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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된 사람 (삼상 1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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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된 사람 (삼상 11:6~11)


지난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이라고도 하지요-에 대하여 말씀을 나눴습니다.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혹 부모님은 우리를 낳겠다고 계획하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계획하셨습니다. 
혹 부도덕한 부모는 있을지라도 부적절한 자식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도 우연히 하지 않으시고, 어떤 일도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calling)이 있습니다. 
사울에게만, 성직자에게만 소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든 적든, 건강하든 건강하지 못하든, 배웠던 배우지 못했든, 남자든 여자든 우리에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자하는 열망을 가지십시오. 
‘도대체 왜 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살게 하십니까? 도대체 왜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드셨습니까?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라고 진지하게 질문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꼭 대답해주실 것입니다. 
한번 왔다가 한번 가는 인생, 되는대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늘의 말씀입니다. 
온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베이징올림픽의 뜨거웠던 감동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 갑니다. 
모든 스포츠에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결과를 예측할 수없는 드라마적 요소 때문입니다.  
이번 올림픽에도 감동적인 얘기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하나 자를 수밖에 없었던 장애인의 몸으로 수영의 마라톤이라 불리는 10km경기에 참가한 나탈리 뒤 투아라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25명이 출전한 경기에서 놀랍게도 16위로 들어왔습니다. 
출발을 앞둔 그가 의족을 벗는 감동적인 뒷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인생의 비극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달성할 목표가 없는 것이 진정으로 인생의 비극입니다. 목표달성에 실패한 것은 치욕이 아닙니다. 오히려 달성할 목표가 없는 것이 치욕입니다. 그러니 높은 목표를 정하고 도전하십시오.” 

인생의 비극이 무엇입니까? 
가르고 갈라도 다시 덮쳐오는 파도 같이 헤치고 헤쳐도 또다시 덮쳐오는 삶의 곤경이  비극입니까? 
나탈리 뒤 투아는 인생의 비극은 그런 것이 아니고, 목표가 없는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지난 주간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가 말한 ‘인생의 비극’이라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에게도 인생의 비극은 있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성도들의 비극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면서 성도들을 불행하게 할 만한 요소들을 하나하나 짚어갔습니다. 

생활의 곤경, 불행의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질병, 물론 불행의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과의 갈등, 불행의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실패, 불행의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양파껍질을 벗기듯이 성도들의 비극의 본질을 찾아나가다가 도달한 결론은 바로 ‘성령 충만치 못함’이었습니다. 
성도들의 비극의 본질은 성령 충만하지 못함입니다. 


1. 이제 본문에 집중해봅시다. 

사울은 두 가지 절차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무엘의 기름부음으로 드러났습니다. 

삼상10:1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 

또 다른 하나는, 백성들의 인정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사울을 지도자로 인정하는 형식은 제비뽑기였습니다. 

그 내용이 삼상10:17-27절에 나옵니다. 
삼상10:21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그 가족대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한지라.” 

그러나 이런 절차만으로 사울의 왕권은 확립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형식적인 절차만으로 백성들의 마음을-민심이지요. -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왕으로서 즉위식도 갖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평소와 같이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울에게 자신의 지도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고대국가에서 왕의 지도력은 주로 전쟁을 통해 평가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주로 경제발전을 통해 지도자의 능력을 판가름하지요. 
마침 암몬과의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우리가 읽은 삼상 11장입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힌 것은 해변에 있는 블레셋만이 아니었습니다. 
요르단강 동쪽에 있는 암몬족속도(오늘날 요르단, 시리아지역)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그 당시 냉혹한 국제정치역학으로 볼 때 장래 위협이 될 것이 뻔한 신생 왕정국가인 ‘이스라엘’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요. 

그래서 암몬의 왕 나하스가 요르단강 동편, 변방에 있는 므낫세 지파에 속한 ‘길르앗 야베스’ 지역을 공략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는 소와 양을 기르는 유목에 적합한 좋은 목초가 많이 자라는 넓은 평원이었습니다. 
얼마나 목초지가 좋았던지 출애굽 하던 루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일찍이 이 지역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달라고 요구할 정도였습니다. 
유목문화에서 목초지는 생명과 같은 것이기에 예로부터 길르앗 야베스에서는 많은 분쟁이 있었습니다. 
암몬족속은 이스라엘과는 달리 일찍부터 왕정제도를 채택하였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스라엘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암몬의 이스라엘 공격은 사울의 지도력을 시험해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암몬사람의 공격에 굴복합니다. 
그리고 ‘종주권조약’을 맺자고 요청합니다. 

‘종주권조약’이란 일종의 불평등조약으로 약소국은 강대국에게 일정한 조공을 받치고,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강대국을 위하여 전쟁에 나가 싸운다는 국제조약입니다. 

삼상11:1절은 바로 이런 종주권조약의 표현입니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종이 될 테니 죽이지만 말고 살려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암몬 사람 나하스는 이런 강화조약을 거절합니다. 
삼상 11:2절 “........내가 너희 오른 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암몬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른쪽 눈을 칼로 도려내어 불구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런 설명을 덧붙입니다. 
“병사들의 왼쪽 눈은 방패로 가려지기 때문에, 오른쪽 눈을 빼는 것은 병사들의 전투력을 무력화시키는 조치이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게 상심합니다. 
이때 사울이 33만의 병사를 모집하여 암몬사람과의 싸움에 나섰습니다. 
대승하지요. 
이 승리로 말미암아 사울의 지도력이 입증된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의 지도력을 확립한 뒤 길갈에서 공식적으로 왕의 즉위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삼상 11:15절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2. 그런데 사울의 지도력 확립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 성령의 역사입니다. 
오늘 설교의 요점입니다. 
우리는 사울을 왕으로 세워가는 전 과정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삼상10:6절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 

삼상10:10절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오늘 본문인 삼상11:6절에도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울에게 임하는 성령을 묘사할 때 ‘크게 임하였다.’고 표현했습니다. 
보세요. 

삼상10:6절에도 “네게도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삼상10:10절에도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함으로.......” 
삼상11:6절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크게’라는 단어를 쓰지 않아도 말이 될 것 같은데....... 
여기서 ‘크게’라는 말은 ‘in power'즉 권능으로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권능이 임합니다. 
행1:8절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 충만하기 전의 사울은 비록 왕으로 추대되었으면서도 비류들의 멸시에 잠잠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일이나 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하자 그는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로 변신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예를 무수히 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하기 전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도망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마26:56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26:74-75절에서 수제자인 베드로의 태도를 보십시오.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 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령 충만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의 복음을 전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고 협박하자 사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4:19-20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어디서 이런 담대함이 나왔습니까? 
성령 충만입니다. 

지난주 금요일 밤에 우리 ‘강북지방회’는 영락기도원에서 철야간증집회를 가졌습니다. 
강사로 이병욱 장로님을 모셨습니다. 
이 분은 외과의사로서 영혼 구원의 열정이 가득 찬 분이었습니다. 

이런 인상적인 얘기를 했습니다. 
“이 세상에 70%, 80% 헌신된 사람은 많다. 70%, 80% 헌신된 100명보다 100% 헌신된 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 100% 헌신된 사람이 되라. 그러면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는 자기 삶을 근거로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행20:24절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이 그렇게 혁혁한 선교의 열매를 거둔 것은 100% 헌신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100% 헌신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목회영역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 충만은 모든 영역에서 필요합니다. 
의사를 잘 하려면, 교사를 잘 하려면, 사업을 잘 하려면, 학업을 잘 하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 3D 업종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3D 업종을 기피합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을 받으면 ‘new 3 D’가 됩니다. 

① 성령 충만하면 dream(꿈)을 갖게 됩니다. 
② 성령 충만하면 drive(추진력)가 있는 사람이 됩니다. 
③ 성령 충만하면 dramatic(극적인)한  삶을 살게 됩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복음성가- 우리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면 

불교는 온갖 오욕칠정을 마음에서 털어버리라고 ‘비움’을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비움과 더불어 채움을 강조합니다. 
‘비움’이란 ‘자아’를 말하는 것이고 ‘채움’이란 성령 충만을 말합니다. 

거듭나면 삶의 주인이 바뀝니다. 
예전에는 내 자아가 삶의 주인이었으나 거듭나면 성령이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내 삶의 주인 되신 성령의 다스림을 온전히 받는 것을 성령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결국에는 성공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령 충만하기 전의 사울은 비록 왕으로 추대되었으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일이나 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물이었습니다. 
사울은 오늘 낙심하고, 용기 없고, 자신감 없고, 희망이 없는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령 충만하자 사울은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도전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을 인정하십시오. 
성령을 환영하십시오.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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