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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 5:7,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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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마 5:7, 눅 10:25~37)


사람은 크게 두 가지의 형태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중심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부류는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들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물론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도 물론 자기를 위해 세상을 살겠지만 그보다 남을 위해 살아가는 분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이 태어나 어렸을 때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만 그 사람이 어른이 되어 자녀를 둔 부모가 되면 자식들에게 베푸는 것을 더 기쁘게 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처럼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있고 타인을 베려할 줄 알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과연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오늘 팔복의 말씀을 주시는 예수님은 여덟까지 복중에 다섯째가 되는 복을 긍휼히 여기는 자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동안 저는 팔복말씀 중에 네 번째 복까지 말씀드렸는데 알고 보면 팔복 말씀도 크게 나눠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관한 복이고 또 하나는 타인을 위해 주시는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말씀드렸던 네 가지 복, 즉 심령이 가난한자의 복, 애통하는 자의 복, 온유한 자의 복, 그리고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은 모두 내가 잘되고 나에게 유익한 복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부터 드릴 말씀의 다섯째 복부터는 남을 위하고 사랑을 베풂으로써 받게 되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기도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세상을 이기주의적으로 살라고 가르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세상은 남이야 어찌 되었든지 오직 나만 잘 되면 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 주님의 가르침은 여덟까지의 복중에서 절반의 복은 자신을 위해서 나머지 절반은 타인을 위하며 사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내가 있으면 반드시 네가 더불어 존재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나만 존재하는 것처럼 세상을 살 때가 많습니다.  

원어성경의 긍휼이란 히브리어로 ‘하말’이라고 합니다.  이를 해석하면 ‘불쌍히 여기다’란 뜻이 되는데요?  이웃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 고아와 과부들을 불쌍하게 여기며 그들을 도와주며 사랑을 베푸는 마음이 곧 긍휼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운 이웃을 불쌍히 여기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내가 남의 허물을 덮어주면 나의 허물도 덮임을 받습니다.  내가 남을 위하여 기도하면 남도 나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웃을 불쌍히 여긴다고 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불쌍히 여기는 일로 큰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남을 불쌍하게 여기면 우리의 모든 삶을 공평하게 판단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내가 하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도 우리를 외면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고백합니다만 주기도문 중간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에게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란 기도처럼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지 않으면 결국 우리 죄를 사함 받지 못할 수 있다는 말이 되듯이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하나님 역시 그럴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루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있는 물건 다 빼앗기고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 그길로 내려가다 그를 보고 피해지나 갔습니다.  

또 얼마 후 레위인도 지나갔지만 그를 보고 피해 지나쳐 버렸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 중이었지만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그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발라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주막 주인에게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하고 부비가 더 들면 다시 돌아올 때 모든 것을 갚아주겠노라고 하며 그를 끝까지 돌보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며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물으셨을 때 율법사는 뭐라고 답했습니까?  자비를 베푼 자라고 했습니다.  이 율법사는 이웃에 대하여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긍휼은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알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긍휼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비유의 등장하는 주요 인물가운데 제사장도 지나갔고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보다 성경지식에 능통하고 많이 아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정작 긍휼을 베풀어야 할 때는 눈길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 인들은 아닌지 자기를 한번 되짚어 봐야 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가운데 강도는 누구를 지칭하는 말이며 여기서 강도만난 자는 누구며, 제사장과 레위인은 누구며, 사마리아 인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들일 것 같으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우리 예수님 이십니다.  우리는 사실 알고 보면 강도 만난 자들이었습니다.  악한 원수마귀에 의해서 상하고 찌낀 상태로 다 죽어가던 자들이 아니었던가요?  우리 주님이 아니었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이미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긍휼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구속의 은혜로 저와 여러분들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애 3: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 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특별히 우리가 구원 받을 자격이 되어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엡 2:4-5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까닭에 긍휼이 무궁하신 역사적 사실에 의해 우리가 이 자리에 존재케 된 것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까닭이요,  당신의 독생자보다도 더 우리를 사랑하신 긍휼함이 무궁하심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죄 가운데서 구속하여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크신 긍휼함을 받은 우리가 어찌 긍휼히 여겨야 할 구원 받지 못한 백성들을 못 본체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무서운 죄명에 해당하는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 죄는 불고지죄에 해당하는 무서운 죄라는 겁니다.  

범인을 알고도 묵인하는 죄를 말하는데 이는 마땅히 구원 받아 마땅한 영혼들을 모루 새라 지나쳐 버리게 되면 차라리 연자 맷돌에 매달아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차라리 낮다고 (마 18:6)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습니다.  

여러분 가엽고 불쌍한 영혼들을 긍휼이 여기시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물론 길가에서 구걸이나 하는 거렁뱅이들 돈 몇 푼 집어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육적으로 보면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불쌍한 것은 육신은 멀쩡한 듯 보일지라도 영혼이 병들어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영혼들이 더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에 결론은 무엇입니까?  너도 이와 같이하라고 결론을 주님께서 내려 주십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의 마음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바로 긍휼의 삶이며 예수님이 보이신 삶이 바로 사랑과 긍휼의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이 잘못된 형식이나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신앙이 아닌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있는 신앙을 원하십니다. 
사 58: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무엇보다 긍휼을 행하여야 만하겠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려면 긍휼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신앙의 덕목이 그렇지만 긍휼은 특히 행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행함이 연결되지 않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은 헛된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의 마음속에 용서와 사랑의 마음이 좋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있지만 행동하기 쉽지 않습니다.  희생이 요구되고 나의 것이 손해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습니다.  생각이 행함으로 이어지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동행하기로 결심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긍휼을 행하여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왜 실천하는 믿음이 되어야 할까요?


* 긍휼은 믿음의 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통하여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의 차이를 설명하였습니다.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의 차이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행함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행함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약 2:16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사람이 사랑을 마음이나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어도 행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르게 사는 일도 마음은 누구나 먹지만 희생이 따르기 때문에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믿음이 되려면 실천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 긍휼은 구원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마지막 때의 심판을 가르치면서 양과 염소로 구분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른편에 선 자들에게 아버지께 복을 받게 될 자들이라고 하시면서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오른편에 서게 된 자들이 자신들이 왜 구원을 받게 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 때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마 25:35,40“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자신도 모르게 행한 작은 사랑의 실천, 긍휼의 행위가 구원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긍휼의 대상은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가족, 친한 친구에게는 비싸고 귀한 선물도 아낌없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긍휼은 그러한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적이 되는 사람에게까지 행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하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심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입니다. 사랑의 마음만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을 작더라도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보면 참으로 많습니다. 동구에 있는 쪽방동네를 다녀왔습니다. 도심 한 가운데 그러한 마을이 있다는 것이 놀랐습니다. 저는 주님이 그 곳에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명감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가야 할 곳, 해야 할 일이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긍휼한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십니다.  
긍휼을 행하는 삶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자비와 용서와 사랑의 실천은 구원의 기준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는 삶의 비결이 됩니다. 

잠 11:24-25“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 지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필요한 지극히 작고 연약한 인간에 불과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받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존재하여야 사명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긍휼의 종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긍휼을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은 행복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만으로 감사하여야 합니다.  줄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줄 수 있을 때 주는 것은 더욱 큰 행복입니다.  평생 많은 것을 움켜잡고도 한 푼도 남에게 베풀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진정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사랑을 나누는 하나님의 자리에 동참하는 것이며 예수님의 사역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한 평생 나누어 주고 돕고 베풀며 살아가면서 행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긍휼을 누리는 행복을 맛보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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