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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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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 7:13~14)


마태복음 7:13-14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넓고 편한 길은 없다

우리 앞에 좁은 문과 큰 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문으로 들어가고 싶습니까? 우리 앞에 좁고 험한 길과 넓고 편한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로 가고 싶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문과 넓고 편한 길로 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문과 그런 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다” 저는 여기서 어떤 고상한 진리나 신앙의 길이 어떠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성경의 진리이기 이전에 세상의 이치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앞에 넓고 편한 길과 문이 있으면 그리로 가지 마십시오. 그 길은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인생의 진리는 쉽고 편한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쉽고 편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유혹이며 사단의 술수일 뿐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는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대가 없이 주어지는 편한 길은 없습니다. 요즘 베이징 올림픽이 한참입니다. 저는 올림픽을 보며 그런 진리를 깨닫습니다. 사람들은 금메달을 딴 선수들을 보며 그들이 거저 그 정상의 자리에 오른 줄 압니다. 그들의 영광만 보지만 그들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눈물과 땀을 흘려야 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번에 역도에서 전병관 선수 이후 16년 만에 금메달을 딴 사재혁 선수가 있습니다. 이 선수는 이 영광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경기나 훈련 중 입은 부상으로 네 번이나 수술을 해야만 했습니다. 올림픽을 앞두고는 매일 5만 kg을 들어 올렸다고 합니다. 모든 연습량을 합하면 작은 산 하나를 들어 올린 것과 같지요. 사재혁 선수가 남들이 쉬는 시간에 땀을 흘리며 좁은 길을 가는 수고를 했기에 금메달이라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영화까지 제작되었던 한국 여자 핸드볼 팀도 그렇습니다. 키가 큰 서구 선수들과 작은 몸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전후반 내내 지치지 않고 뛸 수 있는 체력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100회씩 코트를 왕복하는 훈련을 하며 훈련이 끝나자마자 바로 게임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체력이 완전히 바닥이 나서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때까지 훈련을 합니다. 이게 좁은 길입니다. 세상에 쉽고 편한 길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영광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 많은 재물을 얻은 사람을 보며 사람들은 그들이 넓고 편한 길을 통해 그렇게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남들이 찾지 않는 좁고 협착한 길을 걸었기에 그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남이 걷지 않았던 미지의 길을 걸어서 길을 내었던 사람들입니다. 넓은 길은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경쟁이 치열합니다. 그래서 그런 곳에서 성공을 거두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지의 길은 또한 우리들에게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 안에 잠재된 능력을 100%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길이기에 그들을 성공으로 이끕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인생관을 분명히 설정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좁은 길로 가야 생명이 있다. 좁은 길로 가야 성공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가치관입니다. 

여러분 지금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해리포터』 시리즈입니다. 1997년 1권이 나오기 시작하여 6권까지 약 3억 2,500만 권이 팔렸다고 합니다. 마지막 7권도 그 첫날에만 전세계적으로 1,200만 권이 팔렸다고 합니다. 해리포터의 작가는 조앤 롤링입니다. 조앤 롤링도 이렇게 유명한 작가가 되기까지는 좁고 협착한 험한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해리포터라는 판타지 소설을 처음 집필할 때 조앤 롤링은 아기가 딸린 가난한 이혼녀에 불과했습니다.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먹고살아 가는 비참한 인생이었습니다. 조앤 롤링은 그때까지 자신은 여러 번 실패했지만 “저는 살아 있었고, 사랑하는 딸이 있고, 낡은 타이프라이터와 엄청난 아이디어가 있었지요.”라고 회상했습니다.

그녀는 가난했지만 글을 쓰는 일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글을 쓸 장소가 여건이 마땅찮았다는 점입니다. 집이라고 해봐야, 그저 찬 바람만 가릴 정도의 벽과 마룻바닥만 덩그러니 있는 곳이었기에 이런 곳에서 상상력이 샘솟을 리 없었습니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취한 방법은 매일매일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아이가 잠들 때까지 도시를 하염없이 거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잠들면,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과 물 한 컵만으로 두어 시간 아무런 간섭 없이 글에 매달릴 수 있는 근처 카페 ‘니콜슨’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해리포터는 완성이 되었습니다. 해리포터 성공 이후 이곳은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카페 니콜슨의 주인은 그때 모습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일을 하다 말고 문득 곁눈질을 해보면 어김없이 저 구석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지요. 정말 묘한 광경이었어요. 한 손으로 유모차를 밀어둔 채 오로지 글에만 매달리더라구요.”

해리포터 1권은 이렇게 완성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12 곳에서 퇴짜를 맞아야만 했습니다. 에이전시에게 작품을 제출할 때에도 복사비가 없어 8만 단어에 이르는 구식 타자기로 손수 두 번씩 다시 타이핑했다고 합니다. 조앤 롤링은 이처럼 좁고 험한 길을 걸어왔기에 그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물론 모두가 좁고 험한 길을 간다고 해서 조앤 롤링처럼 큰 영광을 누리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인생의 진리는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지는 영광은 없다는 것입니다. 수고하며 고난을 견디는 인내가 있기에 그 열매로 주어지는 것이 성공과 영광의 열매입니다.

우리 앞에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다면 어려운 길로 가십시오. 지금 당장은 고생을 해도 결국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길이 어려워 보이기 때문에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넓고 편한 길로 가면 정말 편하고 성공할 줄 압니다. 아닙니다. 편안함과 성공은 같이 갈 수 없습니다. 편안하길 원하면 성공을 포기해야 합니다. 성공을 위해서는 고난과 고독의 길을 가야 합니다. 

제가 아는 분들 중에는 큰 교회로 부임하신 분들이 몇몇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정상에 근접했다고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큰 교회에 부임한 후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넓고 편한 길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넓고 편한 길처럼 보였지만 그 길은 실상 좁고 협착한 길이었습니다. 큰 교회에 부임한 목회자는 사람들 때문에 치이다 그 얼굴에 평화와 기쁨이 사라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큰 교회는 이미 그 교회에 자리를 잡은 장로들과 같은 기득권 세력이 있습니다. 이미 거기에 맞는 양식이 형성되어 있어서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런 양식에 목회자가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편하게 목회할 수는 있으나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의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설교도 하나님 주신 감동대로 할 수 없고 사람들의 입맛에 맞도록 해야 합니다. 넓고 편한 길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성공의 길은 좁은 문을 통과하는 길뿐입니다.

신앙인들은 근면 성실함의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허황되게 이렇게 해서 큰 돈을 벌고 성공했더라는 넓은 길로 가지 마십시오. 그들은 집을 사서 얼마를 벌었다더라, 주식을 사서 어떻게 되었다더라 하며 우리를 유혹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이런 허황된 의식이 너무 강합니다. 대박의 꿈, 돈벼락의 꿈이 너무 강합니다. 우리 전래 동화 중에 ‘흥부전’은 잘못하면 사행심을 조장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부자가 되어야지, 제비 다리 고쳐주는 착한 마음은 이해하나 어느 날 갑자기 박에서 은금보물이 쏟아지는 뜻밖의 행운을 통해서 부자가 되서야 되겠습니까?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 민족이 일제에 패망했던 이유를 이런 거짓과 허황된 마음에서 찾았습니다. 선생은 ‘동포에게 고하는 글’(1922)에서 착실함 삶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한 바 있습니다. “부허는 패망의 근본이요, 착실은 성공의 기초이외다. 무릇 착실이라는 것은 무슨 일이든지 실질적 인과율에 근거하여 명확한 타산 하에 정당한 계획과 조직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하여 어떠한 결과를 지어내겠다 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뜻을 옮기지 않고 그 순서에 의지하여 각근한 노력을 다함을 이름이외다. 부허는 이와 반대로 인과의 원칙을 무시하여 정당한 계산과 노력을 하지 아니하고 천에 한 번, 만에 한 번 뜨이는 요행수만 바라고 예외적 행동으로 여기 덥석, 저기 덥석 마구 덤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려고 하는 위대하고 신성한 사업의 성공을 허(虛)와 위(僞)로 기초하지 말고 진(眞)과 정(正)으로 기초합시다. 혹 이것은 작은 문제요 심상한 말로 생각할는지 모르거니와 나는 이 몇 가지가 큰 일을 해가려는 사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착실함의 정신 이것이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오늘날도 신앙인 중에서도 부동산 대박, 주식 대박, 로또나 도박의 대박을 바라며 인생을 쉽고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 멸망의 길로 가고 말 것입니다. 어떻게 요행수로 대박을 터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생 그런 대박의 신화를 꿈꾸다 허황된 인생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 좁은 길을 가야합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대박의 은혜를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감사함으로 받고, 하나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그런 은혜를 주셨으니 거기에 맞게 사용하면 됩니다.


신앙의 좁은 문

제가 최고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이 마태복음 7장 13,14절의 좁은 문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그것은 제가 고등학교 때 읽었던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책의 주인공이 예배를 드리는 도중 어떤 목사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하며 성경을 읽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이었는데 그때 이 구절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평생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신앙을 가지고 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만만치 않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예수 믿는 것이 쉽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신앙의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신앙의 길이 좁은 문의 길이 된 이유는 우리는 세상을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방식들 이런 것들을 거부합니다. 내가 확고하고 안전하다고 하여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 내어놓아야 하는 자기부인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과 관련된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의 결론부에 해당합니다. 주님은 산상수훈 말씀을 통하여 예수를 따르는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모두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말씀을 행함으로 순종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불순종하든지 두 가지 선택만이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좁은 길, 좁은 문은 산상수훈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말합니다. 넓은 길, 큰 문은 산상수훈 말씀에 불순종하는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향하는 길은 좁고 험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유는 주님께서 내가 가르친 이 말씀을 지키려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며 비관적으로 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매우 회의적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심령이 가난해지고,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긍휼을 베풀며, 마음이 청결하며, 평화를 만들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을 여러분은 복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까?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참 행복이 바로 이 팔복에 있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눈이나 이를 상하게 한 자에 대해서 똑같이 복수하는 것은 넓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네 오른 편 뺨을 때리고 모욕한 자에 대해서 같이 뺨을 때리고 그 배로 보복해 주는 것은 넓은 길입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왼편 뺨마저도 내어놓은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내가 구제나 헌금을 많이 했으면 그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은밀하게 하는 것이 바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 잘하고 교회에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은밀히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기뻐하며 다만 그분께만 기도하는 것, 이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 안에 있는 들보를 보려는 태도가 곧 좁은 문을 향해 가는 자의 자세입니다. 주님은 바로 여기에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좀더 우리 생활에 적용해 봅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속이고 내가 술수를 부리면 얼마나 편합니까? 탈세하고 부정직한 삶을 살면 당장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직하게 살려고 하다가는 손해도 보고, 빼앗기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손해를 각오하고 정직의 길을 가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두 크고 높은 자리에만 오르려 안달할 때 묵묵히 섬기며 희생하는 자리에 서는 것 이것이 좁은 문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런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적지만 그들에게 생명이 주어질 것이라 약속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얼마나 완악한지 넓은 길로 가다 자기들만 망하면 되었지, 좁은 길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도 자기 길로 끌어들이려고 안달합니다. 왜 편한 길을 놔두고 구지 어려운 길로 가느냐고 어리석다고 조롱합니다. 그렇게 가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이라고 두려움을 줍니다. 또 그 좁은 길의 끝에는 성공의 보장이 없고 자기와 같은 넓은 길에 희망이 있다며 거짓 확신을 전파합니다. 이곳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좁은 길을 가는 사람들의 확신을 흔듭니다. 진리는 결코 다수결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어른들을 위한『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 동화는 어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습니다. 자신이 나비인줄 모르는 애벌레는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믿으며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도중에 애벌레는 하늘로 향해 솟아 있는 큰 기둥을 보게 됩니다. 수많은 애벌레들이 이 기둥 위로 오르고 있었습니다. 줄무늬 애벌레가 다른 애벌레에게 그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건 아무도 몰라, 하지만 모두들 저렇게 달려가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 틀림없이 굉장히 좋은 것이 있을 거야. 안녕. 나도 더 이상 시간이 없어!” 줄무늬 애벌레는 궁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지만 기둥을 오르는 다른 애벌레들의 대열에 합류합니다. 정상을 향해서 올라가야 하는 줄무늬 애벌레에겐 다른 애벌레들은 자기 앞을 가로막는 위험이요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다른 애벌레를 밀치며 고생 끝에 정상에 이르지만 그곳에서 절망적인 대화를 듣습니다. “아, 이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구나!” “이 바보야, 조용히 해! 저 밑에서 듣잖아. 저들이 올라오고 싶어 하는 곳에 우리는 와 있는 거야. 여기가 바로 거기야.” 줄무늬 애벌레의 진정한 성공은 남들처럼 기둥을 따라 올라가는 데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번데기라는 변태라는 자기 부인의 과정을 거쳐 나비가 되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좁은 길을 가는 의인들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희망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자신이 좁고 험한 길을 가고 있다면 그 끝에는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좁은 길은 자기 부인의 길입니다. 고등종교와 저등종교를 나누는 기준이 바로 이 자기부인에 있습니다. 불교나 이슬람교, 기독교에는 자기부인의 요소가 있습니다. 예수님 또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의 자기 부인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등 종교는 자기부인의 요소보다는 기복적이며 자기축복만을 요구합니다. 오늘날의 우리 한국기독교는 어떻습니까? 축복과 편안함만을 좋아하지 자기 희생과 부정이 있습니까? 

종교학자들에 의하면 고등종교도 타락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자기부정이 사라지고 축복만을 강조할 때입니다. 종교의 타락현상은 신학교와 신학생이 증가하면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로마제국 흥망사』를 썼던 기번은 로마제국이 망한 이유 중 하나를 성직자 수의 증가에서 찾았습니다. 쓸만한 젊은이들이 앞 다투어 성직자가 되려 하였습니다. 왜요? 그 길이 좋아 보이고 거기에 큰 혜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라면 누가 오겠습니까? 한국교회의 50년, 60년, 70년대 목회자들은 정말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늘 하루 한 끼 걱정을 하며 살았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불과 몇 년 전에만 해도 성미함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목회자들을 위해 성도들이 십시일반으로 성미를 모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학교가 넘쳐나고 경쟁률도 치열합니다. 사람들 눈에는 목회가 제법 괜찮은 직업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신학생이 많아지니 교회도 많아집니다. 교회 간 경쟁이 심해지니까 교회의 설교나 프로그램이 더더욱 축복과 물질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이 되면 위험합니다. 고등종교가 하등종교의 길을 가면 그것은 타락입니다. 이 산상수훈 말씀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5장 1절에서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우리가 무리가 되지 말고 제자가 되라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이는 제자 된 자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오늘날에는 교회 다닌다는 것이 우리 구원의 표지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좁은 길을 가려하는 사람이 진짜 주님의 제자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우리가 어느 길에 서있는가? 우리 스스로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좁은 길

제가 좁은 길로 가라고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좁은 길은 결코 힘든 길만은 아닙니다.  결코 외로운 길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 길을 인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지도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어졌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길도 좁고 험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신합니다. 주님이 앞서 가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한 원주민의 안내를 따라 밀림 속에 있는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안내자가 길은 없고 이상한 곳으로만 인도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초조해진 이 사람이 원주민에게 물었습니다. “여보시오, 도대체 길은 보이지 않고 이상한 곳으로만 인도하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 안내자가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이런 밀림 속에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길은 없습니다. 내가 곧 길입니다. 나를 따라 오시오.”

우리들이 가는 길이 그렇습니다. 명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확신이 있습니다. 주님이 가셨던 길이 옳은 길이란 확신입니다. 주님께서 저 앞서 가시면서 우리를 이끌고 계십니다. 주님은 확실히 생명의 길을 알고 계시며 우리는 우리 두 귀를 세우고 그분이 인도하시는 길로 순종하여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그 길은 좁고 험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안전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목자 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지만 그 길을 가는 양은 안전합니다. 목자의 든든한 지팡이와 막대기가 양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잘 아는 능숙한 목자가 우리를 위험하지 않은 길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 목자를 따라가면 잔잔한 물가로, 푸른 초장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길은 또한 기쁨의 길입니다. 이는 수고하며 높은 산에 오른 등반가의 기쁨입니다. 고생스럽지만 수고하여 얻은 결실이 주는 뿌듯함이나 정상에서 누리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흘리는 눈물은 기쁨의 눈물입니다. 그동안의 땀방울에 대한 보상입니다. 이렇게 얻은 정상의 자리보다 더 큰 만족은 없을 것입니다. 100m 경주에서 우승한 선수는 운동장 트랙을 돌며 마음껏 그 영광을 누립니다. 이런 영광은 좁은 길을 통하여 마침내 영광의 자리에 오른 사람에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경주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좁고 험해 보이지만 그 길 끝에는 생명과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길은 홀로 가는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신앙 선배들이 걸어갔던 길입니다. 우리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는 길입니다.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이 승리와 생명의 길이라는 확신을 놓치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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