나타났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따를 만한 매력을 도무지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배척했고, 거부했습니다.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귀히 여기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멸시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조차보기를 꺼려했습니다. 선지자의 증언을 보십시오.

“그는(고난의 종 예수님은) 주(하나님)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강하지 않습니다, 강인한 이미지가 없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가 얼마나 연약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보기에)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런 모습을 취하신 예수님이 결국 어떤 취급을 받으신다고 예언합니까?(사 53, 1-2)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병을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 3).

그렇지만, 선지자는 이미 이사야 6, 13에서 반전을 선포하지 않았습니까? 대다수의 유다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버리겠지만,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남은 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사 6, 13).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종으로 묘사되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예언서의 복음 중의 복음이라 불리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선지자가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두 가지입니다. (1)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고난을 당하며, 죽임을 당하신다는 복음입니다. (2) 또 한 가지는, 그런데 고난의 종으로 오신 그 메시야를 사람들이 따르지 아니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선지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 예수님을 거부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놀라움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아니할 것이고, 예수님을 본받지도 아니할 것이며, 예수님을 멸시하여 버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선지자는,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말씀합니다. 여기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남은 자, 경건한 믿음의 사람들이 볼 때에도, 예수님을 귀하게 여길만한 外的인 모습이 없으시기에,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나중에서야 깨닫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우리’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하는 바로 ‘나’ 말입니다. 요나 선지자를 보십시오.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은 요나는, 거역하고 다시스로 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요나 선지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불순종의 이유를 분명하게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자기 자신의 基準이고, 자기 자신의 義입니다. 하늘에까지 사무친 그들의 죄악으로 니느웨 사람들은, 심판받아 마땅하고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자기 義였습니다(하나님이 공의로우시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의를 내려놓고, 겸손하게 예수님을 본받는 자 되어야]

우리 모두가 다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멸시하고, 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본받지 아니하였던 유다 백성과 같은 자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복음)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 38). 

그러나 예수님은 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 29-30).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란, 예수님을 본받는 자를 말하고 동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그 말씀에 겸손하게 응답하며 사는 자를 말합니다. 책을 한 권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14세기 독일의 경건한 믿음의 사람, 토마스 아 캠피스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이 책을, “그리스도인의 삶을 가장 완벽하게 요약한 책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토마스 아 캠피스의 열망이 책에 너무나 진솔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본받는 자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은, 한 순간의 일이 아닙니다. 평생에 힘써야 하는 신앙의 푯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옛 신앙, 헌신 다 잊어버려야).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빌 3, 13-16).

▶ 우리가 오늘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의 불신자들만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순종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자신의 부족함을 시인하고, 참회하면서,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마십시다.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자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 33). 저와 여러분이,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주님을 본받는 믿음의 사람, 다 되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본받고자 자기를 버리고, 내려놓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섬긴 선진들의 신앙, 우리도 본받게 하여 주옵소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할 만한 믿음 우리에게도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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