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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합 3:1~6, 행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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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합 3:1~6, 행 16:5)


미국 감리교 목사인 윌리엄 퀘일(1860∼1925)은 미국 부흥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는 능력 있는 설교, 설득력 있는 설교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의 유연한 설교까닭에 ‘감리교의 종달새’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목사님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밤중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대던 어느 날 밤 침대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이 고통스러운 문제를 제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문제를 안고 고통당하고 있구나. 그러나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할 일이다. 너는 자라. 남은 밤 시간에는 나 혼자 깨어 있으마.” 그는 감사와 평안 가운데 잠을 잘 잤습니다. 그는 그날 밤 하나님께로부터 문제 해결의 증거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주님께서 깨어 계시니 여러분은 평안히 주무십시오.”
  
인간에게 고통과 번민과 울부짖음은 필수입니다. 고통당하세요. 그러나 고통에 지배당하지는 마세요. 슬픔이 있습니까? 슬퍼하세요. 그러나 슬픔에 잠기지는 마세요. 고민이 있습니까? 고민하세요. 그러나 고민에 빠지지는 마세요. 아픕니까? 아파하세요. 그러나 아픔에 지배당하거나 아픔 때문에 파멸당하지 마세요. 이제 하나님께 맡기고 편히 주무세요.
  
하박국은 인간의 고통과 불평과 고민을 넘어서 이제 회복합니다. “이 수년 내에 주의 일을 부흥케 하소서”라고 합니다. ‘주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주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원을 일컫습니다. 주의 심판과 구원을 속히 이루라고 하박국은 기도합니다. 구원과 회복은 곧 성장입니다.
  
‘부흥케’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하예후’입니다. 살게 하다는 의미의 ‘하야’에서 나온 말입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다시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수년 내에’라는 말은 짧은 시간 내에 라는 말입니다. 짧은 시간 내에 죽은 것 같은 이스라엘을 다시 살려달라고 하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대단하십니다. 하나님은 느긋하십니다. 절대로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이런 하나님께 서둘러 주십시오 라고 부탁하는 말입니다.
  
왜 부흥이 안됩니까? 내가 좌절하고 고민하고 하나님께서 하실 걱정을 내가 하고 있으니 부흥이 안 됩니다. 주님께서 하실 걱정은 주님께 맡기고 이제 “부흥케 하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개인의 건강이나 취업이나 진학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부흥해야 합니다. 교회의 성장과 회복과 사명을 다 맡기고 이제 “부흥케 하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가정의 가족건강과 자녀문제와 경제적인 문제를 다 맡겨버리고 “부흥케 하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국가의 정치, 경제, 외교, 안보 모두 내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 맡기고 “주의 일을 부흥케 하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부흥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흥을 원하지만 부흥하는 비결을 알아야 부흥할 수 있습니다. 부흥이란 말의 영어는 revival입니다. 이 말은 “죽었던 것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지칭합니다. 우리의 심령과 영성과 자신감과 용기가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 교회, 사회, 국가의 부흥을 위해서는 먼저 개인의 심령, 도덕성, 자신감, 용기, 의지가 살아나야 합니다. 이 간곡한 부흥의 소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긍휼이 있어야 부흥합니다.

하박국 3:2에는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합니다. “부흥케 하소서”란 심판과 구원하시는 주의 일을 생생케 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 눈에 보이게 해 달라는 부탁입니다.
  
하나님이 왜 진노하십니까? 영적으로 죽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음에 대한 긍휼하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있어야 살고 부흥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살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우리 모두가 벌써 다 죽었습니다. 야고보서 2:13에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합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심판을 받지 않게 해 주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입니다.
  
긍휼(compassion)이란 말은 ‘함께 아파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긍휼을 베풀다는 말은 ‘스프랭크니조마이’(splanchnizomai)로서 창자로부터 아픔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아버지는 잘못을 범한 아들을 칠 수 없어서 자신의 종아리를 칩니다. 어떤 왕은 국가에 지엄한 법을 만들어 잘못을 범한 자는 두 눈을 뽑겠다고 했는데 아들이 죄를 범하여 아들의 두 눈을 뺄 수 없어 자신의 한 눈을 대신 뺀 아버지 왕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긍휼입니다. 피를 나눈 아버지, 어머니가 아니면 진정한 긍휼을 베풀 수가 없습니다.
  
언제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십니까? 인간이 의를 지켜나갈 때입니다. 인간이 의를 지킬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십니다. 의롭지 못한 자에게는 긍휼도 없습니다. 긍휼은 사랑인데 사랑은 의로움과 함께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진노는 사람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을 때리기도 합니다. 성경의 ‘분노’라는 단어는 400번 이상 나타납니다. 잘 아는 대로 가인의 분노는 살인을 씨앗이었습니다. 분노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화는 한번 내게 되면 자꾸 내게 됩니다. 계속해서 화를 내면 얼마쯤 지나면 분노가 자신의 모습이 됩니다. 분노의 효과를 유지하려면 강도가 점점 더 세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노는 파급효과가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분노의 말을 쏘지만 그 파편 조각들이 아들딸의 마음을 찌릅니다. 분노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세상적 기준으로는 매우 성공적일 수 있지만 항상 누군가의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합니다. 사람의 분노가 왜 위험합니까? 긍휼이 없는 분노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긍휼이 있으므로 생명이 있습니다.
  
교회가 문제가 있을 때에 말씀이 더욱 왕성하고 수가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교회가 부흥 된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핍박으로 야고보가 순교하고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도행전 12:24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 하더라”고 합니다. 이방에 쫓겨 간 바울과 바나바가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3:49에는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고 합니다. 바울에 에베소에서 전도할 때 악귀가 나타나고 마술을 행하는 자가 방해했습니다. 사도행전 13:20에는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합니다.
  
말씀의 부흥은 편안할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어려울 때에 나타납니다.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말씀이 훼방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긍휼로 부흥은 이루어집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고 시련이 있을 때가 부흥의 계기가 됩니다. 이런 때는 기대가 됩니다. 하나님은 문제와 아픔 가운데서 개인도 성장케 하시고 부흥케 하십니다. 사도행전 16:5에는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고 합니다. 교회는 핍박 가운데서 성장하고 문제 가운데서 부흥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의 긍휼은 빛을 보기 때문입니다.


둘째, 거룩하신 하나님이 오셔야 부흥합니다.

하박국 3:3에는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 산에서부터 오시는도다. 그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의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도다”라고 합니다. 데만과 바란산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에게 나타날 때 관련된 지역들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자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야 부흥이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곧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야 생명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실패, 하나님의 백성의 배반과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하박국은 놀라움과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하나님이 오시고, 거룩한 자가 오십니다. 하나님이 오시면 모든 것이 성취됩니다. 모든 것이 완전해집니다.
  
어릴 때는 이런 경험들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무엇을 사 달라고 어머니에게 졸라댑니다. 어머니는 말씀합니다. “아빠 오시면 사줄게”.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 때는 아버지가 오시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가 오셔도 별로 생기는 것도, 달라지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오시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생깁니다. 모든 것이 변하고 부흥합니다.
  
시련을 당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 시련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복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만 체험할 수 있다면 시련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습니다. 지독한 시련의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보다 더 달콤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가 살아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이시니 임재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 자체가 생명입니다. 왜 우리가 살지 못합니까? 왜 부흥이 없습니까? 하나님 없이 우리끼리 노력하니까 부흥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음이 곧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이 죽음이며 하나님 없이 하는 것은 부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잭 하일스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치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과 함께 일하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왜 부흥하지 못합니까? 하나님과 함께 일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 복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영적 자살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그 자체가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나님의 눈에서 피하여 숨을 수 있다고 하는 자체가 죄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운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막으려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미래도, 부흥도, 성장도, 심지어는 희망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렀던 순간인 30초 동안 사울이라 이름하는 살인자를 개종시켜 순교자 바울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개인적으로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는 자신의 여생에서 이 사건을 급격한 변화였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오심, 성령의 오심, 예수님을 만남은 위대한 위인들을 산출하는 잠재력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면 누구나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32절에 보세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하나님의 임재가 승리요 부흥입니다.
  
삼손이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 그 힘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그 힘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분의 임재를 맛보기 위해 죽기를 각오한 사람들에게만 영광 가운데 방문(visitation)하시고 또 거주(habitation)하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의 생명을 걸 일입니다. 임재는 생명을 공급합니다. 로랜스 형제는 ‘하나님의 임재 연습’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영혼의 생명이요 양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영혼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해 전 미국 알라바마 버밍햄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어느 아버지가 새로 태어난 아기와 부인을 데리러 병원에 갔습니다. 그는 시동을 건채 차를 두고 내렸고, 그 차에는 3살 된 큰 아이 빌리가 뒷좌석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차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아버지와 가족들은 공포에 질렸습니다. 차 때문이 아니라 아이 때문입니다. 이 일로 작은 도시가 발칵 뒤집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에서 심한 부상을 입은 한 베트남 참전용사가 이 소식을 듣고 이 아이를 찾아주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느 외진 곳에서 차를 발견했지만 아이는 없었습니다. 한 낡고 버려진 외딴 집 지붕에서 이 아이가 신문지 뭉치를 흔듭니다. 참전용사는 “빌리 빌리” 하면서 다가가자 아이는 “아빠?” “아빠, 저 위해 오셨어요?”라고 묻습니다. 이 용사는 “나는 아빠가 아니지만 너를 찾으려 왔다. 아빠에게 데려다 주마”하고는 이 아이를 지붕에서 내려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아버지도 아닙니다. 나는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악의 손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다 줄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중매쟁이입니다. 공인중개사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전파되고 확장되는 것입니다.
  
누가 가장 큰 교회의 광고판인지 아십니까?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이 살아 움직이는 광고판입니다. 하늘나라의 문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타인에게 생명을 부여하기를 바랍니다. “주는 주의 일을 수일 내에 부흥케 하소서”라고 하는 하박국의 결론적 말씀이 우리의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부흥의 도구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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