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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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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 (눅 7:11~17)


1. 울고 있는 사람들

베이징 올림픽 첫날인 지난 9일 유도 60㎏급에서 금메달을 딴 최민호 선수가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에서부터 시상대에 올라서까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온 국민이 함께 울고 함께 웃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11일 유도 73㎏급 결승전에서 패배한 왕기춘 선수는 퇴장하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갈비뼈 부상의 아쉬움과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또 수영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딴 박태환 선수가 시상대 위에서 활짝 웃고 있을 때 그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수영 대표 팀 감독인 노민상씨였습니다. 그는 선수 시절 올림픽 메달은커녕 국가대표도 지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외국 서적으로 독학을 하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명감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박태환 선수를 통하여 국민의 여망(餘望) 만이 아니라 자신의 한(恨)과 설움까지 떨쳐내었고 그래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승리해서 울고, 패배하여 라커룸으로 들어가면서 고함을 지르면서 억울한 울음을 터뜨리는 선수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울고 있는 사람은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나 그 가족들이나 그들을 지켜보는 국민들만이 아닙니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프린스턴 대학교의 ‘대니얼 카너먼’ 교수는 아주 특별한 실험을 했습니다. 그는 실험 대상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불행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인간의 복지에 대해서, 그것도 한 개인이 주관적으로 자신의 복지를 어떻게 느끼는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카너먼 교수는 이 질문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갑자기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운 이유는 개인의 복지 어쩌고 하는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질문 그대로 겉으로 행복한 척, 겉으로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괴롭고 힘들어 울고 있거나 울고 싶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너먼 교수는 여기서 아주 특별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살아가고 있는가!” 즉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과 사회적 지위, 그리고 체면을 생각하여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감추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속으로 울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가 보기에 여러분은 모두 대한민국 평균치 국민들이기 때문에 이 ‘대니얼 카너먼’ 교수의 결론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여러분들도 대부분 겉으로는 웃고 있거나 표시를 하지 않지만 속으로 괴로워 한숨 쉬고, 울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이렇게 여러 가지 이유와 사연들로 울고 있거나 울고 싶은 우리를 바라보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2. 눈물을 그치게 하시는 주님

1) 나인성의 눈물

예수님은 갈릴리 바닷가에 있는 도시인 가버나움에서 한 백부장의 겸손한 믿음을 보시고 그의 종을 고치신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남쪽으로 약 40km 정도 내려와 나인성이라는 곳을 지나게 되셨습니다. 이 나인성은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비교적 가까운 동네로서,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산동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그 일행이 이 나인성 성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공교롭게도 장례식 행렬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장례 문화를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그에 대한 장례는 한 가정이나 집안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마을 전체의 일로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장례를 돕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선행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하던 일을 전부 다 멈추고 장례에 참여했습니다. 일단 마을에서 장례위원회를 만들어 그들이 장례를 주관하게 했고, 그리고 신명기 21장 23절의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葬事)하여"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고인이 임종(臨終)한지 스물네 시간 안에 장례식을 치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수의를 입힌 후, 우리처럼 관(棺)을 사용하지 않고 갈대로 엮은 들것 위에 시신을 뉘운 채 그대로 매장했습니다. 흙에서 나왔으니 가능한 한 빨리 흙으로 보내주는 것이 고인에 대한 예우라고 여겨 이런 식으로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장례 행렬은 조금 특별한 데가 있었습니다. 장례 위원들과 운구하는 사람들이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어미의 독자요 그 어미는 과부였다고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죽은 사람의 어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잃은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스트레스는 배우자를 잃은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과거 유대 사회에서 남편이 죽은 뒤 홀로 된 여인들은 그 사회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일단 먹고 살 길이 거의 없었고요.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과 가난과 더불어 힘든 싸움을 벌려야 하는 것이 미망인들의 고통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남편을 잃은 후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요? 그렇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녀로 하여금 삶의 그 힘든 현실을 버티어 이기게 만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녀는 아들 때문에 넋을 놓고 있을 수가 없어서 마음을 가다듬고 그 아들에게 희망을 걸고 힘겹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월도 흘러갔고, 그러면서 아들이 자라 제법 어른 티가 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금만 더 힘든 인생살이와 싸우면 아들이 그 모든 수고를 갚아줄 것이라고 기대를 걸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죠.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갑작스럽게 그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병 때문인지, 사고로 인한 것인지, 아님 폭행이나 어떤 재난으로 인한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짐작하기는 부정한 것을 멀리하는 유대 전통에 따르면, 지금 마을 단위의 장례 위원회가 이 일을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살인을 당했거나 어떤 재난에 의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질병으로 인하여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들의 죽음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 어머니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그 아들이 완전히 다 자라 청년이 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조혼(早婚) 풍습으로 볼 때, 이 아들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아직 20세 미만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이제 그 여인의 고생이 끝나가는 것 같은 상황이 되었는데, 난데없이 그 아들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녀의 유일한 희망, 그 슬프고 고달픈 생애를 버티게 해주었던 기둥 같던 아들이 갑자기 죽어버렸습니다. 남편 죽은 이후로 겨우 눈물샘이 마를까 했는데,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습니까? 지지로도 복이 없지요. 남편 일찍 보내고 아들마저 보내니, 우리나라 사람들 같으면 이런 여인에게 뭐라고 했겠습니까? ‘남편 잡아먹고 아들 잡아먹는 여자’라는 소리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슬픔을 당하면 진짜로 스스로도 자신이 그렇게 여겨진다고 합니다.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정,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고, 아니 아예 그 시신과 함께 묻히고 싶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인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울다가 죽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슬픈 장례식 행렬이 나인 성을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그 어머니가 서고, 그 뒤에 시신을 멘 사람들이 따르고, 그리고 그 뒤를 호곡꾼들이 피리를 불고 곡을 하며 따랐고, 마지막으로 전 마을 사람들이 함께 슬퍼하면서 무덤으로 파 둔 동굴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여인과 마을 사람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또 하나의 행렬이 그들을 마주보고서 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었습니다.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주님이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거기에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은 이 슬프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길한 행렬을 비켜갔을까요? 이 죽음의 행렬을 보신 예수님은 그냥 애도의 목례만 하셨을까요? 일정이 바쁘시기 때문에 얼른 지나쳤을까요? 예수님은 이 장례 행렬과 그 중심에 있는 과부를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과부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여인아, 네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느냐! 네 가슴이 얼마나 찢어질까! 아들을 바라보면서 살아온 날들이 얼마나 후회스럽겠느냐! 이제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얼마나 두렵겠느냐! 너의 신세와 인생이 얼마나 한스럽고 절망스러울까!’ 주님은 이런 마음으로 장례 행렬과 그 여인에게로 다가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울지 말라”는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그 어감이 다른 말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울지 마세요’라고 했다고 칩시다. 듣는 사람으로서는 ‘그럼 어쩌란 말인데,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을까? 아님 내가 뭘 할까?’ 이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 “울지 말라” 하실 때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여인아, 내가 너의 슬픔을 없애 주겠다, 네가 울지 않도록 해주마’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과부의 아들의 시신을 싸고 있는 천 위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시신에게 말을 건 겁니다. 이미 죽어 무덤에 묻으러 가는 시신에게 마치 잠자고 있는 사람을 깨우듯이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예수님이 명령하시니 죽었던 청년이 정말로 일어나 앉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상황,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할렐루야!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예수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신 주님께서 죽은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했고, 그 명령대로 청년이 일어나 앉은 후에는 말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울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달리 할 말이 없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과부가 울 원인이 사라졌고, 그녀의 눈물은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흐르는 눈물만 닦아주는 것이 아니라 눈물 흘릴 근원을 없애 주셨습니다.

2) 지금도 울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요, 여러분! 오늘 본문은 나인 성을 소개하면서 그냥 ‘나인성’이라고 하지 않고 “나인이라는 성”이라고 그 성의 이름에다가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나인성의 이 “나인”이란 말은 히브리어 “나아”에서 온 말로서 본래 의미는 '편하다', '즐겁다',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명사형으로 '가정', '목장', ‘즐거운 곳’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여러분, 왜 누가는 이러한 뜻을 가진 나인성의 이름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나인성에서 일어난 오늘의 사건은 나인성에서 일어났다는 것만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진리를 나타내실 때 자주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는, 즉 본문의 사건만이 아니라 그 지명까지도 비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겉으로 보면, 정말 이 “나인”이라는 말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TV의 프로그램들이 전부다 웃기는 이야기로 가득 하고, 드라마에도 웃기는 조연이 있어야 성공하고, 명강사도 웃기는 사람, 훌륭한 목사도 웃기는 목사여야 하는 세상입니다. 그야말로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는 것 같은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웃음과 유머의 과잉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나인이라는 성”이라고 하면서 비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인이라는 성의 이름은 ‘즐겁고 행복한 도시’이나 그 성의 입구에서부터 만나는 것은 ‘슬픔’이더라는 것이죠. 그 성의 입구에서부터 ‘인생의 한숨과 괴로움과 눈물’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여러분의 주변, 그리고 여러분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서론에서 말씀드린 ‘대니얼 카너먼’ 교수가 발견한 진리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오늘 여러분의 현실이 바로 “나인”이라는 것입니다. 나인 성에 살고 있는 여러분에게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정말 즐거워?’ ‘너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과연 즐거움으로만 가득 차 있니?’ ‘정말 행복해?’ 


3. 눈물을 닦아 주시는 주님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오늘날의 나인성에 살고 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나인 성으로 우리 주님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힘들고 어렵고 괴롭고 슬픈 것을 감추고 살아가는 바로 그 자리로 주님이 오셔서 “이제 됐다. 네 수고와 괴로움과 슬픔은 지난 날로 충분하다. 이제부터 내가 너를 즐겁게 만들어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에 젊어서 남편을 잃은 한 부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 얼마 되지 않는 유산으로 살고 있었는데, 그것이 금방 바닥이 났습니다. 더 이상 남은 돈이 없었고 식량도 다 떨어졌고, 아이들에게 줄 음식과 옷을 마련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통에는 겨우 밀가루 한 줌 남았을 뿐이었습니다. 부인은 배고프다고 아우성인 어린 것들에게 빵을 만들어주려고 밀가루 통 바닥까지 박박 긁으면서 가루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별 수 있습니까? 바닥을 긁던 그녀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서 울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이런 모습을 보고 있던 작은 아들이 엄마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습니다. 부인은 당황하여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아들이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왜 우세요? 하나님께서 엄마가 통 밑바닥을 긁어모으는 소리를 못 들으실까봐서요?” 이 순간 부인의 흐려져가는 믿음이 되살아났습니다. 어린 아들이 무엇을 일깨워주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녀의 어렵고 힘든 것을 보고 듣고 다 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우는 이유를 다 아실 것이고, 따라서 그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경기도 안산의 안산제일교회 고훈 목사님의 전도사 시절 이야기입니다. 당시 산골 마을의 작은 교회 전도사로 섬기고 있던 목사님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어느 겨울날, 임신 8개월 된 사모님과 금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금식하기로 한 이유는 먹을 것이 없어서였습니다. 금식이 아니라 굶식이었지요. 금식을 하면서도 당시 고전도사님은 뱃속의 아이와 사모님을 굶게 하는 것 때문에 가장으로서 그 가슴이 너무나 쓰라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혹한의 밤 11시, 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궁금해서 나가보니 대문 앞에 쌀 한 말과 땔나무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밥을 지어 밥상을 차려놓고 앉으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내 잔에 넘치옵니다.” 전도사님 부부는 밥상 앞에서 서로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고훈 목사님은 지금도 누가 쌀과 땔감을 놓고 갔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단지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지요. 그러나 그때 깨달은 말씀이 지금도 가슴에 사무친다고 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그 백성들의 눈물을 보시고 아시고 해결하셔서 그 눈물을 멎게 하시고 울음자국이 선명한 그 눈가와 얼굴을 닦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요한계시록 7장 16, 17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자 약속의 말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의 슬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괴로워하거나 울고 있는 여러분들을 보시면서 마음 아파하시고, 여러분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여러분의 힘들고 어려운 것을 다 지나가게 하시고, 기쁘고 행복한 것으로 채워 여러분의 삶의 현장이 진정한 “나인”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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