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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명분보다 강청하는 기도 (눅 1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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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보다 강청하는 기도 (눅 11:5~13)


인터넷에서 펴온 글입니다.
고향에 가면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이 동네 버스 정류장입니다.
고향 마을에 버스 정류장이 두 군데가 있는데 
윗마을 버스 정류장은 버스 정류장이 아니라 
       온갖 낙서와 광고지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집에 쓰던 헌 가구란 가구는 다 내버리는 쓰레기장같습니다.
       거기다가 거미줄이 가득하고 누군가 실례를 한 흔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정류장 안에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밖에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교회가 있는 아랫마을 버스 정류장은 
       아이들이 상모를 돌리며 춤을 추고 있는 
       밝은 그림이 산뜻하게 단장되어 있고
       정류장 안에도 깨끗한 의자가 놓여 있어 
       사람들이 편안하게 앉아서 버스를 기다립니다.
알고 봤더니 
미술학도들로 구성된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동아리에서 그려준 것입니다.
이 동아리는 허름한 정류장을 리모델링해 주는 동아리인데
윗마을 어른들이 젊은이들이 와서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이상한 그림을 그릴까바 허락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아랫마을 정류장은 동네 어른들이 그 사실을 알고는 
      요청을 해서 정류장을 말끔히 단장하여 예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것이요! 하는데도 
       교인들이 구하지 아니하고 신앙생활을 너덜하게 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기도가 중심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기도의 장애물을 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장애물이 무엇인가? 하면 기도해도 소용없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집어넣어 주는 생각입니다.

오늘 기도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결론이 무엇인가? 하면 
8절에 그 요구대로 주리라입니다. 
      구역 성경에는 소용대로 주리라 합니다.
이 말은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기도하면 소용대로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소용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요구대로 주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우리의 기도가 응답 받기 위해

       우리의 기도의 자세에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1. 응답 받는 기도에 있어서 중요한 자세가 무엇입니까?(8절)

8절 [ 비롯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 

기도는 명분보다 강청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기도에 관한 교훈은
         기도는 명분보다 강청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보면 
하나님과의 명분만 과시하느라 기도하지 않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내가 목사 장로 권사 집사니깐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실거야, 
     라고 생각하면서 믿음이 있는 척 폼을 잡습니다만 
    사실은 그 명분이 나의 신앙을 대변해 준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착각하고 있는 직분자들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직분자가 될 때에는 그래도 기도합니다.
         그러나 되고 나면 기도 안 하는 것 있지요. 
         명분보다 중요한 것이 강청하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는 것이 중요하고
       하더라도 강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럼 나는 강청하는 기도가 어떤 기도라고 생각하십니까?


2. 나는 강청하는 기도가 어떤 기도라 생각하십니까?(5-8절)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한 가지 예화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밤 중에 친구가 찾아 왔는데 대접할 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음식을 꾸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불을 끄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친구니깐 깨워 음식을 달라고 해보자 하고 문을 두드렸습니다.
[ 친구야 밤중에 미안하지만, 떡 세 덩이만 좀 꾸어주라 ]
[ 야 자는데 제발 귀찮게 굴지마라 애들 깬다 내일 오너라 ]
[ 친구야 귀찮은 줄은 안다마는 떡 세 덩이만 꾸어주라 ]
[ 에이 귀찮아 죽겠다, 내가 친구 때문에 주는 것이 아니라        
       안주면 계속 귀찮게 할 것 같아 준다 ] 하고는 떡을 빌려 준 것같이

8절 [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고 합니다. 

그런데 개역 성경에는 강청이라 되어 있고 개역 개정에는 간청이라 되어 있습니다.
간청이라고 번역한 이유는 강청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간청이라고 한 것입니다.

강청이라고 하면 뻔뻔스러울 정도로 귀찮게 달라고 졸라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체면상은 구할 자격이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 붙들고 강청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주십니다. 

그러나 간청이라고 번역한 것은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뻔뻔스럽게 졸라대는 것 보다 
먼저 선행 되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강청의 오해의 소지를 벗어나고자 간청이라 한 것 같습니다.
강청은 억세게 떼를 쓴다는 느낌이 드는 단어지마는 간청은 애절하게 부탁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원뜻은 둘다 응답의 확신을 전제하는 기도행동입니다.
따라서 강청은 하나님을 귀찮게 할 정도로 떼를 써서 얻어내도록
             끈질기게 구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성 속에서 나타나는 행동표현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누가 막무가내로 떼쓰며 졸라될 수 있습니까?
     바로 자녀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도문 첫 구절이 2절에 아버지여, 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는 강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8절을 보세요.
친구됨을 가지고서는 받을 수 없지만, 강청함을 가지고서는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인데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세요.
친구가 된 그 정도의 관계를 가지고는 끝까지 요구하기 힘들다는 것이고,
주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끝까지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습니까? 
바로 자녀가 아버지에게 할 때입니다.
아무리 널려 있는 것이 떡과 고기일지라도 자녀가 아닌 이웃집 아이가 와서
문을 두드리고 달라고 한다 해서 
내 자녀처럼 날마다 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아이도 자기 부모도 아닌 사람에게 줄 때까지 칭얼거릴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아버지와 자식의 친권적인 가족 관계 안에서만 
이 약속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친권적인 믿음 갖고 간청하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얼마전에 세계적인 미국의 팝 가수 마돈나가
데이비드 라는 흑인 아이를 양자로 입양했습니다.
데이비드는 아프리카 동남부 이름도 없는 말라위라고 하는 
가난하고 조그만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나라는  1인당 GDP가 158달러로 한국의 100분의1 밖에 안 됩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낳자마자 사망했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양육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할 수없이 고아원에 맡겨졌는데, 
말라리아와 결핵과의 힘겨운 싸움을 하며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아이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까요? 

그런데 어느 날 세계적인 팝가수 마돈나가 이 아이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마돈나는 최근 미국 LA에 위치한 고급 아기용품 전문점 `Petit Tresor`에서 
입양한 아들에게 입힐 겨울옷을 무려 1만 달러(약 1000만원)어치나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마돈나는 데이비드의 입양할 때
우리 돈 3천만 원에 달하는 장난감을 사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데이비드라는 이 아이가 잘나서 선택받았겠습니까? 
몸은 병들었고 못생기고 할 줄 아는 것 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흑인 아이입니다. 
그러나 마돈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무엇이든지 갖고 싶으면 마돈나에게 애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 친권적인 믿음 가지고 간청해라 그러면 반드시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기도해야 할 것을 강조하시면서
9절에 세 번씩이나 같은 말을 다른 표현으로 강조하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3. 왜 주님은 본문에서 세 번씩이나 강조하시면서 기도하라고 하시며 
   예수님은 두 번 강조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절에 또 한번 거듭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9-10절)

왜 하나님이 이렇게 세 번씩이나 강조하시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예수님 이전 유대교에도 기도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도는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행위였습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면 
저들에게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기도에 대한 세 가지 확신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사람이 기도하면 그 기도는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왕관을 만들어 하나님의 머리에 얹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 기도는 인간의 죄악과 상관없이 
       천사가 깨끗하게 만들어 상달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 기도는 아무리 반복하여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기도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의 이런 기도의 전통을 더욱 강화시키신 것입니다. 
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비판하시면서 
       주님께서 친히 1-4절에 모범적인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기도는 명분보다 강청해야되 하시면서 9절에
“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아라, 찾아 낼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알아서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은,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마음 문을 열고 자신을 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척척 부어 주신다면,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께서 한번의 기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끈질기게 하는 기도를 기다리시는 것은, 
그 끈질긴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끈질긴 기도를 하게 하시므로 
         우리를 자기에게로 더 가까이 이끄실 뿐 아니라 
         우리로 더 강인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로 기도하게 하시는 까닭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 모든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이 점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깨달을 때 
       그 앞에 나아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우리의 속사람은 기도로 호흡을 합니다.

기도를 멈추는 순간 
그 생명의 호흡이 멈추어지기에 우리는 영적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힘이 내 속에 들어와 
      넘치는 신앙의 활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시137:7절에 [ 이스라엘아,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주님께만 인자하심이 있고, 속량하시는 큰 능력이 그에게만 있다 ] 고 합니다.

기도의 생활을 통하여 날마다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영적 건강을 회복하며, 
예수 믿는 나로 말미암아 살 맛나는 세상 만들어 가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리라`고 하신 것은,             
무엇인가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그 장애물을 없애 버려야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구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부족함을 뜻하는 것이며, 
‘찾아라`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음을 뜻하며,
‘문을 두드려라`는 것은 문이 닫혀 있음을 뜻합니다. 

직조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은 실이 엉키면 버튼을 눌러
    공장장을 불러 엉킨 실을 풀어달라고 요청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여공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고 공장장을 부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엉킨 실을 풀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실은 더 엉킬 뿐입니다.

혼자 진땀을 흘리다가 어쩔 수 없어 버튼을 눌러 공장장을 불렀습니다.
“ 공장장님 저, 실타래가 엉켜 아무리 풀어보려고 안 되는데요.”
그러니 공장장이 하는 말이
“ 직공으로서의 최선을 다하는 일은 공장장을 부르는 것이요.” 하더랍니다.
살다보면 실이 엉키는 것처럼 크고 작은 문제가 우리의 삶을 혼란케 만듭니다.
       장벽이 무너지고 길이 열리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삶의 문제가 복잡해 질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전능하신 거장의 손길 되시는 하나님을 부르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 내게 무엇이 부족합니까? 오늘 나는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오늘 나의 삶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습니까?
우리가 매일 기도해야 할 이유는 이런 장애물들을 청소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면 이런 장애물들이 놓일 시간이 없지만,
기도를 멈출 때 마귀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계속 장애물들을 쌓아 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다가 어쩌다가 기도하면 
우리 스스로 답답함을 느끼는 까닭은 
     바로 마귀의 장애물들이 잔뜩 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집안을 청소하듯이 기도로 청소를 하면 
      우리의 영의 세계가 깨끗하지만, 
청소를 게을리 하여 쓰레기가 잔뜩 쌓이는 것처럼 
기도를 게을리 할 때 우리의 영적 세계가 
       온갖 세상의 더러운 욕심들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문제가 계속 일어날 때에는 
여러분의 기도의 생활이 어떠한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매일매일 기도하시므로 여러분의 영적 생활을 깨끗이 청소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명령이나 약속을 재차 강조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절에 왜 또 한 번 거듭 말씀하십니까? 

[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 합니다.

이렇게 세 번씩이나 그리고 또 따블로 같은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희망의 약속이 깃들여 있습니다. 
구하면 받고, 찾으면 찾아지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인디안들은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
왜?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믿고 끝까지 기도하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면 
       거듭 거듭 응답해 주겠다고 약속을 해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야, 이 만큼 말해도 기도 안 하는데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하지 아니하시고
다시 비유를 들어 우리에게 실감이 나는 말씀을 하십니다.


4.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의 응답에 대해 들려주시는 비유가 무엇입니까?(11-13절)

11절 이하에서 
[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 달라 하는데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 
[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하십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생선과 뱀, 알과 전갈을 대비시켜서 말씀하십니다.
이 둘은 모양은 비슷합니다. 그러나 속성은 정 반대입니다.
전갈은 사막의 거미입니다. 전갈이 다리를 오무리면 새알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알인 줄 알고 건드렸다가는 쏘이게 되는데
       독성이 얼마나 강하지 전갈에 쏘이면 사람이 죽게 될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러한 극단적인 비유를 하고 계실까요? 
그것은 육신의 아버지도 절대로 실망시키거나 해를 기치는 법이 없는데
    하늘에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야, 너희가 나를 믿는다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을 보니 
최소한 부모 자식간에 가장 기본적인 친권적인 믿음도 없구나!
아무리 악한 부모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너희는 나를 어떻게 보느냐?
 너희 육신의 아버지 수준도 안되는 줄 아느냐? 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친권적인 믿음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개척교회 옆에 술집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술집은 밤마다 노래소리로 시끄러웠고 교회는 늘 그 소음에 시달렸습니다.
견디다 못한 교인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술집이 잘 안돼서 그곳을 떠나도록 기도하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술집이 망하도록 특별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교인들은 밤낮으로 
       술집이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고 그 곳을 떠나도록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기도가 시작되면서 
       술집이 손님의 발길이 끊겨 결국은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술집이 망하도록 교회서 기도한다는 소문을 들은 술집 주인은
교회 목사를 상대로 법원에 손해배상 청구를 했습니다.
교인들이 기도를 해서 장사가 안되니 교회가 손해 배상을 하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개척교회 목사님이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법관이 물었습니다.
“ 교회가 기도해서 술집이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인냐?”
그랬더니 목사님이 하는 말이
“ 세상에 기도한다고 가게가 망하다니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하니
법관이 이 어려운 문제를 고심하다가 이렇게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 술집 주인 믿음 좋음, 교회 목사 믿음 없음,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배상은 하나님께 가서 받도록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누가 지어낸 예화입니다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도하고도 
       스스로 그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막11:24절 [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 아멘!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최상의 것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우리의 기도 응답에 최상의 것이 무엇입니까?


5. 우리의 기도의 응답에 최상의 것은 무엇입니까?(13절, 참조/마7:11절)

지금까지 예수님의 기도의 비유를 통해 하신 말씀의 요지는 
기도는 명분보다는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더라도 강청해야 한다. 
       그러면 내가 반드시 응답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고 응답받을 때까지 
       믿고 끝까지 기도하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그 이상의 말씀입니다.
응답 정도가 아니라 응답을 하시더라도 
     최상의 것으로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인 것입니다.

똑 같은 기도에 관해 기록한 마태복음 7:11절에는 
[ 너희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고 하십니다.
여기에 좋은 것은 바로 최상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늘 최상의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시81:10절 [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 고 하십니다.
고대의 한 풍습에는 임금님이 국가에 공을 세운 신하에게는
       입을 크게 벌리게 하고  그 입에 보석을 가득 채워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입을 크게 열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큰 믿음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응답은 반드시 최상의 것으로 주십니다.
그 최상의 것이 바로 성령인 것입니다. 

13절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
최상의 것은 성령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떡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평생 떡을 먹고도 남을 수 있는 경제력을 주십니다.
      돈을 달라고 하면 성령님이 돈을 벌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엡3:20절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이 ] 
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기도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뿐 아니라  
         넘치도록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믿는다는 명분만 앞세우는 교인들이 되지 마시고
       친권적인 믿음으로 강청하는 교우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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