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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부정의 역설 (마 16: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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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부정의 역설 (마 16:21~28)

 
예수님은 역설의 진리를 조심스럽지만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신앙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본문을 통해서 생각할 때 신앙은 역설의 진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마다 제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역설적이라는 것입니다. 역설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가치관으로 말하면 모순 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역설적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 자체가 역설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피조물로 오신 것 자체가 역설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고생하고 나중에는 십자가의 고난까지 받은 것도 역설적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시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스럽게 하셨다는 것도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초기부터 역설적인 말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끌어 모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당시의 사람들은 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존감을 잃고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역설적인 말씀에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환호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새 세상이 이 땅에 왔구라!’ 라는 놀라움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무슨 말씀 때문일까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3) 

민중들은 자신들에게 천국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잘 지키지 못했고 게으름과 연약함 속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4)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자신들도 복을 받아 새로운 삶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슬픈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병들고 헐벗은 군중들이 가슴에 맺힌 아픔을 간직하며 예수님께 몰려들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 자기를 부정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의 공생애 기간을 거치시면서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역설적인 말씀을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제 생각이 배불러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치유사건을 목격했습니다.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부르게 먹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뒤따르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의 기적과 능력을 보면서 머릿속에 꿈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계속 가면 영광스러운 명예와 정치권력과 세상의 부자가 누리는 풍요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장차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 인해 제자들은 오히려 당혹스러웠습니다. 제자들이 마음속에 어쩔 줄 몰라 하며 고통 받았던 말씀은 또 한 번의 역설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을 알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자아가 쉽게 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르면서도 탐욕과 미움과 이기심과 정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셨습니다. 정말 제자가 되려면 또 한 번의 역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들의 사고가 새로워져야 했습니다. 신앙의 도약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기적인 욕망이 잘 바꿔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욕심쟁이의 모습을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고 잔인해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왜 그럴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을 부정하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경지까지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내면을 보시면서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의 생각과 몰두하는 문제를 온전히 내려둘 때 평안이 찾아온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가족과 사업까지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3년 동안 예수님을 뒤따랐던 제자들에게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은 상당히 어렵게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보지 않으셨습니까? 사람들이 환호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말씀만 하면 됩니다. 이제 예루살렘의 왕으로 등극하시면 끝납니다. 예수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왜 포기하려고 하세요?” 제자들은 도저히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과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청천벽력 같은 말씀에 제자들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우리들도 제자들과 같은 오해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내가 잘 나가는 이 결정적인 순간, 마지막 영광의 자리까지 온 순간에 주님께서 시샘을 하시나요? 지금 나를 넘어뜨리려고 하시나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시기로 작정하셨나요?” 
  
모든 것이 잘 된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라며 감사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의혹의 눈으로 항의합니다. “하나님, 내가 잘 되는 것을 못 봐주시겠어요? 내가 명예를 얻는 것을 싫어하세요? 왜 자신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세요?” 
  
예수님을 믿는 것은 정말 축복받은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뒤집어서 역설적인 말씀하시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움켜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낮아져서 자신을 부인하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지 잘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내려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신이 움켜지고 있는 것을 풀어놓으라고 하면 화를 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낮은 곳은 실패한 사람, 비천한 사람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낮은 곳에 내려가 자신을 포기하라는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역설의 지혜입니다. 진리인 것 같지만 축복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수사학적인 표현처럼 들립니다. 
  
“내려놓으면 높아진다고요? 버리면 얻을 수 있다고요? 연약해지면 강해진다고요? 내려놓으면 쌓인다고요? 작아지면 커진다고요? 죽으면 살아난다고요? 목숨을 내놓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요? 이 모든 것이 사실이에요?” 
  
믿음이 이와 같이 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용기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의 전체를 거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앞에 자신의 믿음과 신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아니면 믿음이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이 없어 의혹에 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생사람을 잡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생명을 준다고 희생을 강요하는 잘못된 종교가 아닙니다. 십일조를 내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어준다고 돈을 뜯어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은 성경의 말과 다른 말을 합니다. 세상은 강한 자가 권력과 명예를 얻는다고 알려줍니다. 자기 몫을 잘 챙겨야 돈이 들어온다고 말합니다. 잘 먹고 마셔야 삶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끊임없이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꾸로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아라. 자신을 부정해라. 움켜잡고 있는 모든 것을 펴서 맡겨라.” 


역설의 진리는 우리가 원하는 축복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을까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놀리거나 거짓말로 속이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깨달으려면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힐 만큼 사랑하심을 믿고 따라갈 때 십자가를 넘어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무아지경에 들어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철저히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없어지는 신앙이란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 안에 부정한 것이 있습니다. 거짓과 미움, 시기와 탐욕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주님께서 뒤엎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자아에게 성령의 열매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우리 자아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자아를 갖는 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자기 부정은 자기 비하나 자기 연민 속에서 탄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자신의 한계성을 알지만 동시에 용서받은 자로서의 기쁨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존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를 비하하고 자기 연민 속에 빠지는 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금욕적으로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축소주의적인 사고를 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정이란 자기 개성을 없애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오히려 자신의 개성이 더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빛을 바라는 것입니다. 자아를 부인하는 것은 기운 없이 맥 빠진 인간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갈망과 열정을 땅속에 파묻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더 큰 꿈을 꾸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꿈과 비전에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꿈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열정을 하나님의 열정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모나고 삐뚤어진 성격을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넉넉한 사랑의 성품으로 바꿔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아를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모습입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비하나 연민이 아니라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릇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채워 넣읍시다. 이것이 자기 부정이고 믿음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변신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낮아지면 높아지는 것, 연약할 때 강해지는 것, 내려놓으면 풍성해지는 하나님의 법칙을 새롭게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 삶을 내놓으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가르쳐주시는 비밀을 보여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마태복음16:24) 

왜 이것이 축복일까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작고 모자라는 사람일지라도 혐오하지 않을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정해서 우리와 함께 영점에서 다시 시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아무 것도 없어도 예수님과 더불어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 자기 부정의 시작입니다. 내가 그동안 자랑하던 것, 뽐내던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며 ‘너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잖아! 너 가진 것이 없잖아! 너 배운 것이 없잖아!’ 라고 말하며 조롱해도 위축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스스로 탄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나를 부정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이 ‘너 가진 것이 많잖아! 너 배운 것이 많잖아!’ 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교만해지지 않고 남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는 삶을 살지 않고 주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를 부정할 때 얻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집착했던 것, 삶을 걸려고 했던 것에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돈과 재물이 귀한 것이기는 하지만 돈과 재물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가족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아내와 남편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배우자에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주신 아들과 내 딸이 귀하기는 하지만 자녀에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가진 것이 우상처럼 다가오면 그것은 아직도 내가 나를 부정하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사람과 약간의 공간을 두십시오. 그래야 서로 자유로워지고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족도 사랑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오랫동안 스스로를 못 살게 했던 혐오함과 열등감과 우월감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하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 집착하는 마음에서 자유를 얻으십시오.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 인생에 끊임없이 괴롭혔던 장애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당신을 위협했던 가장 위험한 인물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의 인생을 방해했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를 열등감에 빠뜨리고 상처를 준 가장 위험한 인물이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속에 있는 시기와 미움과 분노가 하나님의 축복을 방해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주신 놀라운 역사를 방해하는 주범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고백하는 은혜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내 모습 이대로 주님 앞에 있습니다. 내 부끄러운 모습, 고민해야 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새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은혜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인생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설 때 새로운 세상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면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소유물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때 없어서 불편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건강, 생명, 가족, 직업, 삶의 모든 여건이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깨닫고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인생을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 기쁜 마음, 찬양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신을 부정할 때 예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부정할 때 예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부정할 때 예수님의 열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부정할 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신을 숨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서 주님 앞에 나갈 때 큰 믿음과 사랑의 열매를 누리는 복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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