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인의 삶 (롬 1:17~17)

  • 잡초 잡초
  • 494
  • 0

첨부 1


의인의 삶 (롬 1:17~17)


의인은 칭의(稱義)의 결과 얻어지는 거룩한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와 신앙이 인간 편에서 나타나게 하시고 의롭다(칭의)는 선언은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따라서 칭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모든 요구가 충족된 결과 죄인에 대해 무죄를 선언하시는 법적인 효과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의인의 삶'은 


Ⅰ. 믿음으로 만의 삶입니다. 

본문 1장 17절에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고 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의는 구원과 관련시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가 인간에게 전가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의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언약관계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언약에 의해서였습니다. 이 언약은 피 있는 제사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 피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언약적 죽음에 의해서 복음의 의가 택한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는 구원받은 언약 관계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은혜와 사랑으로 나타나고 구원 받지 못한 백성들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을 포함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전부는 동일한 것입니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 66권 중에 그 어떤 말씀이든지 차등을 배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분명히 강조되고 요점이 되는 말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마서 1장 16-17절은 로마서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복음의 요약입니다. 이 말씀은 종교 개혁자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는데 공헌했습니다. 당시 루터는 어거스틴파 수도사의 일원으로 교황 레오 10세의 초청을 받아 엘볼트 지부를 대표하여 영원한 도시 로마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이 여행에서 루터가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르네상스의 로마나 고적과 유물의 도시 로마가 아니라 성자(聖者)들의 로마였습니다. 그는 영원한 도시를 바라보면서 성 로마 만세를 부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27세의 철학교수이자 신학도였던 루터는 로마도시를 여행하는 동안 엄청난 갈등과 실망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참회에 있어서 참회자들의 부적합한 모습과 승려들의 무식과 무질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 죽은 사람을 위하여 일정한 수의 미사를 반복하는 것이 저들의 일과였습니다. 그 미사 자체가 대단히 형식적이었습니다. 오히려 불경건을 조장하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교황권의 타락과 형식적인 미사를 보고 거룩한 성로마를 숭배하러 갔다가 오히려 환멸을 느끼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본 로마는 강도의 굴혈과 같았습니다. 그가 본 교황들은 가장 큰 범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교리로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구원의 복음을 빼앗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못해 영적 기갈이 든 사람들을 보고 그는 교황청과 로마를 경멸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로마에서 다른 순례자들처럼 빌라도의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비하신 어머니 우리의 희망이신 마리아를 암송하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을 그는 연옥에서 영혼이 구원을 받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계속한 것입니다. 

그는 부모들이 생존하여 계신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을 떠났다면 아들인 자신이 로마에서 이렇게 고행을 하므로 그들도 연옥에서 천국으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반복된 마리아 숭배 주문과 28계단에 대한 키스를 마치고 마지막 계단에 이르렀습니다. 바로 그때 그는 생각하기를 고행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는 말씀이 그를 강력하게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순례를 마치고 귀국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성경을 연구할 때 어떤 개혁을 목표하고 한 것이 아닙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자라고 사람들에게 불리워진 것도 철저히 그의 본래의 의도한 바는 아닙니다. 구원에 대하여 영적으로 고민한 수도사가 복음의 진리를 발견하고 충격과 함께 감격에 넘쳐서 말하고 행동한 것이 곧 개혁의 발화로 성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하여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비성경적인 로마 카톨릭을 떠났습니다. 개혁의 노선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데서 크게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대단한 발견이요 위대한 진전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기독교는 많은 교파로 나누어 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교파분열을 부정적으로 본다고 해도 믿음으로만이 구원 받는다는 것을 세상에 천명한 이 한 가지만으로 개혁의 의무를 다한 것입니다. 

루터 자신도 오직 이신득구만을 강조한 결과 믿는 자들의 행위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성경에서 불필요한 책처럼 취급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루터는 사제의 신분으로 엄청난 큰일을 감행했습니다. 성찬의 공재설만 해도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에 비하면 굉장한 진보였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고 하는 성경 발견은 로마 카톨릭에 대한 선전 포고와도 같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시 루터에게 더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잔인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 칼빈이나 존 낙스를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을 보완하고 발전시켜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의인의 삶'은 


Ⅱ. 권세자의 삶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영접하다'(람바노, )는 '손에 가진다', '취한다'는 의미로 개인적인 영접을 말합니다. 곧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 이름은 예수의 이름입니다. 곧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마 1:21). 

요한복음 13장 20절에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문맥상을 볼 때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가 나를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와 동일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이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시므로(요10:30) 한 분을 배척하고 한 분을 영접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의 종들이 그리스도를 전할 때 그들을 배척하고 불순종하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것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거침없이 계속되는 신앙을 말합니다. 그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역사성과 신성과 인성을 믿는다는 것을 전부로 하지 않습니다. 

여기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인정한다는 보다 구체적인 신앙고백과 그것에 따르는 행동화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자체가 권세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권세(엨수시아, )는 첫째로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눅 12:5; 골 1:13)을 가리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내려주신 절대적인 권한과 힘(마 28:18; 막 2:10; 눅 4:36)을 나타냅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이와 같은 권세를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8절에 『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파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계시록 22장 14절에 『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① 이 세상의 모든 불의로부터 승리하는 권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3절에 『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라고 했습니다. 
요한1서 2장 13절에 『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1서 5장 4-5절에 『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37절에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권세를 부여 받았다는 것은 

② 죄로부터 자유하는 권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2절에 『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고 했습니다.

③ 죽음으로부터 자유하는 권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④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교회운동의 권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8절에 『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8:18-20절에 『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⑤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입니다. 
마가복음 3장 15절에 『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6장 7절에 『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라고 했습니다. 

⑥ 병 고치는 능력과 권세입니다. 
누가복음 9장 1절에 『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라고 했습니다. '의인의 삶'은 


Ⅲ.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 추구 하는 삶입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했습니다.
그의 나라, 그의 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메시야적 왕국에 대한 복음을 듣고 순종하고 따르라는 말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한다는 말은 앞에서 말한 칭의(稱義)를 구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對神關係)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신전인격의 신앙입니다. 그 신앙의 행동화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의 결과는 또 다른 관계가 요구됩니다. 

그것은 대인관계(對人關係)와 대물관계(對物關係)와 그리고 자신(自身)과의 관계(關係)에서 적대관계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 '먼저' 라고 하는 말은 이 세상사람(불신자)들이 추구하는 모든 세속적 욕망과 노력을 제 2차적인 것으로 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인생이 최우선 추구해야 하는 긴박하고 절실한 것임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자신의 경건(Piety)이 자기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경건이 자신을 위한 것이면 그 경건은 위선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5절에 『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고 했습니다. 
자신의 포부(aspiration)역시 자신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이 두 영역만이 존재할 뿐 중간지대나 제 3의 지대는 존재하지 아니합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에게는 핍박이 따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 추구하는 자의 삶은 고락간에 그의 이름과 그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나타납니다. 

①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는 삶입니다. 
사도행전 21장 13절에 『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라고 했습니다. 

②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삶입니다.
사도행전 15장 25-26절에 『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③ 고난 받기를 마다하지 아니하는 삶입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바울의 고난에 목숨을 걸고 동행했습니다. 
로마서 16장 4절에 『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6절에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목숨을 바꾸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사랑을 인하여 갈라디아서 4장 15절에 『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학자 리델보스(Ridderbos)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이신득구 교리는 복음의 핵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상의 총체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른바 복음주의라는 신학적 입장을 가지게 됩니다. 

복음주의는 성경에 나타난 복음을 중시하는 신학적 입장입니다. 말하자면 로마 카톨릭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적 신앙을 가리킵니다. 전통과 의식을 중시하는 카톨릭에 대한 성경적 복음의 진리를 주장했다는 것에서 복음주의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주의란 말은 종교개혁 이후 모든 개신교에 광범위하게 적용되면서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에까지 적용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복음주의 신학은 곧 기독교의 정통신학으로 등식화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복음주의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신학사상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복음주의는 각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양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의 한국의 복음주의는 이신득구와 축복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내가 구원받았으니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복음은 단지 인간에게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결론도 끝도 아닙니다. 복음의 최종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한다기 보다는 자신의 영광과 축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샤머니즘입니다. 샤머니즘에는 내세나 고난 같은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현재의 축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복음주의는 이른바 좁은 길을 가는 개혁주의 신앙의 주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주의 다음에 개혁주의 신앙노선이 나온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복음주의 신학노선이 개혁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주의는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계승할 수 없었습니다. 개혁주의는 곧 성경주의입니다.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사상은 아벨, 셋, 노아,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이사야, 세례요한,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메첸, 주기철, 손양원 목사로 이어지는 거룩한 신앙의 물줄기입니다. 

한국의 복음주의는 더 이상 기독교 사상의 정통이 아닙니다. 이러한 한국의 복음주의는 앞으로 살아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 앞에 그의 영광을 위해 적극적인 삶이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의 삶은 조급하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보장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92편 12-15절에 『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의인은 그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피조물입니다. 비록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의인의 긍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부갓네살 왕 앞에 고백한 신앙입니다. 의인(그리스도인)들의 신행일치(순교적 신앙) 신앙은 미덕이 아니라 당연한 의무입니다. 의인(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은 미덕이 아니라 당연한 의무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