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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만져주십시오 (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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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져주십시오 (요 21:1~14)


추석이라 고향을 찾아가신 교우들도 꽤 많으시고 또 추석이기 때문에 특별히 저희와 함께 예배드리시는 분들도 또 많으십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이 특별한 주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하나님, 추석이기도 한데 추석 선물이 될만한 설교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했었는데, 오늘 이 설교가 여러분에게 추석 선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금 절기는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우울한 소식 뿐입니다. 심심찮게 자살의 소식도 들려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안타까운 것은 꼭 문제가 어려워서, 희망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낙심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절망스럽기 때문에 살 희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낙심의 영이 역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절망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그 영향이 있고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무서울 정도로 낙심의 영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낙심의 영에 공격을 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낙심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신학교를 갓 졸업한 목사가 교회에 파송을 받아가서 첫 설교를 했다. 예배를 마치고 목사는 교회 문간에서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심술궂게 생긴 영감님이 목사에게 말했다. “설교를 원고 보고 읽으면 어떡해? 그리고 읽는 것도 시원치 않고. 내용도 형편없었어!" 신임 목사는 너무나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온 친절하게 생긴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목사에게 말을 했습니다. “아, 그 영감 말 듣지 마세요. 그 영감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옮기는 것 뿐이예요.“

여러분, 낙심이 무섭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무리 폭포수 같이 부어져도 전혀 느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낙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폭포수같은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나는 아니야!’하는 그 사람에게도 폭포수 같은 은혜를 부으십니다. 그런데 낙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면 ‘나는 모르겠어. 하나님이 나에게 아주 조그마한 은혜라도 주시면 좋겠어.’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 낙심입니다. 그런 뜻에서 지금 낙심에 의하여 마음이 무너지신 분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제자들에게 그보다 놀라운 일이 어디 있겠으며 그 보다 더 흥분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실을 아고 제자들은 오히려 낙심에 빠져 있음을 봅니다. 두 번이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결론은 다시 어부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왜 이럴까요? 어째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제자들은 더 낙심한 것입니까?  

어떤 분이 미국에서 유학할 때 선배 한 사람과 한 방을 썼었는데, 그 분의 성격이 유별나서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답니다. 후배라 무엇이라 말할 수도 없어서 참고 1년을 살았지만, 결국 다른 사람과 살겠다고 방을 바꾸어 달라고 했답니다. 그 후 이 분이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게 되어 한 연구 단체에 지원을 하게 되었는데, 까무라치게 놀란 것은 면접관이 바로 자기가 그토록 싫어서 방을 바꾸어 달라고 했던 그 선배였답니다. 얼마나 낙담이 되었는지 몰랐답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 심정이 꼭 그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 우리는 끝났다.’ 하는 마음이 들었고, 결국 디베랴 바다로 돌아간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제자들의 마음은 더 무너지더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제자로 인정해 주실까? 말도 안돼. 우리가 알아서 피해야지.’ 그런 마음이 들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직접 만나고도 제자들의 마음은 더 비참해져서 스스로가 알아서 비켜드리고 다른 사람을 불러다가 예수님의 제자 삼으시고 주님이 하실 일을 하시도록 자기들은 알아서 비켜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고기 잡이 하러 돌아갔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혹 낙심의 영이 역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잃어버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복을 달라고 구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를 기억이나 하실까? 내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어주실 리가 없어. 내가 그동안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렸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살았던 적이 얼마나 많으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쓰시겠어?’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신앙적인 좌절이 오는 것은 절망인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어려워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반드시 나에게 역사한다는 것이 믿어지면 어려움은 어려움이 아니지만, 하나님도 나를 버리셨을 거야. 기도해도 이제는 소용이 없어. 이런 생각이 들 때는 끝나는 것입니다. 이런 낙심이 찾아올 때 꼭 기억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 앞에 설 면목이 없어서 축복이 믿어지지도 않고 기도할 용기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죄를 짓고 실패하고 낙심스런 일을 만나도 판단은 바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고, 마귀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가 다시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가 아주 무너져 버리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던 우리가 어떤 실패 속에 있던 하나님의 계획은 다시 우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절대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고 낙심하게 될 것에 대하여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베드로와 제자들의 낙심 뒤에는 마귀가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아주 주저 앉히려고 발광을 한 것입니다.

낙심에 빠지면 아무 것도 안 들리고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마귀가 하는 참소만 들립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들으면서도 ‘나는 아니야!’ ‘나는 용서받을 수 없어. 하나님은 나를 떠나셨어!’ 하는 마음 밖에 들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낙심에 빠졌기에 보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와 은혜와 사랑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한 마디도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평안을 주노라” 하시면서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다 용서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용서하고 다시 세우실 뜻이 아니라면 제자들을 만나실 이유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한이 있으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면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실 리가 있겠습니까?그러면 베드로와 제자들이 ‘주님이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구나.’ 깨달을만도 한데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안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이 들리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더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막아 죽이는 로마 병정들을 향하여도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고 기도까지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베드로가 어떤 시험을 당할 지도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 시험에서 다시 일어나기를 기도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낙심에 빠지고 나면 세상 없는 말씀을 주셔도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믿어지지도 않는 것이 기가 막힌 것입니다.

낙심은 믿음을 빼앗아갑니다. 한 쪽만 보게 하고 한 쪽만 듣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식대로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에 대하여 실망하셨을 거야. 버렸을 거야. 나같은 자가 무슨 관심이겠어?’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생각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기본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그렇게 많은 말씀을 직접 듣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이 기본적인 믿음 하나 제대로 가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고는 ‘나 같은 자는 스스로 알아서 물러가야 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리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지만 낙심스런 순간이 닥쳐봐야 우리 믿음이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때 믿어지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주님을 나를 버리지 않으셨고 하나님은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수렁에 빠졌어도, 사람들이 다 나를 손가락질하는 자리에 있어도 그것이 믿어집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 형편에서도 주님의 사랑과 용서, 우리를 향해 복주시려는 계획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낙심이 죄입니다. 너무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감사할 제목도 있는데, 스스로 포기하고 낙심하고 무너진 경우를 보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꼭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여전히 사랑하시고 능히 일으키실 수 있는데, 우리가 낙심하여 “나는 안돼. 나는 끝났어.” 하고 있으면 죄에요 아니에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낙심은 무서운 죄입니다. 수많은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낙심하면 자녀들은 절망인 것입니다. 남편이 낙심하면 아내가 어떻게 삽니까? 아내가 낙심하면 남편은 무슨 힘으로 삽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심정은 그보다 더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든지 다시 일으키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려내시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도 우리가 낙심해버리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이제 끝났어! 기도할 힘도 없어! 믿어지지 않아!“ 우리가 이러고 있으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어떻게 하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가 낙심에 빠지면 주님도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하나님 심정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낙심이 있으면 열심히’ 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열심이 없어서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디베랴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을 세 번째 찾아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은 얼마나 무너지셨을까요? 두 번씩이나 제자들을 만나주셨으면 이제는 확신을 가질만도 하지 않습니까? 다시 일어날만도 하지 않습니까? 두 번이나 만나서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말씀하셨는데도, 다시 고기 잡이하러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심정은 정말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차라리 포기해 버리시고 될만한 사람들을 붙들고 일하시지.’ 이런 생각도 들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도 말씀해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정말 처절하게 낙심에 무너져서 고기 잡으러 갔지만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순종한 베드로는 큰 고기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그 때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 보았습니다. “주님이시다!” 베드로는 즉시 예수님께 달려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숯불을 피워놓고 떡과 고기를 구워 제자들에게 먹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밤새 고생하는 것이 안스러워 많은 고기 떼를 몰아 주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낙심을 이기고 다시 일어설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보다 더 큰 용서의 증거가 어디 있습니까? ‘정말 용서해 주시는 거구나! 예수님께서 다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구나! 다시 제자로 여겨주시는구나!’

수영 강사인 어떤 자매가 어린이들에게 물 위에 뜨는 것을 가르칠 때 경험한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아이들을 밑바닥에 발이 닿지 않을 만큼 충분히 깊은 물 속에 데려가서, 물 위에 등을 대고 누워보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강사인 자기에게 매달리고 어떤 아이는 할퀴고 머리카락을 웅켜잡고 무엇이든지 붙잡으려고 발버등을 친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결국 물 위에 누울 수 있게 되고, 물이 그들을 오히려 지탱해 준다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 그들의 얼굴에 피어나던 놀라움과 미소는 참으로 보기 좋답니다. 일단 물 위에 뜰 수 있게 되면 그 다음 과정부터는 순조롭게 잘 치러나간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게 되는 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이란 죽을 것 같은 낙심 속에서도 예수님만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오신 주님은 낙심 중에 있는 우리에게도 다가 오십니다. 어떤 낙심스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은혜, 성령의 동행하심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갖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믿음의 눈을 뜨는 것입니다.

보스턴의 한 보호소에 앤(Ann)이란 소녀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죽었고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아빠로 인한 마음의 상처에다 보호소에 함께 온 동생마저 죽자 앤은 충격으로 미쳤고 실명까지 했습니다. 앤은 수시로 자살을 시도하고 괴성을 질렀습니다. 결국 앤은 회복 불능 판정을 받고 정신병동 지하 독방에 수용되었습니다. 모두 치료를 포기했을 때 노(老)간호사인 로라(Laura)가 앤을 돌보겠다고 자청했습니다. 로라는 날마다 과자를 들고 가서 책을 읽어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한결같이 사랑을 쏟았지만 앤은 담벼락처럼 아무 말도 없었고, 앤을 위해 가져다 준 특별한 음식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앤은 그 간호사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2년 뒤 앤은 정상 판정을 받아 파킨스 시각장애아 학교에 입학했고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심으로 밝은 웃음을 찾았습니다. 그 후 로라가 죽는 시련도 겪었지만 앤은 로라가 남겨준 희망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으로 시련을 이겨내고 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졸업했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에도 성공했습니다.   
  
수술 후 어느 날, 앤은 신문기사를 봤습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돌볼 사람 구함!" 앤은 그 아이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사람들은 못 가르친다고 했지만 앤은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요."    
  
결국 사랑으로 그 아이를 20세기 최대 기적의 주인공으로 키워냈습니다.  
헬렌켈러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으나 그녀의 스승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를 안고 있는 헬렌켈러를 전 세계가 놀라게 한 인물로 만든 사람이 바로앤설리반 (ANN SULLIVAN)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로라가 앤설리반에게 한 것처럼, 앤설리반이 헬렌켈러에게 한 것처럼 주님은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의 눈을 뜰 때까지 우리를 다시 만져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 인도하심을 믿고 따르는 기적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낙망과 두려움과 염려하며 평생을 살 것인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 살려면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도 처음에는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오른 편에 그물을 던져보라”는 말씀만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도 모르게 그 음성에 순종하여 그물을 오른 편에 던졌을 때 큰 고기만 153마리를 잡았습니다. 우리에게도 똑같이 예수님은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 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망에 좌절에 매이지 않고 예수님을 경험할 때,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막연하게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기도하라! 신뢰하라. 감사하라. 찬송하라. 성도들과 함께 연합하라!’ 그렇다면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순간부터 여러분의 인생에는 회복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리차드범브란트목사는 1948년 루마니아 비밀 경찰에 의하여 투옥되어, 20년 가까이를 옥에서 살면서 신앙을 버리게 하려는 공산 당국에 의하여 엄청난 고문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가 옥에 갇힌 지 수년 동안 일체 면회조차 없다가 한 번은 감옥에서 방송을 하기를 가족 면회를 허락하니 집에다가 엽서를 보내라는 것입니다. 면회하는 날 면도를 하고 새 내복을 입고 마음이 들떴는데, 다른 사람들은 다 면회를 나가는데, 범브란트 목사님에게만 아무도 면회를 안 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엽서가 아내의 손에 들어가지도 못했음을 알 수 없는 이 분이 혼자 남아있는데, 방송이 나오기를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는데 나중에는 흐느끼며 울었답니다. 몇 년 동안 아내와 아이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날은 만날 수 있으리라.’ 어린 아이처럼 들떴었는데, 아무도 찾으러 오지 않다니! "그들은 더 이상 네게 관심이 없다." 나중에는 몸부림을 쳤습니다. 
  
다음 날 동료들이 돌아 왔습니다. 아내를 만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비웃습니다. 도무지 들을 수 없는 더러운 말을 합니다. 그 때 방송이 다시 나옵니다. "하나님은 죽었다. 하나님은 안 계신다." 그런데 자신이 그 말이 믿어지기 시작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어떻게 믿을 지켰는데, 하나님 이게 뭡니까?' 그런데 그 순간 성경에 나오는 배교의 때가 이를 것이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셨던 때 여인들을 생각했습니다. 그 여인들도 나처럼 이렇게 절망스러웠겠지! 그러나 그들은 울면서도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않았다!’ 그 시간 범브란트 목사님은 자신을 하나님께 다 드렸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란과 혼돈 속에서 자신의 모든 판단까지 하나님께 다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는 그냥 울 것입니다. 무덤 곁에서 울던 여인들처럼! 나는 그냥 울 것 입니다. 그는 결국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루마니아에 다시 기독교 부흥의 때가 왔습니다. 

아무리 낙심이 되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면 깜짝 놀라는 은혜의 회복을 얻게 됩니다.  

저는 그동안 “난 안돼요! 난 자격이 없어요! 난 못해요!” 하나님께 수도 없이 부르짖었습니다. 습관적인 죄로 무너졌을 때, 설교 후 좌절감이 들 때, 교인들이 저로 인하여 상처받았다는 이들을 볼 때 “하나님, 보셨잖아요. 저는 이런 자예요. 제가 못한다고 했잖아요.” 저는 하나님께서 큰 능력을 주시지 않아서 제가 제대로 목회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모세가 호렙 산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 사명을 받았을 때, “저는 못해요. 저는 부족해요. 다른 사람을 보내세요.” 했던 그 모습이 바로 제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부족함만 계속 보았습니다. 그 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베푼 것들을 보아라!’ 저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제게 있는 것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끝도 없이 나왔습니다. 특히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님이 오신 것만 해도 충분하였습니다. 저게 없는 것이 1% 라면 제게 주신 것은 99% 였습니다. 저는 받은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저는 낙심될 때마다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다시 만져 주셨습니다. 

지난 주간 부모를 위한 젊은이 교회 특별 새벽기도 때, 한 자매가 고백하면서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를 말했습니다. 엄마는 98점을 받아도 모자란 2점에 대하여 책망하였다고 했습니다. 그 때마다 가슴이 오그라지는 고통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식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항상 없는 것 그 몇 가지만 붙들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보는 눈만 뜨이고 나면 얼마나 주신 것이 많은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왜 낙심하십니까? 베드로보다 더 실패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큰 실패자 베드로도 치유하여 주의 큰 사도로 쓰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부활절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부활절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낙심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꾸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낙심케 하는 영아 떠나가라! 나는 주의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십자가에 호소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크고 놀라운 것임을 믿습니다.
“주여, 다시 한번 만져주소서. 말씀하소서. 귀 기울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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