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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막 10: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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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막 10:46~52)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 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이웃집에 가서 정중히 낫을 빌려 달라 했습니다. 그러나 한마디로 거절을 당했습니다. 낫을 쓰지도 않으면서 낫을 빌려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 바로 그 이웃집에서 이 집에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기를 “낫을 빌려 주라”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은 아버지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왜 우리가 빌려줘야 합니까?” 

그 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면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 준다고 말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그러나 거절당했다고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 하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 라고 했답니다. 

긍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이란 사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과 은혜와 긍휼, 이 세 가지는 하나님 품속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의좋은 세 자매다.” 그는 말하기를 “사랑이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와 같은 것이라면, 긍휼은 병자를 방문하는 의사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은혜가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애정이라면, 긍휼은 죄의 결과로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한 애정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긍휼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에게 저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시해도 될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버림받아야 할 사람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 긍휼, 이 불쌍히 여김이 하나님에게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긍휼과 불쌍히 여김이 있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한 이름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은 ‘라훔’(rahum)이고, ‘긍휼이 여기다’는 ‘라함’(raham)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胎(태)’, 즉 ‘자궁’도 ‘레헴’(rehem)으로 씁니다. 긍휼과 긍휼이 여기다 는 단어는 ‘자궁’이라는 명사에서 만들어진 것이란 말입니다. 

왜 긍휼이 어머님의 태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을까요? 

어머님의 태에 들어있는 자식은 오직 어머님의 공급으로 성장하고 그 안에서 살 때가 가장 안전하고 평안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고 베푸시는 사랑이 어머니가 자식을 품고 있는 것 같기에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라 보여집니다. 

여러분! 갓 난 어린아이들이 울면 가슴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면 새근새근 잠드는 이유는 모태에 있을 때 어머님의 심장소리를 듣고 자는 평안함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것도 모르고 가슴을 “퍽퍽퍽 팍팍팍” 두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애가 불안해서 잠을 못잡니다. 모태인-레헴은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고향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행복의 모태입니다. 

그 사랑, 그 은혜, 그것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있음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여러분이 너무나도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가지고 여러 번 설교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바디매오가 외친 구 한마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한마디에 우리 주님이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소경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따라서 합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한마디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에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이 수없이 반복됩니다. 

시 103:13에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라고 했고 욜 2:18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중심이 뜨거우시며 그 백성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마 14:14에서는 예수님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그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여러분에게도 있습니까?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긍휼이 여러분에게 임한다면 여러분의 문제는 문제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을까요? 

1. 예수님이 누군지를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소경이었습니다. 시각장애가 있기에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몸에 한부분이 장애를 가진 사람은 다른 부분이 감각이 발달합니다. 시각 장애인들은 손끝 감각이 발달합니다. 그래서 점자를 손끝으로 더둠어 가면 그 모양가 숫자가 다 느껴집니다. 우리는 도저히 알수 없습니다. 

바디매오는 視覺(시각)장애가 있어 보이지 않으나 대신 聽覺(청각)은 매우 발달되었습니다. 그러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화하는 소리를 민감하게 듣게 되었습니다. 

바디매오가 사는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특별히 북쪽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마다 그 여리고를 지나갑니다. 
그러니 바디매오에게 갈릴리에서 사역하시던 예수님의 소식이 들렸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짐작할 수 있느냐고요? 
바디매오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는 것을 보면 그가 뭔가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병자 치유, 예수님이 행하신 여러 가지 기적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소경이기에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자기가 아는 바로는 그분은 메시야가 확실했습니다. 

그는 이사야 35장에 이미 약속된 메시야가 오실 때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5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라고 했습니다.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남들은 흘려보내는 말씀이지만 바디매오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고, 자기가 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종합하면 그는 분명 메시야이며 다윗의 자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는 소리만 듣고 곧바로 다윗의 자손이라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위대한 종교지도자도 아닙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은 세계 4대 성자로 기독교의 창시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어떤 이는 서양 종교의 창시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의 구원자이며 메시야입니다.” 
이것을 믿는 모든 자에게 하나님은 엄청난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한다고 다 믿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전도한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왜요? 하나님은 택한 받은 백성에게만 긍휼과 불쌍히 여김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롬 9:15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무에게나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앉아 예배드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큰 긍휼을 받은 자요.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가 340장 후렴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했습니다. 뭘 받은 증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긍휼과 불쌍히 여김을 받았습니다. 아멘? 

예수님이 누군지를 제대로 알고 믿으면 놀라운 것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의 긍휼을 받으려면 


2. 가로막는 환경을 이겨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주님을 향해 소리를 지릅니다. 
47절을 보세요.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런데 사람들이 그를 제재합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었다 했습니다. 잠잠 하라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닥치라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디매오가 외친 소리가 맘에 안 드는 것입니다. 자기들도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믿지 못하는데 감히 소경 거지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누가 꾸짖었을까요? ‘많은 사람’이라 했는데 아마도 제자들 중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대의 서기관 바리새인, 종교 지도자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요? 그가 비록 보지는 못하지만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인 것이 분명했고 그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심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48절을 보세요.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 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더욱 심히 소리 질러” 따라서 합시다. /더욱 심히 /소리 질러/ 

저는 이 자세가 주님의 긍휼과 관심을 끌었다고 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이겨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신앙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입니까? 직장입니까? 시간입니까? 
그것에 눌려 조용히 주저앉으면 기회는 없어집니다. 그리고 주님의 불쌍히 여김의 은총은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바디매오가 ‘잠잠 하라’는 소리에 기가 죽어 조용히 앉아 버렸다면 주님은 그냥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러 올라가시는 길이기에 마지막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렸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긍휼을 얻으러 나가는 길에 여러분을 가로막는 요소들은 다양합니다. 가장 무서운 존재는 사람입니다. 특히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의 열정에 찬물을 뿌리며 가로막을 수도 있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이나 친구들일 수도 있습니다. 교묘하게 가로막습니다. 
또 돈일수도 있습니다. 믿는 것도 중요하나 입에 풀칠하고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 않냐? 핑계를 댑니다. 돈이 없으면 예수도 못 믿는다는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핑계입니다. 

만약 바디매오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면 핑계를 댓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가로 막아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어서…….” 
아닙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을 가로막는 환경이 생기거든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더욱 소리를 지르십시오. 주님을 향해 더욱 심히 소리를 지르십시오. 더 크게 부르짖으란 말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발걸음이 멈추어지는 것입니다. 

49절에 “머물러 서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바디매오의 소리를 듣고 머물러 섰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부르짖음은 주님의 발걸음을 머물러 서게 하실 수 있는 부르짖음입니까? 힘들 때, 어려울 때, 그리고 주변의 장애물들이 여러분의 기를 꺾으려 할 때 더욱 심히 소리 질러 외치셔야 합니다. 남들이 힘들다고, 남들이 어렵다고 주저앉을 때 나도 똑같이 주저앉는다면 내게는 특별힌 은혜는 없을 것입니다. 

남들 모두가 주저앉을 만한 상황이지만 나는 더욱 소리 지르며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외쳐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도 마음을 다해 한번 외쳐 봅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렇게 작게 불러서 정말 불쌍히 여기겠습니까? 크게 외쳐 봅시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그때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의 은총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몸이 아프십니까? 그때입니다. 힘들고 어려워 죽을 것 같습니까? 도저히 소망이 없어 보입니까? 그때도 외쳐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의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면 


3. 구할 것을 바로 구해야 합니다. 

주님이 발걸음을 멈추고 바디매오를 부릅니다. 
그 맹인은 겉옷을 내던집니다. 그리고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뛰어갑니다. 바디매오는 보이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어느 방향이 있는 것은 청각으로 느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로 달려갑니다. 

겉옷을 버린 것도 참 의미가 큽니다. 당시의 옷은 매우 중요한 재산입니다. 더욱이 소경 거지인 바디매오에게는 엄청난 재산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부르신다는 소리를 듣고 내던지고 뛰어갑니다. 다윗의 자손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에게 나가는데 그까짓 것은 내버려도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을 섬기는 성도는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야 진짜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가치관의 변화가 없으면 그것은 외식입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정말 힘들어 집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성숙은 가치관의 변화를 동반하고 결국 우선순위가 성경적으로 정립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하는지, 무엇을 덜 귀하게 여겨야 하는지, 그 판가름은 신앙의 성숙한 가치관에 달려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임을 믿고 있었기에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애지중지하던 겉옷은 내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는데 그까짓 겉은 버려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우리는 그 겉옷을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히브리서 12:1절에서 이렇게 권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우리가 주님 앞에 나가는 일에 방해되는 무거운 것, 우리를 얽어매는 것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겉옷은 무엇입니까? 
체면입니까? 자존심입니까? 창피함입니까? 그게 뭡니까? 아무도 모르지만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걸리적 거리는 도구, 뭡니까? 마음속으로 대답하십시오. 

주님은 그 바디매오의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최소한의 부분만 가린 몸으로 달려온 그에게 주님은 아주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막10:51절 하반절입니다. 
51 예수께서 일러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뭘 물어 보십니까? 아니 왜 물어 보시냐고요? 보나마나 아닙니까? 그런데 왜 물어 봅니까?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이유 있습니다. 

그 질문은 그의 믿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가 외친 소리가 뭐지요?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그것이 정말 그렇게 믿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남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니까 그렇게 한번 불러 본 것인지, 그것을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 자리에 있는 바디매오라면 여러분은 뭐라 했을까요? 
바디매오는 주저앉고 요구합니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중요한 고백입니다. 이 요구는 단순한 요구가 아닙니다. 이 요구는 당신은 메시야이기에 나를 볼 수 있게 할 능력이 있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이기에 능히 나를 보게 할 수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신앙고백이 주님의 긍휼과 자비를 바디매오에게 베풀게 한 결정타 입니다. 
그는 정말 믿음에 합당한 것을 구했습니다. 
그는 그가 믿은 대로 구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요구에 주님도 놀라고 감격해 하시며 선언하십니다. 

52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좋으니라”  

정말 멋진 장면입니다. 그리고 정말 위대한 선물입니다. 주님은 그 바디매오의 신앙고백을 받으시고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잘 보세요. 
“내가 너를 고쳤다”가아닙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입니다. 

정말 엄청난 긍휼입니다. 믿음의 복을 누린 것입니다. 그 믿음이 맹인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이 말은 네가 네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좇으니라” 했습니다. 
온전한 회복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성도 여러분! 
에베소서 1:4~5절에서는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여러분에게도 이 놀라운 긍휼과 불쌍히 여김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과 불쌍히 여기심은 단순한 동정심이 아닙니다. 이 긍휼과 불쌍히 여기심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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