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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의 하나님 (고후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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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의 하나님 (고후 1:3~6)


오늘은 추석이면서 주일입니다. 예베에 참여한 여러분들에게 영광중에 함께하시는 주의 은혜가 넘치기를 춥복합니다. 

최근 탤렌트 안재환 씨의 죽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그는 서울대학 공예학과를 졸업하고 mbc 공채 25기로 입사하여 탤런트 겸 영화배우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결혼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어야 하는 시기에 아무도 모르게 혼자 차안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생을 마감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사업에 실패하여 빚에 쪼들렸다는 사실 외에 그 가족들조차도 자살의 동기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살을 결심하기 까지 그와 고민을 함께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짐을 홀로 지고 결국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나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혼자 그 짐을 짊어지다가 감당할 수 없으니까 결국 자기 생을 포기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유서를 남겼지만 사랑하는 아내에게 무거운 짐을 안지우려고 혼자 고민하고 혼자 괴로워하다가 결국 더욱 크나큰 슬픔의 짐을 지우게 된 셈이 된 것 입니다. 

그가 기독교인이었다는 데 더 큰 충격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신앙인이 자살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자기 생을 포기하는 그런 방법 말고 얼마든지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기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가운데 생의 가장 큰 어려운 고비를 맞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그 가운데서 중대한 결정을 하기 위해 고민할 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영광을 고려했습니까? 
아무튼 한 사람이 혼자 죽음의 길을 택하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위로와 따뜻한 격려가 있었더라면 자살까지 가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문제는 세상에는 참된 위로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위로보다는 비난과 욕설과 비판이 난무합니다. 정말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실수하고 잘못하고 상처하고 실패하고 넘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이 위로 받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고후 1:3절에 보면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시오 위로의 하나님” 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비의 아버지심으로 자비가 한량없이 크셔서 환난 받는 성도들을 능히 위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과 역속에서도 때에 따라 적절하게 위로받을 수만 있다면 결코 지치지 않습니다.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위로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복입니다. 

1. 어떻게 위로해 주십니까?

1) 함께 하심으로 위로하십니다. 

어떤 글에 비 맞으면 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것도 위로가 되지만 때로는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될 때가 있다는 말이있습니다. 주님은 볼지어다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게 하신다는 이 말 보다 위로가 되는 말이 또 어디 있을 까요?
믿음안에서 함께하심의 위로가 여러분에게도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2) 알아주심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오래 전에 미국에서 열차 충돌 사고가 크게 발생한 일이 있었습니다. 두개의 열차가 서로 충돌하여 수많은 인명 피해와 재상의 손실이 있었는데 한 열차의 기관사는 사고 현장에서 사망했고 다른 열차의 기관사는 목숨을 건져 살아 남게 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모든 책임이 살아남은 기관사에 있다는 쪽으로 결론 맺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살아남은 기관사는 사고에 대한 가책이 있는데다가 회사에서 행하는 수차에 엄격한 조사에 임하는 동안에 정신이 약간 이상해지거나 멍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그의 말에 조리가 없게 되었고 이상한 말을 가끔 중얼거리는 때도 있었습니다. 
조사가 매듭지어져 갈 무렵 그 회사의 사장이 기관사를 만나보기 위해 사장실로 불렀습니다. 
기관사는 걱정과 두려움이 떨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기관사는 사장실에 들어가서 고개도 들지 못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서 있었습니다. 

그 때‘에터베리(Mr.Attedury) 사장이 책상에서 일어나 기관사 앞으로 걸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모르고 서있는 기관사의 어깨 위에다 자기의 팔을 따뜻하게 들어 올려놓으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 우리는 아주 운이 나빠서 이런 사고를 만난 것이요?"
이 말을 듣자 기관사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장과 기관사는, 두 사람은 그렇게 서있는 채로 함께 흐느껴 울었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다음 사장이 말했습니다. 
“당신은 단순히 나의 회사의 고용인이 아닌 우리 회사의 한 가족이요. 나의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 당하는 어려움이나 슬픔은 곧 나의 어려움이요, 나의 슬픔인 것이요."

대 회사의 사장이 기관사의 어깨를 잡고 함께 흘린 눈물은 자칫 큰 타격을 받아 평생의 비운에 떨어질 뻔했던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치료해 줄 수 있었습니다. 수고를 알아주고 고생을 알아주는 것이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위로를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3) 배려해 주십으로 위로해 주십니다. 

김순권 목사님이 쓰신 글에 다음과 같은 간증이 있습니다.
그가 미국 컬럼비아 선교 대학원에 유학할 때 영어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공부에 크게 어려움을 격으며 때로 낙심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마다 그의 한 방 친구였던 ‘레이턴’이 “미국 사람인 나도 철학이나 신학을 공부하는 게 어려운데 외국인이야 오죽하겠느냐” 라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침대위에 40점 짜리 낙제 점수를 받은 ‘레이턴’의 시험지가 침대 위에 던져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때 “미국의 유명한 조지아대 교육학과 출신 미국인도 저렇게 고생하는데 나에게 이 정도 힘든 것이야 당연하다” 는 생각을 하면서 실망하지 않고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레이턴’이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자기의 낙제 점수 시험지를 일부러 보이도록 침대위에다 올려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을 그렇게 배려해주던 그 친구의 얼굴이 30여년이 지난 오늘 까지도 그립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배려가 위로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그저 남의 흠을 알기만 하면 당장에 거기에다 비난을 퍼부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또 신자라고 하지만 다른 형제자매들의 어떤 결점을 보거나 듣기만 하면 입이 근질거려 참지 못하고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비틀어 버리거나 퍼부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의 한없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피차에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서로 긍휼히 여기고 남의 사정을 이해하도록 하려, 우리의 주변에는 아름다운 사랑이 꽃이 피어나고 생명의 향기가 그윽이 퍼지게 합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위로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참아주고 기다려 주는 것도 위로하는 것입니다. 어려움 당하는 사람의 입장을 배려할 때 그에게는 커다란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2. 언제 위로해 주십니까?

① 환난 당할 때 위로해 주십니다. 

핍박이나 환난이 있을 때 하나님의 위로도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본문 3절에서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환난을 당했을 때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가 환난과 핍박을 만나서 힘들 때 그 때 모른척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② 기도할 때 위로해주십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기도하지 않으면 위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기도를 통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도는 마음의 통하는 것입니다. 삼상 1:15절에 보면 사무엘의 모친 한나는 자식이 없어서 성소에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자신의 심정을 통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간절하게 울면서 통성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심정을 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한나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아들을 주심으로 위로해 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위로받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 142:1-2)

마음이 슬프고 원통할 때 기도하십시오. 힘들고 지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될 때 그때도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위로만 받으면 마음이 평안이 임하고 용기가 생깁니다. 

③ 찬송할 때 위로해주십니다. 

찬송은 흔히 곡조 있는 기도라고 합니다. 곡조를 붙힌 기도이기에 사람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과 영적으로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19장 2-3절을 불러 봅시다. 
환난 중의 성도들을 구원하여 주셨네, 노하심은 더디하고 인자하심 넘치니, 내 영혼아 찬양하라 은혜로신 하나님 
우리 약함 아시는 주 항상 지켜 주시고 인자하신 그 손으로 보호하여 주시니 내 영혼아 찬양하라 자비하신 하나님
노하심은 더디하고 인자하심 넘치고 우리 약함을 아시며 항상 그 손으로 보호하여 주신다고 고백하는 이런 찬양을 부를때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위로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317장을 불러봅시다.

1.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2.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

3.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아무리 죄가 크고 무거워도 날마다 문열어놓고 나간 자식 기다리는 부모처럼 기다리시는 하나님, 때로는 때리기도 하시지만 곧 다시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이런 찬송을 부를 때 완악했던 우리의 마음을 성령으로 녹이시어 위로와 격려를 주시는 것입니다. 


3.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성도들을 위로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게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사도는 고후 1:4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를 위로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위로자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입니다. 

조웨트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는 것은 우리를 위로받는 자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는 자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받은 사람이 남을 사랑할 줄알 듯이 위로 받은 사람은 남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 행복합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없는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비록 삶이 힘들고 고단해도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않습니다. 내 맘을 알아주시고 사정을 속사정을 헤아려주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는 사람은 어떤 고난이나 역경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고난과 역경을 당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는 역할을 합니다. 진정한 주님의 위로가 임하여 위로받고 위로하는 신령한 복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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