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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점점 악화되는 이스라엘 (삿 2:6 ~ 삿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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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악화되는 이스라엘 (삿 2:6 ~ 삿 3:6) 
 

본문은 사사 시대의 전반적인 영적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은 세대가 지날수록 죄를 범하는 정도가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7절을 보면,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여호수아 세대는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은 다음 세대에 잘 계승되지 못했습니다. 9절을 보면,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전쟁 통이라 하루하루 생존에 급급하다보니 신앙 교육에 미쳐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느라 자녀의 신앙 교육은 소홀히 하는 이 시대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지요.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서서히 진행되었습니다. 그 첫 단계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알지 못함’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무관심했음과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한 삶을 시작했음에 연결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었음과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지 않은 삶을 시작했음에 연결됩니다. ‘알지 못함’은 그들의 머리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11-15절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삶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묘사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겼습니다.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주변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했습니다. 그 삶은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만들었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약탈당하게 하셨고 주변 대적의 손에 파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도무지 대적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그들의 괴로움이 심했습니다. 신명기 28장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은 죄의 시작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삶은 결국 어디를 가든지 재앙을 만나는 삶으로 끝납니다.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스다롯”(13) 숭배에 빠졌던 것은 하나님이 싫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들이 처한 현실적인 필요에 좀 더 민감했을 뿐이었습니다. 광야 유목민족으로 살던 사람들이 농경사회에 정착했을 때 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농경문화에는 베테랑인 가나안 사람들이 풍성한 소출을 얻는데 비해서 산지를 개간하며 사는 그들은 소출도 적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가나안은 쫓아내어야 할 대적이지만, ‘풍요로운 삶’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가나안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표본이었고, 그들의 문화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처럼 좀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이 그들의 새로운 소망이 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섬긴 우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있어서 ‘바알’은 구름과 폭풍과 비를 주관하는 신이며, ‘아스다롯은’ 전쟁과 다산을 주관하는 신이었습니다. 농경사회에 꼭 필요하지만 사람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요소들을 제공하는 존재인 셈이지요. 가나안 사람들은 부부의 결합을 통해 자식이 태어나는 것처럼 바알과 아스다롯의 결합이 땅의 소출을 가져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우상숭배 식후행사로 성적파티가 이어졌던 것은 두 신을 자극하여 결합시켜서 좀 더 많은 소출을 얻으려는 목적이 있었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던 것은 보다 풍성한 소출을 통해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시대가 변하거나 환경이 변하면 우상의 모습도 변합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우상을 섬기는 사람의 마음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사명보다는 풍요로운 삶에 소망을 두고 사는 태도,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보다 세상을 부러워하는 태도가 그의 마음에 있습니다. 오늘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교인들은 없겠지요. 하지만 풍요로운 삶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삶을 추구하는 교인들은 적지 않아 보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바알과 아스다롯’은 ‘돈과 쾌락’이라는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만일 마음에서 하나님을 잘 알고자 하는 소망이 없다면, 그는 이 땅에서의 풍요로운 삶, 혹은 보다 여유로운 삶에 소망을 두고 살기 쉬울 것입니다. 소망이 변하면 사랑과 믿음도 변합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겠지요. 하나님의 사명과 뜻을 위해서 돈을 희생하기보다는 돈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명과 뜻을 희생시킬 것입니다. 자신과 가족의 풍성하고 여유로운 삶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재정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아끼고 인색할 것입니다. 그렇게 재정에 민감해지는 까닭은 현실적으로 하나님보다 돈의 힘을 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지만, 돈을 잃는 것은 전부 잃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렸던 여호수아 이후 “다른 세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사기는 ‘범죄-진노-압제-부르짖음-구원-재범죄’의 현상이 반복되면서 이전 상황보다 더 나빠지는 구조로 진행됩니다. 그러한 현상의 모델이 16-19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재앙을 만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세워 구원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구원해줄만한 뭔가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구원은 대적에게 압박과 괴로움을 당하면서 슬피 부르짖는 것을 애석해하신 하나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나선형 계단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처럼 계속 추락하던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은 마침내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 사이에 거하여 그들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며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3:5-6).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어떠하심을 잘 드러내어야 할 이스라엘 사람들 우상의 백성들과 똑같아졌습니다. 소망의 대상이나 사랑의 대상이나 신뢰의 대상에 차이가 없어졌습니다. 교회 공동체나 세상 공동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게 된 셈입니다. 가나안 문화가 이스라엘 문화를 잠식했고, 택한 백성의 삶은 가나안 사람들의 삶에 동화되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택하신 백성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모두 상실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으면서도, 세상 문화를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삶을 산다면 그에게 돌아올 것은 하나님의 진노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해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다”(20)는 진단을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때뿐이었습니다. 회초리를 들 때만 조용해지는 말썽꾸러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들을 뿐 마음에 새기지 않았습니다. 재앙을 만나 고통스러울 때면 하나님께 부르짖었지만, 그러한 재앙이 닥친 원인을 말씀에 비추어 진지하게 성찰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돌이키지 않고 그저 피상적으로 회개하며 재앙을 피할 뿐이었습니다. 주일에 말씀을 듣는 것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 주일을 참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살기 위한 출발이어야 합니다. 주일말씀을 들을 때면 하나님 백성으로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숙연해지는 것 같다가도, 교회를 나서는 순간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옛 생활로 돌아간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는 사람이라 진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청종치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21-22절을 보십시오.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 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 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 열국을 남겨두신 이유는 3장 1-2절에서 좀 더 보충됩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열국”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땅히 싸워야 할 자와 싸우지 않았습니다. 대적해야 할 자들과 사이좋게 더불어 지냈습니다.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가진 사람들에게 외적인 평화까지 주어진다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외적인 평화를 박탈하셨습니다. 항상 위기와 불안과 긴장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이는 전쟁을 통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사람들의 문화와 신들에 대해 적대 관계에 있고 구별되어 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시험은 재판관이 죄인에게 내린 형벌과 같은 성격이 아니라 아버지가 비뚤어진 자식을 바로잡기 위해 회초리를 대는 것과 같은 징계였습니다.

사사 시대는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그 백성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필요를 채워주시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 형태로 시작했었습니다. 각자가 하나님 말씀에 준행하기만 한다면 그 사회는 각인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몸같이 연합될 수 있었습니다. 풍요롭고 여유로운 삶은 자연스럽게 따라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순종은 가장 이상적인 사회 속에서 불안과 긴장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상태가 되게끔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조차 사람으로 불안에 떨게 했던 것이 불순종이었습니다.

나의 소망과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점검하면서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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