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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 즐거워하라 (신 16: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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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즐거워하라 (신 16:13~17)

 
감수성이 높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자살률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 유명 연예인이 자살한 것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집니다. 2008년 9월 통계청 자료에 우리나라 사람의 사망 및 사망원인에 관한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자살이 사망 원인의 네 번째를 차지했습니다. 하루에 무려 33명꼴로 자살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1년 동안 자살하는 한국인의 숫자가 13,000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자살한 사람들이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10년 전에 비하면 4배로 증가한 수치입니다. 한국인의 자살률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첫 번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신세계가 피폐해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세계 어떤 민족보다 감수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런 순간적이고 감정적인 생각이 자살률을 높이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아가는 것은 무엇일까요? 목숨을 걸만큼 인간이 집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때로 그것은 생활고일 수도 있습니다. 돈과 재물을 추구하다가 파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연애를 하다가 실패한 경우도 있습니다.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다가 좌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이 꿈꾸던 현실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 낙심하며 최악의 상태로 치닫는 것이 자살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기에 한 마지막 선택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생명을 주셨을 때는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에 자유하게 행동할 수 있고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손을 올릴 수도 있고 내릴 수도 있습니다. 눈을 감을 수도 있고 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에 관해서만큼은 우리가 아무리 호흡을 멈추려고 해도 멈춰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심장을 멈추고 싶어도 스스로 멈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하도록 제어장치를 해 두셨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잠시 멈추어 인생의 기쁨을 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소중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가치 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함부로 죽음을 향해 가려할 때 몸속에 제어장치를 마련하셨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는지 모릅니다. 성공신화를  만들어 보려고 피곤하게 지쳐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잠시 쉬면서 다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위대한 유산”이라는 책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얘야, 속도를 좀 늦추어 보렴. 그래야 풍요로운 세계를 그냥 지나치는 일 없이 바라볼 수 있단다. 세상 속을 들여다보는 것은 바쁜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지.”인생을 음미하고 맛 볼 줄 알려면 지금 가던 길에서 잠시 멈추는 순간이 필요하다고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저자는 인생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STOP 운동”을 말합니다. ‘STOP’이라는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의 약자라고 합니다. 

S : Slow down 속도를 조금 천천히 늦춰라! 
T : Taste 인생을 음미하면서 살아라! 
O : Observe 관찰하라! 
P : Ponder 깊이 생각하라!

추석 명절이란 우리 백성 모두가 쉬는 자리입니다. 지난 8월에 열린 2008년 북경 올림픽을 통해 우리 모두는 마음의 쉼을 가졌습니다. 운동 경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기쁨도 누렸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감독 장이모가 개막식에 담은 화두(話頭)는 중국의 4대 발명품이었습니다. 한자라는 문자와 글, 도자기, 화약, 나침반이었습니다. 개막식 서두 첫 자막에 등장한 것은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글귀로 군자삼락(君子三樂)중 하나였습니다. 본래 군자의 세 가지 기쁨이란 첫째는 배움의 기쁨입니다. 둘째는 친구를 만나는 기쁨입니다. 셋째는 자족할 줄 아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공부했던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學而時習之 不亦悅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을 내지 않는 것이 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 

옛 성인이 한 이 말은 돈과 재물 이상의 기쁨입니다. 인간관계의 기쁨이고 삶의 기쁨입니다. 삶의 보람에 대한 가치관의 기쁨입니다. 인생에 슬픔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고통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넘어서는 기쁨의 역사가 무엇일까요?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기쁨입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도 많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인간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끊임없이 예배하라고 하실까요? 우리 인생의 기쁨과 평안,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멈추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아, 너는 너무 인간의 욕심만으로 무작정 뛰어가고 있지 않느냐?  그것을 잠시 멈추라!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서서 반성해 보라! 주저앉아 포기하려는 것이 괜찮은 것인지 생각해보고 다시 시작해라! 다시 도전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예배의 자리로 초정해주십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진정한 쉼과 평안을 가지고 도전하는 용기를 허락해주십니다. 예배의 진수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안식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의 진수를 가진 것이 이스라엘의 3대 절기입니다. 

첫째, 유월절이 있습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과 억압과 무지에서부터 해방시켜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인간이 억누르는 억압 속에서 살지 말고 넘어서라고 알려주는 것이 유월절입니다. 

둘째, 칠칠절(맥추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보리를 익게 하는 여름 추수감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절의 중간에 인생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를 확인하는 때입니다. 

셋째, 장막절(초막절)입니다. 본문 말씀에 등장하는 초막절은 가을에 드리는 추수감사절과 같습니다.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추석 명절과 같은 절기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유월절에 애굽을 떠났다가 가나안까지 가기 전 광야 에서 장막을 짓고 초막을 세워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던 40년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어려움 속에 살지만 마지막 땅 가나안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때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동참하며 인간관계의 기쁨을 누리십시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초막절, 우리가 경험하는 추석 명절에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인생을 기쁨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즐거워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장막절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두 가지 이유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첫째,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동참하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씨를 뿌리면 열매가 맺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작은 씨를 뿌렸는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가슴이 벅차오르며 기뻐합니다. 

둘째, 인간관계의 정을 나누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초청해서 한 마음, 한 공동체로 기쁨을 나누는 것이 장막절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추석 명절과 비슷합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창조성에 즐거움으로 참여하라는 뜻이 무엇인지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신명기 16:13-15) 

온전한 기쁨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참여할 때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경험할 때 우리에게 기쁨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변명하기 위해 꾸며대는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자연은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뿌린 대로 거두게 됩니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납니다. 콩을 심은 곳에 팥이 나고, 팥을 심은 곳에 콩이 나면 그것은 자연 질서를 파괴하는 처참한 삶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창조의 비밀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수고하고 땀 흘리는 것이 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창조의 질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노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고하거나 땀 흘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창조의 기쁨은 사별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처음과 나중이 서로 다릅니다. 만약 씨를 뿌렸는데 씨가 그대로 남아있다면 누가 씨를 뿌리겠습니까? 그런데 가을이 되면 씨앗은 귀한 열매를 맺습니다. 소출이 풍성하게 맺혀집니다. 작은 투자가 큰 결실을 맺는 것이 창조의 비밀입니다. 공부하는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하고 목표한 전공을 택할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수고와 땀 흘림으로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해주실 때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법칙은 반드시 다시 시작하게 하십니다. 

추석명절을 맞이하면서 올 한 해를 되돌아보며 감사합시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물을 주기도 하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감사할 줄 압니다. 추수하는 마음에는 감사가 있습니다. 열매를 얻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따뜻한 봄과 여름을 주신 하나님, 적절할 때 비를 주시는 하나님, 뜨거운 햇빛을 주셔서 오곡백과가 익어가는 가을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것은 농부만의 마음이 아닙니다. 기업과 자영업, 전문직 종사자, 가정주부와 모든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가정주부가 수고하고 땀 흘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가족을 섬길 때 가족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이야말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창조의 신비 속에서 우리는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씨를 뿌렸는데 소출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너무 비가 안 와서 싹이 말라비틀어진 쭉정이가 될 때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 비통함과 좌절이 있습니다. 

올 한 해를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셔서 거둔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러나 창조의 법칙은 반드시 다음에 기회를 주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해보라고 부탁하십니다. 다시 창조의 법칙을 믿으며 시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 의심의 구름이 뒤덮을 위기를 맞이하는 순간에도 다시 시작하십시오. 

성경에 나타나는 위대한 믿음의 인물도 고난이 있었습니다. 고통을 겪지 못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도 인생의 고난이 많았습니다. 창조의 법칙을 알고 뒤따라갔는데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리는 것 같은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일어서서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이끌어 가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땀 흘려 다시 시작했습니다. 다시 믿음으로 도전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다시 세우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이웃과 함께 나눔의 기쁨에 참여합시다. 

초막절에 하나님은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풍요를 나눌 때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의 뜻하신 사랑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신명기 16:14)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입니다. 교회 안에 다양성은 있지만 차별성은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변증가이며 지성인으로 대학교수이자 문필가였던 C.S 루이스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었을 때 처음 감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처음에 나는 방에 들어가서 신학서적을 읽으면 혼자서도 기독교를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나 복음전도회관에도 나가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찬송도 극도로 싫어했다. 내가 보기에 6등급 정도의 저급한 가사를 더 형편없는 음악에 맞추어 부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나는 이 찬송의 놀라운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또 서로 다른 외모에 다양한 교육 배경을 지닌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점차로 내 자만심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성인으로 자신만 알던 그의 자만심이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하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때로 우리에게는 지성적인 자만심이 있습니다. 고상한 자만심,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는 자만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독단적인 자만심 속에서는 자라나지 않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나고 연약한 사람들과 나누는 자리에서 기쁨이 넘칩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복을 따라 힘대로 드립시다.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복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 가족을 지켜주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드립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신명기 16:16-17)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빈손이 아니라 주신 복을 따라 열매를 가지고 나옵시다. 가장 쉬운 것이 돈과 재물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빈손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축복에 감사하면서 주님이 주신 복을 가질 때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인생은 때로 고달프고 외로울 때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버린 것 같은 아픔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하나님이 주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도전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축복으로 인생을 마음껏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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