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진정한 믿음의 회복 (막 9:14~29)

  • 잡초 잡초
  • 884
  • 0

첨부 1


진정한 믿음의 회복 (막 9:14~29)
 
 
1.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느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함께 “변화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구약의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너무나도 신비한 영적인 세계를 현실 세계에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변화산 아래 있던 동료들에게로 내려왔습니다. 예수님과 3명의 제자들이 나머지 9명의 제자들에게로 와서 보니,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예수님에 대한 대표적인 반대자들로서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사사건건 방해하던 서기관들과 변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 내막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사실은 제법 나이가 든 한 소년이 간질병으로 인하여 죽을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간질병은 사람의 뇌의 어느 부위에서 시작된 비정상적인 전류로 인해 뇌 내의 조직들이 ‘과흥분 상태’가 되면서 의식소실, 사지의 강직 등이 유발되는 질환을 말합니다. 

동양에서는 예전부터 ‘천질(天疾)’이라 하여 간질병을 하늘이 저주하여 내리는 불치병으로 여겨졌습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외아들이 간질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고치기 위해 해볼 수 있는 일은 다 해 보았습니다. 의사든, 약이든,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주술에 의한 치료든, 안 해 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고칠 수 없었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소년의 병에 대해 한 가지 사실을 더 말하고 있습니다. 소년의 간질병은 단순한 병이 아니라 귀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간질병 자체도 불치의 병이었지만, 귀신에 의한 병이었기에 더욱 더 약이나 의원으로 고쳐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소년을 사로잡고 있던 귀신의 힘이 얼마나 컸든지, 지난 세월 동안 소년은 여러 차례의 죽을 고비를 맞았었습니다. 불에 타 죽을 뻔하기도 하고, 물에 익사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아버지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이리 저리 백방으로 노력하며 온갖 수를 다 써보았지만 아이를 고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아들이 귀신에 의해 고통당할 뿐 아니라,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그 곁에서 지켜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아버지는 하루 하루를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소년의 아버지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아마 그 사람의 주변에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사람들이나 그들의 가까운 친지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로부터 ‘아이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가보라’는 말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마지막 수단으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가 아들을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믿고 그들에게 아들을 맡겼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제자들도 그들의 스승처럼 아들의 병을 능히 고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어쩌면 제자들이 전에 귀신들린 자, 병든 자를 고친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긴질병에 걸린 소년을 본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셨고, 유대 각 동리로 가서 주님이 주신 권세와 능력으로 많은 귀신을 좇아내었고 또 병자들을 고친 경험이 있었기에(막6:7-13, 마10:1) 그 경험을 바탕으로 소년을 고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소년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아마 처음에는 한 두 명의 제자들이 아이를 고치기 위해 애를 썼을 겁니다. 그래도 되지 않자, 몇 명이 더 달라붙었습니다. 그것도 안되어 나머지 제자들이 함께 아이에게 달라붙어 씨름을 해 보았습니다만,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런 무능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반대자들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서기관들이 나섰습니다. 그들로서는 눈에 가시 같았던 나사렛 예수를 묵사발로 만들고, 백성들 앞에서 예수 일당을 공개적으로 뭉개어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사렛 예수의 제자라고 하면서 이 아이를 못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당신들의 스승인 예수가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는 증거요, 그의 제자들인 여러분이 그에게 속았다는 증거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자신들과 예수님을 비난해 오는 서기관들의 말을 제자들이 가만 듣고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들과 말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무능함이 명백하게 드러난 그 자리에서, 거기다가 말솜씨가 좋기로 소문난 서기관들과의 이 논쟁에서 제자들이 이길 수는 없었습니다. 거의 일방적으로 당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가 의외로 그렇게 어렵거나 힘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이의 질병이 단순히 육신적인 원인이라고 해도 고칠 수 있었겠습니다만, 아이의 병은 분명 귀신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권세와 능력을 받은 제자들로서는 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는 것이 오히려 쉬운 문제였을 것입니다. 육신의 어디에 이상이 생겼거나, 어디가 부러졌거나, 어떤 손상이 일어난 것보다는 귀신에 의한 것은 그 귀신만 쫓아내면 고쳐지니까 더 쉽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 문제를 풀지 못하고 원수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는 공개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소망과 기대를 제자들에게 걸고 있던 소년의 아버지는 제자들이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실망했으며 또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그러던 중, 예수님께서 그리로 오셨고, 소년의 아버지는 가장 먼저 예수님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귀신들린 내 아들을 데려왔으나, 선생님의 제자들이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7,18).” 그 사람은 의도적으로 제자들의 무능을 비판하고 공개적으로 수치를 주려고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이러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서기관들과 수많은 청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자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행동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의 교회와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반대자들과 이 세상이 교회와 신자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습니까? 제자들처럼 오늘날의 교회와 신자들 역시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무시를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왜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정죄하기 때문입니까? 우리가 사는 법과 방식이 세상과 달라서 그렇습니까? 우리가 멸시받고 조롱당하는 이유는 교회와 성도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고, 궁극적으로 영적인 힘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자신을 위하여, 자녀들이나 부모들을 위하여, 오늘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그 소년의 경우, 자기 속에 또 다른 영적 인격인 귀신이 들어와 자신과 자신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데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귀신이 죽이면 죽을 수밖에 없고, 귀신이 물로 집어넣으면 물에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귀신이 불에 넘어뜨리면 불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까? 아들을 고치기 위하여 산지사방을 수소문하여 약을 구하고 의사를 찾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절망만 더할 뿐이었습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들 또한 죽어가는 아이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즉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에 문제는 해결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문제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하나님께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소년처럼, 그 아비처럼, 제자들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로서 주님께로 나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소년의 아버지처럼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22)”라고 외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나는 믿음조차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문제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세대여(19)”라고 하신 데서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망신을 당한 제자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조용한 시간과 장소에서 다시 한 번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쫒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마17:19)” 그 물음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고 하셨고,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었어도 할 수 있었을 것인데 너희에게 그런 믿음이 없구나”라고 하셨습니다(마17:20).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믿음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붙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아이를 고칠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자신만만하게 덤볐다가 망신을 당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에 숨어 있는 진정한 원인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문제는 믿음이 적은 것입니다. 아니 믿음이 적다기보다는 깨알만 한 크기의 겨자씨만한 믿음조차도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믿음이 없다는 것은 자기 지혜, 자기 방식, 자기 학벌, 은행에 남아있는 적금이나 예금의 잔고, 가족이나 친지 등, 또 다른 뭔가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과 세상의 것을 의지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과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죠.

요즘 제법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이런 식의 설교를 지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삶과 인격이 변하는 것, 아파도 가난해도 힘들어도 참아내는 것에 관한 설교를 하라고 합니다. 저도 그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 능력을 맛보고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 것을 경험으로 믿지 못하고,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경험하여 알지 못한 사람에게 인격과 생활만 강조한다고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경험적이고 살아있는 믿음이 우선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최근 저는 믿음에 대해서 자주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기간 중에 믿음에 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즉 누구를 믿느냐, 혹 무엇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히브리서 11장의 대답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것들”을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등이 믿음의 대상입니다. 보이는 것, 우리가 본 것, 그리고 이미 일어난 일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이고 사건이지 믿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마치 보는 것처럼, 이미 일어난 일처럼 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처럼 믿어야 합니다. 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실 것을 믿기 때문에 마치 일어난 일인 것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두 번째로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9절부터 5장 2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거기에 성도가 믿는 믿음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죄인을 위하여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분이라는 것 등입니다. 그리고 교리적으로는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無誤性),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신성,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과 육체적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가시적 재림 등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의 능력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도에게 나타나는 것을 또한 믿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야고보서가 말하는 믿음은 그의 믿음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밖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행동이요 인격이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신자가 아니라고 야고보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여러분에게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 위에 서 있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은 이런 믿음 위에 서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믿음이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변화와 능력과 기적이 일어납니다. 즉 귀신에 의한 병으로 스스로도, 그 아비도, 주변 사람들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소년을 고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믿음의 비밀과 능력을 가지게 되시기 바랍니다. 소년의 병을 고치신 그때 그 주님이 오늘도 살아계셔서 믿는 자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기적과 권능을 베푸시는 것을 바로 여러분들이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3. 기도가 믿음을 낳고, 믿음이 능력을 낳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없는 우리가 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본문 29절에서 주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기도가 얼마나 깊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자라는 가장 좋은 비결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 기도하면서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 갈 길을 밝히 보이시는 하나님․․․.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연 살아 계시구나, 그의 능력이 무한하시구나’를 알게 되며, 이를 통하여 교회의 영광을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의 유익입니다. 

초대의 기독교 지도자 중의 한 분이신 ‘크리소스톰’은 기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노여워하는 사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난세를 정복시켜 고요하게 하고, 전쟁을 종결시키며, 폭풍우를 달래고, 마귀를 내어 쫓으며, 사망의 결박을 풀고, 질병을 완쾌시키고, 협잡꾼을 내쫓고, 도시들을 파멸에서 구출하며, 태양을 멈추게 하고, 천둥의 진행을 막는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그 무엇이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직 기도입니다. 

어느 전도사님이 기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의 손길을 느껴 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하는 중에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붙들고 있노라’하는 부드러운 음성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하는 중에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그 비밀에 동참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서 아파 괴로워하는데, 도대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대신 죽고자 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손을 얹고 기도할 때, 그의 괴로움이 걷히고 평안함 가운데 잠드는 모습을 본 감격이 있습니까? 귀신에 사로잡혀 자신이 무엇을 하는 줄도 모르고 날뛰는 자를 잡아 기도함으로 그가 해방되어 감격해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죽어서는 안되는 귀한 사람이 죽어 갈 때 그를 위해 기도함으로 살아나는 것을 바라본 감격과 환희를 경험해 보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기도하면, 이들이 경험한 주님의 특별한 능력과 여러분의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적을 맛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여러분의 믿음은 자라나, 믿음의 비밀과 능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그 기도를 통하여 날마다 믿음이 자라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할 수 있습니다. 또 해야 하고요!

말씀을 맺겠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아비는 예수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이런 부르짖음에 대해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3절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다 아시지 않습니까?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예수님은 “당신이 믿는다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돌아봅시다. 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어리고 무기력한 아이, 그 외아들을 어쩌지 못해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어떤 기관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문제 해결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제자들조차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하지 않습니까? 교회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책임지지 못하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문제조차도 믿음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신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조롱이나 당하고,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성도는 할 수 있습니다. 또 해야 하고요! 왜 그렇습니까? 사탄의 치밀하고도 은밀하고 때로는 거대한 음모와 방해를 무너뜨리고 승리하기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무기력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세상과 사람들이 교회와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자라기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 진정한 믿음의 회복입니다. 믿음의 비밀, 믿음의 능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로서 그 믿음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무능하고, 부족하고, 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그 주님을 더욱 신뢰하고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자신의 문제, 이웃과 주변과 이 땅의 문제를 주님의 능력으로 풀어가는 놀라운 믿음의 자리에 여러분이 서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