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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열매로 그 사람을 안다 (마 7:15~23) - 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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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열매로 그 사람을 안다 (마 7:15~23)


어느 담벼락에 잎이 무성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나무의 정체가 궁금했습니다. 가을이 되어도 잎만 푸를 뿐 도무지 이 나무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봄이 되어서야 저는 그 나무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나무는 개나리였습니다. 우리는 개나리의 노란 꽃만 늘상 보았기 때문에 꽃이 진 후의 나무의 정체를 알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나무라도 그 정체가 밝혀지는 날이 있습니다. 배추씨와 무씨도 씨앗 상태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자란 연후에는 그 씨앗이 무슨 씨앗이었는지 알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 숨겨진 것들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포도나무, 가시나무, 무화과나무, 엉겅퀴가 섞여 자라 처음에는 잘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를 보면 그 정체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끝까지 긴장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네가 포도나무인지 가시나무인지, 네가 무화과나무인지 엉겅퀴인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알곡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쭉정이로 판단되면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어느 분이 천국에 갔더랍니다. 이분은 집사님이었습니다. 천국에 가니 예수님께서 보좌에 앉아계시면서 잘 왔다고 환영하더랍니다. 그런데 보니 저 멀리서 목사님 한 분이 천국문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목사님을 보시더니 예수님이 보좌를 박차고 뛰어나가 그 목사님을 환영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이 집사님이 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항의했습니다. “아니 목사는 주의 종이라고 세상에 살면서 대우받았는데 천국에서도 이렇게 대우 받아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이러더랍니다. “아니다. 목사가 천국에 오는 게 하도 오랜만이라서 내가 이렇게 환영한 것이란다.”

우스개 소리지만 정말 마지막 날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합니까? 22절을 보세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날에 자기는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23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 정죄합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과거형입니다. 지금이 아니라 나는 과거로부터도 너희를 몰랐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결코 안 됩니다. 당연히 천국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김 집사가 그 자리에 없으면 되겠습니까? 열심히 기도하던 박 집사가 그 자리에 없으면 되겠습니까? 매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를 했던 이 목사가 그 자리에 없으면 되겠습니까? 그러지 않으려면 오늘 말씀을 정신 바짝 차리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누구인가?

주님은 거짓 선지자를 조심하라고 말씀합니다. 거짓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15절 말씀에서 그들은 “양의 옷을 입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겉으로는 양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목적은 하나님의 뜻에 있지 않고, 노략질 곧 자기 이익과 욕심에 있습니다. 

2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니까 이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 등 탁월한 권능을 행한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주님이 마지막 때의 일을 경고하시면서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큰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짓 선지자가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21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뜻이나 자기 판단이 아닙니다. 세상의 상식이나 세상의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법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법입니다. 법이 우리의 상급과 심판을 결정할 것입니다. 

최후의 하늘 법정에서 통용되는 법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고난을 겪고 실패하는 인생을 살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다가 그렇게 되었다면 그는 하늘나라 기준에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존경을 받고 많은 것을 누렸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이었고, 하나님의 뜻보다 세상의 논리를 좇아간 결과라면 그는 하늘나라 기준에서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세상은 배부른 자가 복이 있다고 하지만 주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은 군림하고 영광을 누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만 주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세상의 기준이 마치 하늘나라의 기준인 것처럼 착각하다가는 우리는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날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하나님의 법은 무엇입니까? 그 뜻과 법은 바로 지금까지 말씀하신 산상수훈 말씀들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미 다 계시되어 있습니다. 산상수훈이 최후 법정에서 통용될 하나님의 법입니다. 산상수훈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세상 가치대로 살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산상수훈의 말씀들을 순종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자기 영광을 추구했던 자들입니다. 자기 이득을 얻기에만 급급했던 자들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기적이나 능력에 약합니다. 누가 병 고치는 기적을 행했다면 우리는 우르르 그곳으로 몰려갑니다. 그러나 기적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의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도 기적을 행합니다. 귀신을 내어쫓는 일은 요즘 퇴마사들도 행합니다. 기적보다 더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 그래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이제는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기적을 행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병에서 고침을 받는 기적이 일어났을지라도 내 삶이 여전히 세상 방식 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비록 병에서 놓임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거짓 선지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그들이 맺는 열매로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의 법칙이 그렇듯이 이 판단은 정확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좋은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만약 나쁜 열매를 맺었다면 그것은 그 나무가 못된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오래 지켜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고 그 사람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단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단들도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단들은 주로 반사회적이고 반윤리적입니다. 거짓말도 잘하고, 인간을 우상화합니다.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고 두려움으로 협박합니다. 그 열매를 보면 그가 누구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성령받은 사람인지도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5:22-23). 내 안에 사랑과 오래 참음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들이 맺혀지면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오히려 교만과 불손함과 돈을 사랑함과 정죄의 열매가 맺혀진다면 그것은 그 안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한국교회에 소위 성령의 은사가 있다는 능력 있는 종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맺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돈을 탐하고, 사람에 대해서 무례하다면 그는 성령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행함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 상반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의인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로마서의 말씀과 행함을 강조하는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이 서로 반대되는 주장이 아닙니다. 믿음이 뿌리라며 행함은 열매입니다. 내가 믿는데 행함이 없다면 그것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훼퍼는 “믿는 자는 순종한다. 순종하는 자가 믿는 자다.”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새겨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한국에 10여 년 동안 사역하였던 강해설교의 대가 데니스 레인이 있습니다. 이 분이 한국교회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장점은 두 가지다. 바로 뜨거운 기도와 헌신이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데는 약하다는 점이다.” 우리 한국교회의 기도와 헌신과 전도열정은 우리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대한 순종은 어떻습니까? 한국교회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수많은 성도들과 대형교회들, 밤하늘을 수놓은 붉은 십자가 외에 한국교회가 자랑할만한 윤리적인 열매들이 있습니까? 한국민들이 한국교회를 보며 ‘아 이곳에는 진리가 있다.’ ‘이들은 빛과 소금이다. 우리도 이들처럼 살고 싶다.’ 이런 평가가 나옵니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지 못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우리 한국 교회를 보며 물질적이다,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다, 무례하다, 지나치게 광신적이다, 분열적이고 경쟁적이다, 무비판적이고 인간을 찬양한다는 평가를 서슴없이 내리지 않습니까?

우리 목회자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큰 교회를 이루었다, 내가 많은 사람을 전도했다, 내가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사람 앞에서 설교한다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얼마나 그리스도의 형상이 맺혀져 가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발버둥 치는가? 이것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합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사람들에게서 영광만 받는 거짓 선지자가 되기 쉽습니다. 마지막 날 “내가 매 주일마다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했던 것 주님 모르십니까?” 할 때 주님은 “불법을 행한 자야,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나를 떠나가라” 이렇게 내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산상수훈 말씀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우리 자신을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21절에서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주여, 주여”가 무슨 의미입니까? 단순한 호칭입니까? 아니면 기도할 때 부르짖는 소리입니까? “주여!” 라는 것은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퀴리오스’라는 고백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며 나는 그분의 종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자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종이 무슨 생각이 있나요? 주인의 뜻이 바로 자기 뜻이 되어야 하는 자가 종입니다. 종은 자기 영광을 취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의 영광을 위하여 살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주님이라 부르는 고백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고백대로 실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는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마21:28-31). 이 사람이 그 맏아들에게 가서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이 맏아들이 대답은 “예,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고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가라 하니 “싫소이다” 하더니 나중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고 물으니 사람들은 모두 둘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처럼 말보다 중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이 곧 믿음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사를 보며 바로 이점이 유감스럽습니다. 우리 교회사는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이냐는 논쟁보다는 말, 곧 신앙고백에 대한 논쟁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네가 고백하는 주님이 누구냐에 대한 논쟁이었습니다. 이 논쟁 때문에 교회사에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산상수훈의 형제와 화해하라, 형제를 대하여 노하거나 욕하거나 모욕하는 자는 살인하는 것과 같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의 논리보다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대라는 원수 사랑의 계명은 헌신짝처럼 버려졌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좀 과격하게 해석하면 산상수훈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어떤 위대한 신앙고백을 할지라도 내 심판을 피하지 못하리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분이 『기독교 죄악사』(조찬선 저)라는 책을 썼고, 외국의 어떤 분은(Kelsos) 『기독교 신앙의 희생자들』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의 부제가 “성서 시대이후 기독교인에 의해 죽음을 당한 사람 수는 얼마일까?” 였습니다. 이 책들에 의하면 콘스탄틴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수많은 이교도들이 살해를 당했다고 합니다. 선교 과정에서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숫자는 기독교 순교자들의 숫자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되고 서구가 이곳에 들어가고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6천 만에서 1억 명의 인디언이나 원주민이 희생을 당했다고 합니다.

십자군 전쟁의 추악상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 입니다. 이들이 예루살렘 성을 탈환한 후의 살육행위는 끔찍했습니다. 근 6만 명이 학살당하였다고 하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 앞에서 흐른 적들의 피가 우리 발목 깊이까지 적셨다....... 우리는 행복하고 기쁨에 울부짖으며 이를 기념하고 감사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우리 구세주의 무덤으로 행진했다” 십자군 전쟁 200년 동안 근 2천만 명이 희생당하였다고 합니다. 중세기에는 이단이나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중 스페인의 종교재판소가 유명했는데 그 처형 결과 당시 2,000만 명이었던 스페인 인구가 200년 후에는 600만 명으로 감소되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유태인 학살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히틀러가 원조가 아니라 이미 중세 교회가 유태인 학살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천년이 시작되던 21세기에 로마 카톨릭에서 지난 천년을 돌아보며 회개 성명을 냈는데, 그 중에 첫번째가 유태인에 대한 학살의 죄였습니다. 

우리 개신교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장로교의 창시자 존 칼빈을 들 수 있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성시화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제네바를 하나님이 다스리는 모범적인 기독교 도시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칼빈은 이단이라 하여, 정통교리를 부정한다 하여, 세례를 받지 않는다고 하여, 또 부모를 구타했다고 하여 짧은 4년 동안 76 명을 추방하고 54명을 처형하거나 화형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칼빈은 이단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했다고 합니다. “이단을 처형한다는 일은 결코 그리스교도적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된다. 일반 신자가 이단의 거짓 가르침에 물드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선한)목적을 위해서는 한 도시의 주민 전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

제가 그렇다고 해서 이단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정통 교리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엄청난 희생과 살인까지 가서야 되겠습니까? “주여!”라는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해서 실상 주님이 요구하시는 원수사랑과 형제 화해를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구약시대를 헤매고 있다 할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 논리와 전쟁과 살육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습니다. 자기와 뜻이 맞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마치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알의 이단들을 도륙하는 선지자 의식으로 충만했다 할 것입니다. 이들은 마지막 날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제가 주님의 이름과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히는 선지자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들은 “원수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은 이 불법한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나를 떠나가라” 하는 이들을 향한 주님의 뜻밖의 냉대에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신약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약시대는 모든 것을 십자가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모든 진리는 십자가를 통과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자기 희생의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모든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다른 형제에 대해서 모진 태도를 취하거나 폭력적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간디가 했던 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한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여, 주여” 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내가 믿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구원받을 거라 하며 우리 신앙생활이 방만해지는 것을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어떤 때는 믿음이란 것이 자기 의와 안전의 방편이 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하나님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나를 구원해야 되 하는 교만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와 동일한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는 정죄하는 바리새주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믿음만 강조하며, 믿음이 마치 자기 자신의 의라도 되는 것마냥 행함을 경시하는 머리만의 신앙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함의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행하는 자는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 한계를 의식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자입니다. 행하는 자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에 다른 사람의 연약함도 이해하며 포용합니다. 서로 부족함을 알기에 서로 연대하며 서로 돕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말이 아니라 행함을 보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신앙고백보다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말씀합니다. 믿는 것은 순종이고, 순종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이 부름 앞에 충실히 응답하여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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