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삼가 잊지 말라 (신 8:11~20)

  • 잡초 잡초
  • 274
  • 0

첨부 1


삼가 잊지 말라 (신 8:11~20)


여러분,
이 시간 설교 본문의 첫 절은 '주 너희의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라는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렇지만, 이 구절을 히브리어 본문으로 보면 '삼가라'라는 말이 맨 처음에 나오고 그 다음에 '잊지 않도록'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시간 설교의 제목을 '삼가 잊지 말라'로 잡아 보았습니다. 

본문에서 '삼가 잊지 말라'고 부탁하는 사람은 모세이고, 그런 부탁을 받는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신명기에는 애굽 종살이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이 오랜 광야 생활을 한 끝에 요단 동쪽 모압 땅에 이르러 요단 강 건너쪽 약속의 땅을 코 앞에 바라보게 되었을 때 모세가 그 땅에 들어갈 새 세대에게 마지막으로 권고하는 말들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출애굽 제2세대에게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삼가 잊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다뇨?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본문은 여호와를 잊어버린다는 표현을 14절과 19절에서 두 번이나 더 씀으로써 똑똑히 말합니다. 
어찌해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본문 12절 이하에서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지라도, 또 너희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너희의 재산이 늘어날지라도,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

또 17절을 보십시다.

너희가 마음 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을 받아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살며 많은 재산을 지니고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면 그만 제가 잘나서 그리된 줄 알고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잘 살게 해 주셨는데도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이런 부를 이루었다고 잘못 생각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본문 19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일이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신들을 따르게 되고 마침내는 망할 것이라 합니다.
나중에 전개된 역사를 보면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본문과 같은 경고의 말씀은 그 뒤로도 끊임없이 하셨는데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리고 가나안의 신들을 섬기게 됩니다. 이들은 바알 같은 가나안의 신들이 생산을 보장해 준다고 믿고 그것들 앞에 제사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백성일지라도 하나님 은혜로 잘 살게 되면 그렇게 잘 살게 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다가 망해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는 이 시간 본문의 첫째 교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 시간 우리도 그동안 잘 살게 되자 그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른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다가 망할 처지에 이르지 않았나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97년 12월부터 우리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 '경제를 살립시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나라 살림이 거의 거덜나서, 우리 이웃에 일터를 잃은 사람들의 수가 수백만에 이르렀으니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으로, 이런 말은 문제의 근본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문제의 근본은 경제가 죽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모두들 경제를 하나님처럼 알고 섬기다 보니, 잘 살려고만 하다 보니, 그만 그 욕심 때문에 나라를 망치고 만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었다고 정부에서도 노래하고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포함하여 일반 백성들도 그런 줄 알고 살면서 경제적으로 더 나은 생활만 추구하다 보니 그만 그 놈의 경제에 발목이 잡힌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만 다시 살려 놓으면 또 그전처럼 뽐내고 좋아하다가 다시 망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경제가 엉망이 된 것은 사욕에 눈이 어두워 나라를 그르친 정치 경제 지도자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예수 믿는다는 우리들조차 하나님을 그만 잊어버린 탓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본문의 표현대로 한다면,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 살'며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재산이 늘어나'게 되자 그만 우리 마음이 높아져서 우리 하나님을 뒷자리로 밀어낸 듯 합니다. 우리의 능과 우리 손의 힘으로, 곧 우리가 열심히 기도드리고 부지런히 예배드려서, 정신없이 일해서 이런 복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열심, 그런 부지런함조차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 버린 듯합니다.  

그동안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비기독교인들온 또 그들 나름대로 그야말로 온국민이 피땀흘려 일한 결과 우리 남한 사회와 교회가 크게 부흥 발전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만, 가만히 따져 보면 이는 오로지 우리 겨레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 은혜일 따름인데, 남들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하면 듣기 좋아하고 스스로 우리는 대단한 민족이다, 우리 한국 교회는 정말 훌륭한 교회이다라는 식으로 그만 스스로 우쭐하여 자만심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했던 것이 아닙니까?

 더 나아가서 지난날 생산의 신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사회처럼 오늘의 교회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사는 이 사회도  생산을 중시하는 사회입니다. 그리하여 무엇이든 그저 많이 만들어내기만 하면 좋아합니다. 하나님조차도 바로 이런 생산을 위해 필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야말로 현대판 바알 신앙입니다. 
오늘 경제 위기를 맞이한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인들과 기독교회들이 먼저 되찾고 되살려야 할 것은 경제가 아니라 우리가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아주 잊어버린 것을 아니지만 거의 잊어버리고 있는 하나님만을 다시 하나님으로 모시고 받들고 섬기는 신앙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많은 생산과 번영이 아니라, 그런 모든 것을 우리에게 언제라도 주실 수 있고 또한 빼앗아가실 수도 있는 하나님 자체입니다. 

하박국 3장17-19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 우리에 양이 없고 /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주 하나님이 나의 힘이시기에 내게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라도 나는 그 구원의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노라 - 이런 신앙의 정신을 되찾아야 우리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이 세계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잘 살게 되었다고 하는 지난 일이십년 동안에 실제로 우리 속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있지 않았는지, 그 대신 우리의 편한 생활, 부유한 경제 생활을 하나님처럼 받들고 있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심각하게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안동에 사시는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님이 쓰신 우리들의 하느님'이란 글 가운데 얼마를 읽어 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세례를 받은 지도 30년이나 되고, 집사라는 직책을 받은 것도 비슷한 햇수가 되는데도 한번도 만족한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다. 참으로 이름 그대로 돌예수꾼이었다. 다만 내가 예배당 문간방에 살면서 새벽종을 울리던 때가 진짜 하느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특히 추운 겨울날 캄캄한 새벽에 종줄을 잡아당기며 유난히 빛나는 별빛을 바라보는 상쾌한 기분은 지금도 그리워진다. 1960년대만 해도 농촌교회의 새벽기도는 소박하고 아름다웠다. 전깃불도 없고 석유 램프불을 켜놓고 차가운 마루바닥에 꿇어앉아 조용히 기도했던 기억은 성스럽기까지 했다.

교인들은 모두 가난하고 슬픈 사연들을 지니고 있어 가식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그 중에 6 25때 남편을 잃고 외딸 하나 데리고 살던 김 아무개 집사님의 찬송가 소리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애절했다. 새벽기도 시간이면 제일 늦게까지 남아서 부르던 <고요한 바다로> 찬송가는 그분의 전속곡이었다. 마지막 4절의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
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줍소서.

하면서 흐느끼던 모습은 보는 사람들을 숙연하게 했다. 가난한 사람의 행복은 이렇게 욕심없는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기도가 끝나 모두 돌아가고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비출 때, 교회 안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마루바닥에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고 그 눈물은 모두가 얼어 있었다.

60년대는 참 가난했다. 그러나 그때의 교회는 따뜻한 정이 있었다. 당시의 교회 회계장부를 들춰보면 누가 몇백원 빌려갔다가 언제 갚았다는 기록이 종종 보인다. 어려운 교인들에게 교회재정에서 꾸어주고 되돌려받기도 했던 것이다. 가난한 전도사님의 사례금은 말할 나위 없이 부족했고 심지어는 좁쌀 한말, 쌀 몇되가 전부일 때도 있었다.

전도사님은 손수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때고, 무너진 교회담장을 쌓기도 하고 우물을 손수 팠다. 으례 그렇게 하는 것이 상례였고, 그래서 교인들과 훨씬 인간적으로 사귈 수 있었다. 청년들은 밤마다 교회 문간방에 모여 가마니도 치고 책읽기도 했다. 밤늦도록 일하다가 고구마를 삶아먹기도 하고 날무우를 깎아 먹기도 했다.

예배시간에 헌금 봉투에 이름을 적어 바치는 그런 외식적인 것도 없었고, 오히려 남에게 알려질까봐 부끄러워했다. 물질이 풍족하지 못해 거의가 몸으로 봉사했고 마음으로 정을 나눴다. 이래서 그때의 기독교는 우리 한국민의 정서를 크게 다치지 않고 소리없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도 가끔 이야기하지만, 샛돌이라는 마을은 50여호가 살고 있는 산골 외딴 곳이다. 교회가 들어온 지 백년이 가까웠는데, 60년대까지만 해도 그 마을 전체가 지상천국이었다...

어쨌든 교회는 70년대에 들면서 갑자기 권위주의, 물질만능주의, 거기다 신비주의까지 밀려와서 인간상실의 역할을 단단히 했다. 조용히 가슴으로 하던 기도는 큰 소리로 미친듯이 떠들어야 했고, 장로와 집사도 직분이 아니라 명예가 되고 계급이 되고 권력이 되었다.

같은 목사님인데도 큰 교회 목사님과 작은 교회 목사님에 대한 차별이 생기고, 도시교회 목사님과 농촌교회 목사님에 대한 인격적인 차이까지 생겼다. 인간차별은 평신도들까지도 서먹서먹하게 만들었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인사를 해도 마음을 느러내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어졌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믿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이용하여 출세와 권력과 돈을 얻으려 하고,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의 믿음의 전부가 되었다. 예수 믿어 삼년 안에 부자 못되면 그건 문제교인이 된다.

여러분, 이 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무튼,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삼가 잊지 말라'고 한 본문 말씀은 또한 지난날 주 하나님이 지난날 이스라엘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뜻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14절 하반절부터 16절까지를 읽어 보십시다.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너희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주께서는 넓고 황량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 물이 없는 사막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주시고, 차돌 바위에서 샘물이 나게 하신 분이시다. 광야에서는 너희의 조상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너희에게 먹이셨다. 이것이 다 너희를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나중에 너희가 잘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지난날 이스라엘이 경험한 출애굽 사건과 광야 생활에 대해 말하면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 덕분이었음을 밝힙니다.

신명기를 비롯하여 구약 성경 곳곳에서는 출애굽 사건을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뽑으시고 먼저 사랑하신 증거라고 말합니다. 특히 신명기 7장6-8절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애굽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똑똑히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지나오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오로지 하나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게 하시고, 광야에서 만나를 먹게 하셨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어찌해 볼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살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루 하루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살 수 없는 상황을 겪게 하심으로써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뜻을 나중에 가나안 땅에서 잘 살게 된 이스라엘은 저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본문의 둘째 교훈을 깨닫습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도 지난날 하나님이 우리 한국 교회와 사회에 베풀어주신 사랑과 구원을 기억하면서 우리 마음을 낮추어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다시 다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신교로 치면 백여년 전에, 천주교로 치면 이백여년 전에 우리 겨레로 하여금 복음을 듣게 하신 하나님은 그 후 일제 시대와 해방 직후의 혼란과 육이오 사변과 이런 저런 온갖 정변을 거쳐 오게 하셨습니다. 이런 역사는 그야말로 우리 겨레의 출애굽이요 광야 생활이라 할 만 합니다. 그런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우리는 특히 남한의 기독교회와 사회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십년의 광야 생활을 끝낸 이스라엘이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 땅에 막 들어서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도 이른바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스라엘과 달리 우리는 아직 우리의 '물질적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지금까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놀랍도록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 대신 경제를, 편리한 삶을, 물질적인 풍요를, 성장과 부흥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삼아버린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난날 우리 겨레의 뼈아픈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르치시고자 했던 바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와 한국 사회는 제 홀로서는 하루도 목숨을 제대로 부지할 수 없으니 마음을 낮추고 그저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리하여 본문이 들어 있는 신명기 8장2-3절의 말씀을 새롭게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여라. 그렇게 오랫동안 너희를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너희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주께서 너희를 낮추시고 굶기시다가, 너희도 알지 못하고 너희의 조상도 알지 못하는 만나를 먹이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시려는 것이었다.

이 마지막 말씀은 사십 일동안 광야에서 주리신 예수님 앞에 마귀가 나타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고 꾈 때 그를 물리치는 말씀으로 예수님이 이끌어 쓰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마귀는 우리더러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이 돌들을 빵으로 만들어 보아라', '너희가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경제를 살려 온 겨레를 살려 보아라'고 말하는지 모릅니다. 이럴 때 우리가 대답할 바는 분명합니다 - '우리 겨레는 먹는 것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노라', '우리 겨레는 경제로만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말씀으로 살릴 수 있느니라'.

이리하여 '삼가 잊지 말라'는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는 뜻이 됩니다. 본문 11절의 표현대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이 삼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않으려면, 지난날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으려면, 이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해 주는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명령과 법도 규례'라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셋째 교훈에 다달았습니다. 다름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삼가 하나님을 잊지 않고, 지난날 하나님의 은혜 베푸신 뜻을 잊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잘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성경 전체가 아주 구체적으로 알려 주고 있습니다. 시간이 모자라서 지금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특히 신명기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올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 올바른 공직 제도를 유지하는 것, 이웃, 특히 어려운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을 뜻합니다.  

'삼가 잊지 말라' - 여러분, 이제 우리는 지금의 경제 위기가 오히려 우리 자신을 낮추고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여 행복한 교회와 겨레와 세상을 맛보게 하려고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로 알고, 이제까지 경제적인 번영을 하나님으로 섬긴 우리 교회와 사회의 잘못을 고쳐 앞으로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하나님만 하나님으로 섬기기를 다시 한번 굳게 다짐하십시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을 삼가 잊지 마십시다.


기도드리십시다.

'하나님, 저희가 이 세상 사는 동안 잘 살든지 못 살든지 하나님을 삼가 잊지 말게 하옵소서. 그리하고자 굳게 결심하오니 하나님이 한결같으신 사랑 가운데 저희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겨레와 이 세상을 살려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