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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마 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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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마 8:5~13)


주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며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주님께서 이처럼 한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칭찬하신 일은 없었습니다. 10절에서는 “예수께서 들으시고 기이히 여겨”라 말씀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주님을 놀라게 한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주님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까? 사고를 쳐서 그렇거나, 주님 앞에 고집을 부려서 말고, 백부장과 같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까? 백부장의 믿음에 주님이 완전히 감동을 먹었습니다.

감동이라는 것은 의례 그럴 것이라는 상식 적인 판단을 벗어날 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부부나 부모 자식의 관계가 그런 것 같습니다. 가끔 가다 한 번은 서로에게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아 이 남자가 이런 줄 몰랐어.’, ‘아 이 여자에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하고 감동을 해야 그 사랑이 깊어집니다. 상대방을 다시 보게 하고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게 만듭니다. 부부도 서로 존경을 하는 사랑이 되어야 행복합니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한 남편의 믿음직한 모습 때문에 평생을 사는 것 아닙니까? 맨 날 사고만 쳐서 놀라게 하는 남편이라면 어디 같이 데리고 살 수 있겠습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아내의 위로의 한마디나 깊은 서랍 속에서, 오래 동안 틈틈이 모아둔 통장 하나를 꺼내 들 때 남편이 감동을 먹는 것 아닙니까? 이제 올 한 해도 몇개월 남지 않았습니다. 부부간에 감동적인 사건을 하나씩 만드는 한 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백부장은 어떻게 예수님을 감동시켰는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백부장의 모습을 보면 그가 예수님을 감동케 한 것이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인격과 믿음을 보며 우리의 인격과 믿음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첫째, 백부장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은 부하 100명을 둔 중대장급의 장교입니다. 아마 그는 가버나움 지역 치안 유지를 위해 파송된 로마 장교로 이방인임에 분명합니다. 로마 군단은 백부장의 위치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실제 전투력은 이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죽음을 무릎 쓰고 앞장서서 용감하게 싸워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이 그리 큰 도시가 아니었던 것을 볼 때 백부장은 이 지역 사회에서 꽤나 권세 있는 자리라 할 것입니다. 로마군단에서 존경받는 백부장이 식민지의 점령자로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권세가 대단할 것입니다. 우리 일제 시대를 생각해보십시오. 칼을 찬 일본 순사가 얼마나 무서웠습니까? 아이들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했던 것이 일본순사입니다. 상대는 식민지 백성이고 자신은 권세를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거들먹거리겠습니까? 우리들도 그렇잖아요. 조그만 권세만 쥐어주면 그것 가지고 얼마나 교만합니까? 물질의 권세가 주어지면 그것이 무슨 대단한 벼슬이나 되는 냥 수준을 따지고 무시를 합니다. 교회에서 조그만 직책이 주어지고 동네에서 반장 완장이라도 차게 되면 얼마나 목에 힘이 들어갑니까?

그러나 이 백부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7장 1절 이하에도 동일한 백부장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는 유대인 장로들이 백부장을 대신하여 예수님께 간청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들은 간청하면서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눅7:5)고 칭찬합니다. 백부장은 자기의 권세로 위력을 부리지 않고 오히려 그 지역 사람들을 위해 겸손히 수고하였습니다. 자기 돈과 시간을 내어 유대인들을 위한 회당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 올 때의 태도를 보십시오. 예수님을 “주님” 이라 부르며 겸손하게 간청을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야 당연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인정을 하지만 예수님이 막 공생애를 시작하던 당시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아서 주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활동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상대가 아무리 현인이요 능력을 베푸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까무잡잡한 식민지 백성의 한 사람인데 “주여”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진리되신 예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습니다. 주님께서 자기 집에 가시려 하니까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며 사양합니다. 존귀한 주님이 누추한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것도 황송하여 감당 못한다는 태도입니다. 자고로 겸손한 사람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사람들의 인정을 받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합니다. 물은 낮을 곳을 향하여 흘러 흘러갑니다. 그러다 가장 낮은 곳에 이르러 바다를 이룹니다. 세상에서 바다보다 크고 힘이 있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겸손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진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수용성을 말합니다.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하고 완고하면 그 안으로 어떻게 예수님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백부장이 겸손히 그 마음을 비웠을 때 은혜가 그 속에 충만히 임한 것입니다.


둘째, 백부장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6절의 백부장의 말을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지극한 사랑의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백부장은 자기 종의 고통을 마치 자기의 아픔이나 된 것처럼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시 종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하인은 주인이 사고팔 수 있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바로’라는 학자가 농사 기구를 세 가지로 구분했는데 첫째는 소리 없는 도구(농기계)요 둘째는 말 못하는 도구(소 말)요, 셋째는 말하는 도구(종)였습니다. 종은 말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종을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대우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많은 주인이라도 자기 하인이 아프다면 형식적으로 의원에게 몇 번 보일 뿐이지 예수라는 아직 검증되지 않은 사람에게 주인이 친히 나아와 이렇게까지 머리를 조아리겠습니까? 

사랑이 기적을 만듭니다. 한 사람을 향한 극진한 사랑이 백부장을 예수님과 만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소중합니다. 그 한 사람을 정성껏 대하십시오. 회사에서 부하 직원들을 단순히 노동력을 착취하는 대상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사랑의 대상으로 알고 그들을 위해 주십시오. 상사를 월급이나 주는 존재로 보지 말고 그를 한 사람으로서 사랑하십시오. 사랑이 서로의 마음을 열게 만들고 그러면 반드시 그 대가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상사는 부하의 앞길을 열어줄 것이요, 부하 직원은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중국의 고사에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오기(吳起)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가 중산국을 공격할 때, 한 병사가 심하게 다쳐 상처가 진무르고 고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오기 장군은 그 병사의 고름을 자신의 입으로 빨아주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을 타고 그 어머니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의아하서 그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장군이 당신 아들을 그처럼 아끼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통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어머니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오기 장군이 예전에도 그 아이 애비의 고름을 빨아 주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 은혜를 잊지 못하고 장군을 위해 용감히 앞장서서 싸우다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장군이 다시 내 아이의 고름을 빨아 주었다고 하니 이 아이 역시 생명을 걸고 장군을 위해 싸우다 죽고 말 것 아닙니까?” 

사랑을 보여주면 그 열배, 백배로 보답하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인색하여 자기 계산이 너무 빠르고,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 탐합니다. 백부장은 지극한 사랑의 사람이었고 이 사랑이 예수님을 감동시키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한 것은 백부장의 믿음이었지만 믿음 이전에 백부장은 이처럼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믿음과 인격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인격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둘 다면 좋겠지요. 그런데 만약 여러분 주위에 믿음은 좋은데 인격이 좋지 않은 사람하고, 믿음은 별로인데 인격이 훌륭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를 친구로 두고 싶습니까? 저는 단연코 믿음은 별로이지만 인격이 훌륭한 사람을 친구로 삼고 싶습니다. 믿음이야 시간이 지나가면 생길 수 있지만 인격이라는 것은 좀처럼 변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격이 좋지 못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니면 나중에 또 그 인격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만큼 우리 인격을 수양하고 가꾸는 일이 중요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격을 가지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인격의 좋고 나쁨은 하나님 보시기에 도토리 키재기일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생활하기에는 인격이 훌륭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편하고 좋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에 장로와 집사를 선택하는 기준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그의 인격입니다. 생활에 절제가 있고 가정에 모범이 되는가? 사람들로부터 선한 증거를 얻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봅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성경의 원리를 벗어나 장로를 선출할 때 겉으로 드러난 믿음, 그것은 주로 헌금이나 교회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나는데, 그것만 보고 그 인격이나 능력은 잘 보지 않기 때문에 이후에 많은 문제들을 일으키고 맙니다. 백부장처첨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백부장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백부장의 뛰어난 점은 그가 이처럼 인격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은 9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군인들이 그렇지요. 군인들은 명령에 절대복종합니다. 심지어 최전선에서 돌격 명령이 떨어지면 죽음을 무릎 쓰고 공격하는 것이 군인정신입니다. 군대에서는 명령불복종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입니다. 상관의 명령 한 마디가 이처럼 중한 것입니다. 그러니 백부장은 주님이 집에 오실 것도 없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8) 하고 요청합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는 “다만 명령만 내리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아무리 중풍병이라도 순종하여 떠날 수밖에 없다는 절대적인 확신입니다. 거리가 멀고 가깝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소리가 크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이라면 그대로 집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백부장의 믿음이었고, 이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부장이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를 때 그는 형식적인 호칭으로 “주님”이라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주님이라 할 때는 첫째 나는 당신의 어떤 명령에도 따르겠습니다는 순종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둘째, 당신은 온 땅과 만물의 주인이시기에 당신의 어떤 명령도 그대로 성취된다는 주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나 불순종합니까? 성경이란 것은 주님의 명령과 약속으로 가득한 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말씀을 믿지 못합니다. 백부장은 오실 것도 없이 다만 말씀으로만 하십시오라고 하는데 우리는 “말씀으로는 부족합니다, 직접 오십시오, 직접 보여주십시오.”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되 군인정신으로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옛날 군대에서 군인정신이 무어냐고 물으면 농담 식으로 “제정신이 아니다.” “무대뽀다.” 라고 답을 했습니다. 군인 정신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무대뽀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자기 판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군인 정신은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장되십니다. 우리 대장되신 예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제가 가끔 드는 성 프랜시스의 예화입니다. 성 프랜시스가 수도원에서 농사 일을 하고 있었는데 두 명의 젊은이가 수도사가 되겠다고 찾아왔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마침 배추 모종을 심고 있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그 두 젊은이들에게 배추 모종을 주며 “뿌리는 하늘로 향하게 하고 그 잎은 땅에 묻히도록 심으라.”고 명령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명령하고는 그에 대한 질문도 받지 않고 성 프랜시스 사라졌습니다. 이 명령을 받은 두 젊은이는 처음에는 순종하여 성 프랜시스의 명령대로 배추를 심었습니다. 그러다 그 중 한 젊은이는 도무지 그런 불합리한 명령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 뿌리를 하늘로 향하도록 심는 경우가 어디 있나 싶어 정상적으로 뿌리가 땅을 향하도록 심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젊은이는 프랜시스의 명령대로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계속 해서 심었습니다.

누가 성 프랜시스의 수도자로 받아 들여졌겠습니까? 한참 후에 돌아온 성 프랜시스는 자기 명령대로 뿌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심은 젊은이를 수도사로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젊은이는 돌려보냈습니다. 프랜시스는 순종하는 마음을 테스트한 것입니다. 유혹이 많은 수도 생활을 하려면 생각이 복잡하면 안 됩니다. 스승의 말에 단순히 순종할 줄 알아야 유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떨 때는 하나님의 명령이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모순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라도 우리 판단을 접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때 우리 문제가 풀립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십시오. 사실 인생의 문제는 생각이 모자라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우리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그래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칙을 보더라도 성공하는 사람들은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단순하게 믿고 따르다 보면 길이 보이는 법입니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하는 백부장의 믿음을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세상을 만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 기사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그대로 빛이 있고, 궁창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뉘어라 하면 그대로 나뉘었고, 식물이나 새나 동물이 있으라 하면 그대로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처럼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잘 듣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말씀에 가장 순종하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렇게 살지 말라 하여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회개하라고 하여도 듣지 않습니다. 이 성경이란 것은 말 안 듣는 인간들을 향하여 제발 내 말 좀 들으라는 하나님의 답답한 호소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도 부족하여 하나님 우리에게 직접 음성으로 또 말씀해 주십시오. 하나님 직접 보여주십시오 하고 떼를 씁니다. 백부장은 우리 집에 오시는 것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예수님을 억지로 우리 집까지 끌어들이려 합니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주님은 백부장을 향하여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13)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믿었던 백부장에게는 그 하인이 그 즉시로 낫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네 믿은 대로’가 진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우리 인생은 기적으로 가득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못하거나, 또 다른 증거를 요구한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런 능력도 보여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결과는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퍽퍽하고 힘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더라도 자기가 좋은 부분만 취해서 믿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나라와 그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면 그대로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21:22)는 말씀을 믿고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백부장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백부장의 하인을 말씀으로 고친 이 이야기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주권자로서의 권능입니까? 아니면 백부장의 믿음입니까? 이 이야기의 초점은 백부장의 믿음에 있습니다. 이는 11절과 12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백부장의 믿음과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브라함과 함께 소속해 있는 이스라엘 나라의 본 자손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주님을 믿지 않던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면밀히 살펴야 할 것은 마태복음이 기록된 시점입니다. 학자들은 마태복음 80년대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50년이 넘은 때입니다. 물론 전승이라는 형태와 직접 본 증언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사건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 순전히 예수님 시대의 상화들만 문제가 되었겠냐는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며 마태교회의 당시 상황들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라의 본 자손”은 단순히 믿지 않는 유대인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에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한다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찍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내가 교회에 직분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동적으로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백부장에게 주어졌던 칭찬처럼 “이 만한 믿음”의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만한 믿음”을 가지시길 원하십니다. 평범한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칭찬하신 “이 만한 믿음”에 도전하십시오. 이 믿음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철저히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주님의 뜻에 따르겠다는 순종의 믿음입니다.

교회가 크건 작건, 내가 큰일을 하건 작은 일을 하건, 내가 높은 자리에 있건 낮은 자리에 있건, 내가 부유하건 가난하건,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만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것은 백부장과 같은 “이만한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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