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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전부이신 예수님 (갈 5: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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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전부이신 예수님 (갈 5:2~1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5장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를 굳게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그만큼 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에 빠져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시어 자유케 하셨다. 또한 아들이 누릴 수 있는 자유권도 주셨다. 아들은 아버지께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다. 아버지의 방으로 자유롭게 출입할 수도 있다. 주님은 이제 그 자유를 굳건히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Africa에는 전쟁으로 인해서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기고 있다. 그래서 국제사회는 그들을 구출하여 입양하려는 움직임이 많다.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노예의 자리에서 구출하고 있다. 그들은 양부모의 보호 아래서 자란다. 그런데 그들은 양부모를 부모라고 부르지 못한다. 과거의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이 충격에서 쉽게 벗어나오지 못하고 계속 두려움 속에 산다면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입양된 자들이다. 그리고 양자의 영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를 즐길 수 있다. 인간 최대의 본분은 하나님을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그 자유가 주어졌는데 이것을 누릴 수 없다면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기도하며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려야 한다. 

본문 2-12절은 주님이 주신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꼭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이심을 믿고 이것을 누리는 것이다. 

마13장에서 주님은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밭을 갈다가 보물 상자를 발견하였다면 자신의 것을 모두 팔아서 이 밭을 사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같다는 것이다. 물론 보물 상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보물임을 알았다면 우리는 그 분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릴 것이다. 주님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분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 

2절부터는 할례를 강조하는 자들를 언급하고 있다. 할례는 언약을 상징하는 것이다. 나의 몸에 지니고 있는 언약의 상징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들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문제였다. 구약의 율법과 가르침과 전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에 완성되었다. 히10:1을 보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장차 오는 좋은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실체요 참 형상이 오시면 그동안의 그림자와 그림은 소용이 없게 되는 것이다. 연애를 하지 않거나 선을 보지 않고 결혼하던 시대에는 결혼할 사람의 사진을 보고 결혼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사진을 보고 결정하였다가 나중에 결혼할 사람이 실제로 온다면 그 때부터 그 사진은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바울은 모든 언약과 율법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다른 전통과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라고 했다. 구약의 모든 가르침과 전통과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완성되었다. 본문의 1절에서는 자유를 굳건히 지키라고 하였고, 2절부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지켜야 할 것들을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은 다른 성경 구절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엡1:7을 보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은혜의 풍성함이 그의 안에 있다고 한다.

빌4:19을 보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이 그의 안에 있다고 한다.

엡3:18을 보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넘치는 사랑도 그의 안에 있다고 한다.

골2:3을 보자.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모든 지혜와 지식도 그의 안에 있다고 한다.

골2:10을 보자.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모든 정사와 권세도 그에게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온전함이 그 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믿으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주어진다. 본문의 5절을 보자.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할례를 말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통해서 오직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면 의의 소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의의 소망이란 천국에서 가지게 될 의로운 의복을 말한다. 이 의복을 입고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른 것은 필요 없다. 할례도 전통도 율법도 필요 없는 것이다.

수3장을 읽다보면 머리에 그림 하나를 그릴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의 광경이다. 당시는 우기였기 때문에 요단강에 물이 많을 때였다. 제사장들이 법궤를 매고 요단강에 들어가니 흐르던 물이 멈추었다. 그들이 강 가운데서 법궤와 함께 서있고 백성들이 법궤를 바라보며 강을 건넌다. 이것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마지막 모습이었다.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을 인도하던 법궤가 마지막 순간에도 그들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마음에 그리며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입성하고 있다. 이 언약의 완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것은 주님의 피로 완성된 신실한 언약이었다. 우리가 인생 모든 여정을 끝내고 주님의 나라에 입성할 때에 우리는 마지막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보게 될 것이다. 인생을 통해서 줄 곧 우리를 인도한 그 십자가를 마지막으로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다 하셨다는 고백을 하며 이 땅의 마지막을 정리하게 된다. 그 분께 감사하기를 어린 양 예수께 감사하고 십자가를 마음에 스케치 하며 천국으로 들어 가게 될 것이다. 그로부터 하나님이 ‘나와 함께 영원히 살자’ 라고 하실 것이다.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셨고 우리를 지켜주셨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다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다.예수 그리스도는 이같이 우리의 구원과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다. 

그러므로 다른 전통과 율법과 인간의 모습과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다고 말하는 것은 사탄의 계획 속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의 시험이다. 

2-4절을 보자.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바울은 주님이 하신 일에 아무 것도 더할 수 없고 더 할 필요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락방과 예배와 훈련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전부가 되심을 알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굳게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드려야 한다. 

8-9절을 보자.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악한 세력이 그들은 장악하기 위해서 퍼지는 모습이다. 그리고 10절에서 그들에게 내릴 심판을 말씀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우리는 주님을 굳세게 잡아야만 자유 안에서 주님을 우리의 전부로 모실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주님을 우리의 전부로 모실 때에, 실제로 우리 삶을 통해서 보여지는 모습은 어떤 것들인가? 우리의 전부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에 우리의 모습은 바로 살전5:16-18에서 보여주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 항상 기뻐하라.

우리의 기쁨은 환경에 속한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는 형통은 세상의 것과 전혀 다르다. 요셉의 삶이 점점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점점 어두워 질 때에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의 삶이 형통하였다. 형들에 의해서 팔릴 때도,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힐 때도 그는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형통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의 의미와 다르다. 성경이 말씀하는 형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자체를 뜻한다. 우리의 전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형통한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옥에 갇혀 있을 때에 얼마나 뜨겁게 찬양을 하였는지를 기억하자. 실컷 매맞고 고난을 당하며 내일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들은 기쁘게 찬양 했다. 그리고 그 때에 땅이 흔들리고 간수가 예수를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 기쁨은 상황과 상관 없는 기쁨이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가 있을 때가 기능한 것이었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나의 힘이라고 노래 했다. 세상이 결코 기쁘게 할 수 없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방이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찌라도 세상을 이기려면 예수가 나의 전부임을 믿고 노래하면 된다.

(2) 쉬지 말고 기도하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가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기도의 문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로 직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그를 통해서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기도하는 특권이 주어졌다. 기도의 특권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영안을 열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강성하고 번성하였다. 그들의 지도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사실은 인생적으로 끈이 끊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 때부터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출1:11,12절을 보면 애굽왕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노예제도를 시작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그가 히브리인들을 탄압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번성하였다. 그리고 16절에서 드디어 애굽왕은 산파들에게 태어나는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17절에서 그 산파들은 이스라엘의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들을 살려주게 된다. 죽음의 agents로 갔던 자들이 생명의 agents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기도하면 더 높고 더 넓으며 더 깊이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이 나의 끈 되심을 알게 된다. 탄압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화되어지면서 울부짖을 때에 하나님이 저들을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상황을 전환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기도로 가능한 일이다. 그 분의 이름과 공로를 붙잡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보고 그 분의 손길을 볼 수 있게 된다. 

(3) 범사에 감사하라.
범사에 감사하는 일은 언제 가능한가? 축복 자체를 지나서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 만을 바라볼 때에 가능하다. 요새 정말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오직 하나님 만을 주목하자. 오직 감사와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주목할 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감사를 드리게 된다. 

복음서에는 10명의 문둥병자가 나음을 받은 사건이 나온다. 그들은 가족들마저도 버린 불쌍하고 아픔이 있는 인생들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오실 때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 주님은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난 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동안에 완전한 치유를 받았고 기뻐 뛰며 가족에게로 먼저 갔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한 명! 그가 주님께로 돌아와서 감사와 경배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 주님은 ‘일어나라 네 믿음이 너를 치유하였다’고 하셨다. 그 한 명의 문둥병자만이 진짜 치유를 받은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고 감사해야 한다.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 예수를 바라보고 감사해야 한다. 그 분이 우리 죄를 도말하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삼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보고 감사해야 한다. 천국에 우리를 위한 저택을 예비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께 감사할 수 있다. 이것은 능력이다. 오병이어 기적은 감사할 때에 일어날 수 있었다. 

빌4:6-7을 보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주님은 오직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하신다. 생각해보라.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사실은 모두 감사한 일이었다. 감사를 하다가 문제가 해결 될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렇게 될 것이다. 감사는 능력이며 기적이다. 

요즘 상황이 어렵다고 감사할 수 없는가? 감사의 조건을 찾아보자. 우리가 범사에 감사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그 분은 나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그 분은 나의 감사가 되신다. 이와같은 감사가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할 수 있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아멘.  (김승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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