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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정한 용서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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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용서 (마 18:21~35)


오늘은 주일인데, 우리 민족의 고유한 명절인 중추절, 한가위, 추석입니다.  참 좋은 명절이요,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예배드리고, 이야기 꽃을 피우고, 음식을 나누고 즐겁게 노는 날입니다.  오랫동안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이고, 대소가의 친지들이 한 자리에 모여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우리 속담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이 있습니다.   추수절기인 추석이 되면 먹을 것이 많고, 인심도 넉넉하기에 가장 기쁘고 즐거운 것이 날입니다.   그래서 일 년 365일이 한가위만 같으라는 바램에서 나온 말입니다.  

동아닷컴, 조선닷컴에 연합뉴스에 제공하는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한가위 연휴…‘배려 부족’이 참극 부른다.”는 기사가 올라 있었습니다.  가족이나 친척,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할 추석이지만, 서로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면 작은 시비가 참극으로 번진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추석 연휴에 가족들 간에 사소한 다툼과 갈등이 마침내 살인으로 비화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형제간에, 친척지간에 배려가 부족하면, 사소한 감정이 큰 화를 불러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가지고 용서에 대한 교훈과 가르침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다보면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에서 오는 오해와 불신, 그리고 나아가 미움과 반목, 더 나아가 배신과 갈등을 불러오고 원수시하는 것을 봅니다.  

가장 거룩하고, 사랑이 넘쳐야 하는 교회인데, 가장 용서가 필요한 곳입니다. 우리나라 대형교회들이 문제가 아주 많았습니다.  지도자들의 질시와 반목이 온 교우들의 다툼으로 확대되고,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들, 한 구역에서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연구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지금은 원수처럼 대합니다.  한 가족 안에도 편이 나누어집니다.  어제까지 그렇게 몰려다니며 친하던 오랜 친구 사이인데, 죽어라고 미워합니다.  

제가 1980-82년도까지 부목사로 시무하였던 교회가 1만여 명이 모이는 초대형교회로 성장하였는데, 두 편으로 나뉘어 3년 동안 싸우는 동안 철천지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을 싸우는 교회에 보낼 수 있습니까?   교회가 어렵게 되면 자라나는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정말 못할 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마18:6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어제까지 한 자리에 앉아 함께 성경 공부하던 학생들이었는데, 오늘은 부모님을 따라 나누어 서로 싸우게 되었으니,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할 일인지, 정말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런 대형교회의 싸움과 세습이 교회 성장을 가로막고 대사회적인 이미지를 흐려놓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지금 종교 간의 갈등이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지금 빨리 치료해야 하는데, 점점 더 곪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많이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진 사람, 많이 배운 사람과 조금 배운 사람, 집이 좀 큰 평수에 사는 사람과 적은 평수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갑니다.  

여름휴가 때에 강원도의 한 조그만 동리에서 승용차를 타고 메밀 국수집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차를 몰아서 골목을 돌아 나와 큰 길 옆에 주차하는데, 한 부인이 차를 몰아서 제 차 옆에 확 붙이면서, 창문을 내리고 큰 소리로 욕을 퍼부었습니다.   저는 욕먹을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가속을 했다든가, 추월을 했다든가, 끼어들기를 했다든가 무슨 잘못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부인이 왜 욕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주차하는데, 뒤에서 바짝 따라온 것 같습니다.   “예, 미안합니다.  이곳에 처음 와서... 죄송합니다.  이해하고 가세요.” 하고 손을 흔들어보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부인이 째려보면서 그냥 갔습니다.   그 때, 우리 내외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부인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잘 넘어갔다고 생각합니다.  메밀국수를 먹으면서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그 날 그 부인과 다투고 먹었으면, 그 날 점심은 가장 맛없는 음식을 먹었을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이런 말들은 천국을 만드는 말입니다. 

목사님들이 모여서 QT하다가 용서하는 문제로 많은 시간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얻는 결론은 진정한 용서는 화해로 이어져야 하고, 상처는 치유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와 치유, 이것을 같은 선상에 놓고 함께 시도해야만 합니다.  용서를 빌고 용서하였다고 해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용서가 문제를 봉합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해는 서로 간에 노력해야만 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받았던 상처는 치료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완전한 용서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빌고 용서하는 문제는 말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만남으로 될 수 있습니다.  함께 하는 시간이 화해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공감하며 함께 삶을 나누는 것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저와 어느 사람 간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였으면 정말 좋을 터인데, 잘못을 잘못으로 알기나 해야, 용서하든지 말든지 하겠는데, 그는 항상 잘못이 없습니다.  언제나 고고한 의인입니다.  잘못했다고 회개하여야 용서하겠는데, 자기는 전혀 잘못된 것이 없다는 사람에게 일부러 찾아가서 내가 용서한다고 하면, 싸우자고 달려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습니까?  용서하기란 참으로 어렵고,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용서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쉽다고 하면 왜 설교할 것입니까?  참으로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함께 이 문제를 풀어보자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자기에게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하고 후한 것을 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에게 속한 것은 유리하게 해석하고, 자기가 하는 일은 다 관대하게 봐주고, 자기에게는 120점의 후한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모자라는 사람, 혼나봐야 할 사람, 언제나 용서를 빌어야 하는 사람으로 평균점수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하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다 나에게 찾아와 용서를 빌어야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가차 없이 깎아내리고 우리의 허물을 발견하고,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있지만, 실상은 죽은 사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선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죄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고 용납하시고 인정해주는 것을 생각하면 용서하지 못할 일들이 어디 있으며, 용서 못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용서받은 감격을 가지고 나아가서 우리 시대에 함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더럽고 추한 죄와 허물로 본질적으로 죽어야 했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므로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여야 합니다. 


용혜원 시인의 시 중에 “우리들의 삶의 무대가”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무대가 / 막을 내리기 전에 / 마음껏 행복을 누리며 / 살아가야 합니다 // 죽음이 언젠가 우리를 / 갈라놓을 걸 생각하면 /사소한 일에 가슴 아파하고 /미워해야만 할 이유가 없습니다 //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점점 줄어드는 /삶의 시간들 속에 /마음껏 기쁨을 누리며 / 살아가야 합니다 // 열렬히 사랑해도 / 언젠가 둘 중에 하나는 /홀로 남을 것을 생각하면 / 작은 일로 화를 내고 투정할 필요 없이 / 삶을 온통 사랑의 시간들로 /채워 나가야 합니다//  

사소한 일에 가슴 아파하고, 미워해야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작을 일로 화를 내고 투정할 필요 없이 삶을 온통 사랑의 시간들로 새워나가야 합니다. 

"화해의 악수"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미국 부통령을 역임한 험프리 의원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미망인의 옆자리에는 놀랍게도 평생의 정적이었던 닉슨 대통령이 앉아 있었습니다. 험프리의원은 평소에 닉슨 대통령을 가장 괴롭힌 정치인이었습니다. 험프리 의원은 죽기 사흘 전에 잭슨 목사님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목사님, 죽기 전에 닉슨 대통령을 만나게 해주세요.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어요” 닉슨 대통령은 잭슨 목사님을 통하여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비행기로 달려와 손을 마주잡고 화해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사에서는 죽을 때까지 화해하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다가 그대로 죽을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예수님의 정신과 사상과 신앙을 이어받고 그 분이 살아가신 발자취를 따라 간다고 말하는 우리들은 예수님이 용서하시고 이해하시고 관용하시는 정신을 그대로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참으시면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처음 말씀하신 것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하셨습니다.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은 용서하여 달라는 말입니다. 당신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무자비하게 내려치고 핍박한 사람들, 십자가에 매달고 못을 박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인데,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용서의 본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하라는 말씀을 수없이 강조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신과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고 하면 사랑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고 하셨습니다. 

미움이라는 것은 암 덩어리와 같습니다.  우리 마음에 미움이라는 덩어리를 가지고 있으면 온갖 질병이 발생합니다. 정서적인 질병이나 신경 정신적인의 질병들은 거의 다 이 갈등과 미움과 증오로 인하여 생기는 질병입니다. 

용서는 건강을 되찾아줍니다. 이것은 용서와 건강의 관계를 40년 동안 연구해온 북캘리포니아의 ‘태도치유 연구센터’가 내린 결론입니다.   사람들이 분노와 배신감, 상한 마음을 해결하지 못할 때에는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의 사람에게도 육체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고통을 불러옵니다.  용서는 세상의 어떤 약보다도 건강에 유익합니다. 예수님은 평생 용서를 말씀하셨고 사랑을 강조하시다가 죽으실 때에도 용서의 기도를 드리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베드로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생활을 보고 은혜를 받은 베드로는 예수님의 정신과 사상은 사랑과 용서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사람이 찾아와 용서를 구하면 세 번까지 용서하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의 죄와 허물을 무한정 용서해주면 사람이 잘못되고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아주 크게 인심을 쓰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용서의 한계는 세 번이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다메섹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하였음이라”(암1:3)고 합니다. "서너 가지"라고 하여 유대인들의 전승에는 세 번까지만 용서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할 때 예수님은 사랑을 강조하고 있으니 랍비들의 한계를 적용하여 사랑과 용서를 말하면 부족할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래서 넉넉하게 일곱 번쯤이면 될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일곱 번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18:22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일곱의 일흔이라고 하면 490 번이라는 수치를 가지지만, 이 말씀의 원래의 뜻은 얼마든지, 또한 끝까지 용서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정리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용서의 한계를 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용서할 수 있으나, 저것은 정말 용서할 없다는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용서의 한계나 조건을 묻고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용서해야 하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려고 합니다. 용서하는데 한계를 정하고 용서하는데 조건을 달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되지 못합니다. 조건 없는 용서가 진정한 용서입니다. 한계를 초월한 용서가 진정한 용서입니다. 앞으로 몇 번까지만 용서해주겠다고 한계를 정해놓고 있으면 지금 몇 번 용서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은 기다려보고 있는 것이요, 진정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하고 그것을 나의 신념으로 만들었기에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보 같지만 그냥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살아가면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낳고 용서가 다른 용서를 낳은 것을 체험하십시오.  상식을 말하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상식을 넘어서야만 합니다.  우리의 용서가 상식수준에 머물면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그가 찾아오지 않아서 용서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어 밀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 그가 먼저 손 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교만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라고,  CC간사이신 최용덕 선생은 내가 먼저 손을 내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은 천국을 말씀하려고 합니다.  비록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지만, 천국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살면 그는 천국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를 연습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연습하는 장소가 바로 교회입니다.  

어느 나라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재정을 결산할 때가 되어서 신하들을 부르는 중에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한 신하가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라는 돈은 사실 천문학적인 금액입니다.  어떤 학자는 우리나라 돈 3조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만 달란트라는 돈은 상징적인 돈입니다. 1달란트라는 돈은 6000데나리온으로 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하면 국민 육천만 명이 하루를 일한 것을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하루 노동자가 5만원 정도 받을 수 있다면 3조원에 해당하는 말이 됩니다. 

이 신하가 왕 앞에 불려나와 섰습니다. 왕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네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아라"고 했습니다. 종은 왕에게 엎드려 절하면서 "조금만 참아주시면 다 갚겠습니다"라고 구구절절이 사정 드렸습니다. 이 신하가 노예로 팔리고 되고 아내나 자식들이 노예로 팔려간다고 해도 다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돈이기에 왕은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놓아 보내며, 일만 달란트를 갚지 않아도 좋다고 탕감하여 보냈습니다. 

이 신하가 집으로 가다가 자기에게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는 한 동료를 만났습니다. 이 동료는 100데나리온의 빚을 갚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하는 가다가 100데나리온의 빚을 지고 갚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자 도망가지 못하게 붙들었습니다. 역시 노동자가 하루에 5만원을 받는다고 하면 5백만 원입니다. 그는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의 목을 휘어잡았습니다. "빚을 갚으라"고 독촉합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 간구하였습니다. "조금만 참아주소서. 갚으리이다" 참으로 애절하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왕의 신하는 전혀 요동치 않았습니다.   말미를 주지 않고 빚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몰인정한 신하였습니다. 자기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금액을 탕감 받았는데, 너무나 잔인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소식을 다른 신하들이 왕에게 진정하였습니다. 

왕이 신하를 불러서 “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고 야단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주인이 노하여 자기에게 빚진 것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게 넘기고 말았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마지막에 이런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임금과 신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죄의 용서와 우리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용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탕감을 받은 죄악은 일만 달란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죄악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사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죄를 살펴보면 일백 데나리온 정도의 성질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죄와 허물을 용서받았는데,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주 적은 죄와 허물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갚으라고 하시면 사형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셨다는 것으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은 왕에게 있어서 엄청난 손실을 감안하면서 탕감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용서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희생이 들어 있는 사랑이요, 은혜였습니다. 그 희생은 우리 구주 예수님에게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게 하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시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아픔과 희생이 있는 탕감이요 면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탕감 받았다는 감격이 넘쳐야 하는데, 나는 아직도 받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감격 속에서 살기를 바랍니까? 100데나리온 받을 것이 있다고 자랑하실 것입니까?  하나님의 용서하심 속에는 나에게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다 탕감하는 것을 포함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야 하고, 은혜의 강물이 흐르게 해야 합니다. 용서에는 한 생명을 살리는 힘이 들어 있습니다. 용서하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합니다. 용서보다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명약은 없습니다. 

화해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를 이루셨기에 여기에 응답하는 새로운 존재로 하나님의 크신 구원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화해와 평화의 사역자로 세상에 나아가야겠습니다. 화해를 이루시는 예수님,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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