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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의 죄 때문인가? (요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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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죄 때문인가? (요 9:1~7)
 
 
제자들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소경 거지를 보고는 예수님에게 그 사람의 불행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자기의 죄나 부모의 죄가 아니라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침으로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소경은 밝은 눈으로 돌아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 세계에 일어나는 불행의 원인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누구 탓인지 책임을 묻고 대책을 세우고 싶은 마음일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인간이 안고 있는 의문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모르고 사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많은 지식과 경륜을 쌓은 사람도 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다고 하였습니다(전 1:18).


1) 알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지식의 욕망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는 공통적인 현상입니다. 어린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무엇이나 의구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왜 아침에는 해가 뜨고 저녁에는 해가 지느냐? 왜 하루에 세 번씩 밥을 먹어야 되느냐? 둥글게 생긴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씩 돈다고 하는데 왜 바닷물은 흩어지지 않고 그대로 있느냐? 이와 같은 의구심에서 시작되는 질문들은 결국 지식의 근원자인 하나님께 이르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지식에 근접하려고 노력했으나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시 139:6).


2) 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는 자연의 법칙이나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예상 밖의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곤 합니다. 그중에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자연계의 법칙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철칙인줄 알지만 이따금씩 거기에 이변이 일어나면서 지구상에는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오기도 합니다. 이럴 때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을 찾으려 애를 쓰게 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대책을 세우려 하지만 용이하지 않습니다. 주권자 하나님의 공의가 지배하는 세상에 왜 정의가 없어지고 불의가 판을 치게 되는지 의구심이 자꾸 생기게 됩니다(호 4:1-2). 공의로우신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하는데 왜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합 1:13).


3)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상대적으로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를 일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기의 의도하시는 목적에 따라 지으셨고 거기에 필요한 만큼 지식과 능력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곧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만능인 것처럼 착각하고 행동하려 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통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임의대로 바꿀 수도 없습니다. 욥기 38:33에 보면 “네가 하늘의 법도를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천체들의 위치를 정해 주시고 그것들이 제 궤도를 돌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그런 일들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사안입니다.


2. 인간의 불행에 대한 문제

‘죄는 지은 대로, 공은 닦은 대로’라는 말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식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에 근거를 둡니다. 데만사람 엘리바스는 욥이 겪고 있는 참혹한 현장을 보며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라고 하였습니다(욥 4:8).

1) 범죄의 후유증입니다.

에덴동산에 마귀가 들어오고 아담과 하와가 거기에 동화된 이후로 인간세계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피조물이 인간을 거부하며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습니다(롬 8:21).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거부하고 그 주권에서 벗어나려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가는 불행한 길을 그대로 방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울타리를 치고 인간의 접근을 막은 이후로(창 3:22-23)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역사 이래 인간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서나 전쟁과 재난, 질병과 죽음의 악순환이 거듭되었고 생명이 붙어있는 동안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야고보서 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고 하였습니다(겔 18:20).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곧바로 에덴동산에서추방되고 하나님과의 사이에 생명적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사실상 영적인 죽음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그것은 평생 사는 동안 숙명적으로 여러 가지 죽음의 요소에 시달리며 온갖 불행과 싸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겪게 되는 질병, 사고, 재난, 죽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요소들은 범죄한 인간을 징치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이며 도구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죄가 있으면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의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책임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갓난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징벌을 받게 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가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봅니다. 

3) 모든 사람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13:1-5에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겪은 두 가지 불행스러운 사건의 내용이 소개되어있습니다. 곧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 제물에 섞은 것과 또 하나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예루살렘 사람 열여덟 명이 치어죽은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사건을 예로 들어 인간세계에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의 유형을 이해시키려 하였습니다. 곧 빌라도와 같은 포악한 권력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이유 없이 억울한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로암 망대처럼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구조물이 붕괴되어 멋모르고 거기 있던 사람들이 치어죽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도 일어납니다. 이와 같은 인재(人災)도 무능한 인간 세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불행임을 일러줍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안전하거나 불행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습니다(히 9:27).


3.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여줍니다.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자는 자기가 당하는 불행으로 인하여 눈물 흘리며 속상해 할 때가 많지만 거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게 됩니다.

1) 하나님은 인간의 불행을 선용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예술가의 손에서는 작품의 소재로 쓰여지는 것처럼 인간 세계에 미치는 좋고 나쁜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손에서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잠언 16:4에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구약시대의 경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우상숭배를 하는 등 범죄행위를 저지를 때, 전쟁과 기근과 온역(염병)과 같은 재난을 통해서 그들을 징치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웃에 있는 이방나라까지도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불행을 징벌의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이 강퍅할 때 열 가지 재앙을 내려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출 10:1-2).

2) 신자에게는 연단과 훈련을 받게 합니다.

인간세상에서 예외 없이 겪게 되는 불행한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이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이며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게 됩니다. 성도가 환난을 당하게 되는 것은 모두다 범죄에 대한 징벌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신자나 불신자를 떠나서 인간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간의 무능을 깨닫게 됩니다. 간혹 불행을 통하여 자기를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허물지고 부족했던 것을 회개하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7:10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경우는 요셉처럼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축복을 수용하게 하기 위한 연단의 과정인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소경의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은 성도의 고난이나 불행까지도 하나님께서 선하신 자기 목적에 부합하도록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고 죽어 장사 지낸바 된 사건을 두고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1:4). 본문 말씀에 나오는 소경 거지의 경우도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눈을 뜨게 된 다음 유대인의 훼방을 무릅쓰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25절). 지난날 불행했던 사람이 예수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살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고 하신 말씀은 성도에게 보장된 축복의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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