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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애물을 뛰어넘어라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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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물을 뛰어넘어라 (마 15:21~28) 


  무더운 여름에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래도 어제는 멋진 승전보가 베이징에서 날아왔기 때문에 더위가 한층 꺾인 것 같습니다. 최민호 선수가 60kg급 유도에서 금메달을 따고 한국을 종합순위 3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우리는 10위가 목표인데 시작하는 날 은메달 하나와 금메달 하나를 따서 종합순위 3위입니다. 그 3위가 좀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민호 선수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던 선수입니다. 그는 아마 열심히 훈련을 했고, 이번에 금메달에 쾌거를 우리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또 하나 반가운 사실은 그는 태릉선수촌 교회의 출석하는 성도이기도 합니다. 그는 금메달이 확정되었을 때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손을 부여잡고 기도 세리모니를 올리는 것을 여러분이 보셨을 겁니다. 정말 훌륭한 선수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가 이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서는 5개의 장애물을 넘어야만 했습니다. 32강에서 승리해야 하고, 16강에서, 8강에서, 그리고 준결승에서, 결승에서. 그가 예고했던 대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인 오스트리아의 파이셔라는 선수를 만나서 업어치기 한판으로 승부를 결정짓고 말았습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승리였습니다. 만약 그가 그 많은 장애물들을 훌륭하게 뛰어넘지 못했더라면 이 기쁨을 우리에게 안겨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도 장애물 경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나 일생을 살아가면서,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수많은 장애물 앞에 부딪히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장애물들을 훌륭하게 뛰어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장애물 앞에서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주저앉아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인생을 포기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 장애물을 슬기롭게 뛰어넘고 극복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서 칭찬과 면류관을 얻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들이 인생의 싸움에서, 신앙의 연단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놓인 극복하는 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50년 목회사역을 하고 은퇴하신 세계 최대의 교회를 목회한 조용기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50년 동안 사역하면서 내게 많은 유혹이 있었습니다. 마치 그것은 장애물 경기와도 같았습니다. 죄의 유혹, 세상의 유혹, 질병, 고통, 시련, 가난, 좌절 이런 장애물들을 그가 뛰어넘지 않았더라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그것을 뛰어넘지 않았더라면 오늘 그는 이렇게 명예스러운 은퇴를 할 수 없었다고”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건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수많은 장애물들을 뛰어넘지 않으면 우린 내일의 승리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수많은 장애물 앞에 서 있는 한 여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성경에 소개되지 않습니다. 두로와 시돈 지방에 거하는 가난한 여인, 혹은 다른 번역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이라고 소개될 뿐입니다. 이 여인은 아주 심각한 질병에 고통당하는 자기 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녀가 예수님께 부르짖은 첫 마디가 있습니다. “주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내 딸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녀가 아주 흉악한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상외의 엄청난 장애물 앞에 부딪히게 됩니다. 예수님은 “오! 그렇구나. 내가 너의 딸의 병을 고쳐주지.” “너 딸에게서 귀신을 내어쫒지.”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보니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 여인을 배척했습니다. 이 안타까운 상황 속에서 과연 이 여인은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에 감동을 드리고, 그 딸의 질병을 치료받고, 예수님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이 놀라운 축복을 받고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오늘 성경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22절~23절 말씀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이 여인은 생각지도 못했던 장애물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장애물은 예수님의 침묵입니다. 응답이 없었습니다. 한 말씀도 대답지 않았습니다. 답답합니다. 우리도 기도에 응답이 없으면 답답합니다. 두 번째 장애물은 제자들의 배척입니다. 이 여자가 자꾸 소리 지르니까 귀찮았습니다. “예수님! 그냥 보내세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여인은 따듯하게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을 배척했습니다. 거부했습니다. 여러분! 누구에게 배척당해보신 적 있으십니까? 여러분! 누구에게 거부당해 보신 적 있습니까? 전혀 거부하리라고, 배척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했을 때 그 고통과 실망이 얼마나 컸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여인을 거절했습니다. “그냥 보내소서. 시끄러워 죽겠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인종적인 모멸감도 당했습니다. 오늘 2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다시 말하면 “나는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을 위해 왔지, 너와 같은 이방인을 위해서는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이렇게 사람을 차별하실 수가 있나? 그 사랑 많으신 예수님이 이방인 여인이라고 나를 멸시하시다니...’ 여인도 아마 놀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거기 인격적인 모독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여인은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부탁할 때 예수님께서 마지막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6절입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참 놀라운 선언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짐승 이 돼지와 개입니다. 사람을 폄하할 때는 개라고 이야기 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생각했습니다. 개처럼 취급했습니다. 여러분! 요즘 집에서 보는 비싼 애완견, 사랑스러운 개가 아닙니다. 길에 지나다니는 들개들, 주인도 없는, 온 몸에 헌데가 나 있고, 엉망인, 보기 싫은 들개들, 아주 가치 없는 개들, 그런 개로 이 여인을 감히 예수님이 폄하하고 계십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누가 만약 여러분에게 “당신은 개”라고 한다면 화 안 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존심에 상처를 받게 됩니다. 참다 참다가도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면 분통이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인도 이제 포기할 만합니다. 그런데 여인은 여기서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합니다. 사랑 많으신 예수님이 왜 이 불쌍한 이방 여인에게 냉대하셨을까? 왜 그녀를 거부하셨고, 왜 그녀를 유대인 입장에서 이방인 개라고까지 표현하셨을까요? 그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육적인 입장에서 그렇게 했을 겁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여인의 믿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 여인의 믿음을 소개하기 위해서, 이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여인 앞에 많은 장애물을 놓으셨습니다. 의도적인 계획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봐라! 이 여인은 이방인이지만 이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위대하냐? 얼마나 아름다우냐? 너희도 좀 보고 배워라!” 하는 이유에서 이 여인에게 이런 냉대를 하셨다고 생각이 됩니다.

또 한 가지는 이 여인의 간절함을 보고 싶으셔셔, 정말 이 여인이 딸의 문제를 가지고 간절히 주님 앞에 매달리는가를 예수님은 보고 싶으셔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냉담하게 거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이 여인은 조금도 뒷걸음질 치지 않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마음에 감동을 드리고 목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고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그 즉시로 딸의 병이 나았습니다. 할렐루야! 여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이 여인이 정말 어떻게 장애물을 뛰어넘고 승리할 수 있었을까? 어떤 조건 때문이었을까요?

첫째는 주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전적으로 주님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여러분! 한 번, 두 번 주님께 요청했는데 주님이 거부할 때, 이 여인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적어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신뢰할만한 분이었습니다. 그 분은 믿어도 좋은 분이었습니다. 여인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끝까지 예수님 앞에 간청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 예수님과 그 어머니 마리아가 초대받았습니다. 잔치 중간에 포도주가 다 떨어져서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와서 예수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여! 이제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여자여!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 했습니다.” 이것은 거절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요구를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예수님이 반듯이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그녀는 종들에게 말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행하라” 결국 예수님도 이 어머니의 요청 앞에 손들고 빈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고 “그 물을 떠다주어라” 했더니 그 물이 포도주가 되어서 잔치집이 더 흥겨운 잔치집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여인도 예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믿음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뒷걸음질 치지 않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신앙생활의 딜레마가 무엇입니까?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번 기도하고, 두 번 기도하고, 세 번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상황이 나아지지 않습니다. 그 때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이 내 기도를 듣기나 하시나?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이런 의심을 갖게 됩니다. 시편에는 이런 탄식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시편 13편에 보니까 “여호와여 어느 때 까지나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여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이 시편 기자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찾아도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불의한 자는 잘 되는데, 의인은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그러나 오늘 이 여인은 주님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아니 주님이 반듯이 응답하시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장애물을 뛰어넘고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몇 일전 신문에 보니까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인터뷰를 했는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본인은 평안남도 맹상군이라는 곳에서 출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평양에서 주로 성장하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아버님이 맹상군 어느 면의 면장이셨는데 누가 와가지고 아버지를 꼬드겼습니다. “면장 그만두고 광산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그래서 귀가 얇은 아버지가 면장을 그만두고 광산업을 하다가 쫄딱 망했습니다. 온 집안이 깡통을 차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해서 자녀들을 키웁니다. 김동길 교수의 누나가 김옥길 총장입니다. 그때는 좀 컸었나봅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어려운데 왜 그 딸을 그냥 두냐고? 걔를 공장에 보내서 돈을 좀 벌어오게 하던지, 기생 일을 시키지 왜 그냥 두냐고” 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 누나를 공장에 보내는 대신, 기생에 보내는 대신 이화여전에 보냈습니다. 이화여전에 가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중에 이화여대 총장이 되고, 문교부 장관이 되는 겁니다. 

참 김동길 교수는 아주 감명 깊게 그것을 소개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그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왔는데 정말 가난을 이기고 오늘이 있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딛고 왔는데 그가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당신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십시오. “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 위대한 고백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 나의 구원자이심을, 하나님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그는 이 분명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이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어디서 왔을까요? 그의 어머니로부터입니다. 어머니가 가난하니까 늘 삯바느질을 하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이 495장을 어머니가 늘 부르면서 삯바느질을 했는데 자기 머릿속에 그것이 꽉 박혔습니다. 어머니가 물려준 믿음 가운데서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장애와 시련 앞에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시고 그분을 전적으로 믿음의 구주로 신뢰하고 믿는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장애물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장애물을 뛰어넘고 반드시 승리의 자리에 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에 대한 신뢰,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장애물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여인이 장애물을 뛰어넘고 소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장애물을 넘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한번 따라해 보십시오. “장애물을 넘으면 더 좋은 결과가 있음을 확신했다” 장애물은 곧 시련과 역경입니다. 시련과 연단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이 고비를 넘기면 더 좋은 일이 준비되어 있음을 이 여인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장애물 앞에서 주저앉지 않은 것입니다. 

욥기 13장에 보니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라” 우리에게 주는 시련과 역경, 장애물은 우리를 연단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 후에 하나님의 계획하신 축복의 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야의 삶 후에는 가나안의 영적인 축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광야를 지나가는 데 3일도 채 못가서 쓴 물을 만나서 고통을 당합니다. 물을 먹고 보니 써서 토하고, 설사를 하고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니까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눈을 밝히시고 나뭇가지 하나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나뭇가지를 쓴 물에 던졌더니 그 쓴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을 마음껏 먹고 행진을 계속했는데 하루쯤 갔더니 엘림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 엘림은 12개의 샘과 70주의 종려나무가 있어서 참으로 그들은 시원한 그늘에서 마음껏 물을 마실 수가 있었습니다. 마라의 고통 후에 엘림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여인은 주님이 그녀를 위해 좋은 것을 계획하시는데 이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그 축복에 다가갈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했던 여인, 더 좋은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 여인은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어찌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실 때 예수님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아니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아픔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3일 후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그리스도를 일으키셔서 부활의 축복을 맞게 하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영광을 맛보실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버림받은 고통이 있지만, 지금은 시련과 장애물 앞에 놓여있지만 이 고난을 이기고 나면 놀라운 축복을 예비하고 계신 줄 알았기 때문에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주님 앞에 계속 간청하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확신이라고 믿습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시련과 어떤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여러분이 믿음으로 그 장애물을 뛰어넘을 때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아름다운 엘림의 축복, 은혜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이 여인이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은 자녀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오늘 이 여인은 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자식, 사랑하는 딸, 하나 밖에 없는 딸이라면, 더구나 그 딸이 아주 몸 쓸 귀신에 들려서 이리 넘어지고, 괴성을 지르고,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면 이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여인은 딸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곧 얼마 안 가서 예수님의 냉담한 반응에 부딪혔습니다. 수많은 장애물 앞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이 주저앉지 않았던 것은 딸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아마 이 여인은 포기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물질적인 축복 때문에 나왔더라면 벌써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딸의 생사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에, 그 여인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장애물을 뛰어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바로 자녀에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 사랑이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오랜 기간 동안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봉사하지만 별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그 뒤에서 수군거리며 손가락질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는 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비판해도, 사람들이 나를 웃음거리로 여겨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주님이 나를 인정하신다면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사랑만이 시련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이 여인이 받을 수 있는 자존심의 상처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희생이 그렇게 해서 나오지 않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한 학생의 글을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한 학생이었는데 이 학생은 장애인입니다. 그리고 몹시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그는 원하던 대학에 합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 중에 헤지고 낡아도 창피하지 않은 것은 오직 책과 영어사전 뿐이다. 집안형편이 너무 어려워 학원 수강료를 내지 못했던 나는 칠판을 지우고 물걸레질을 하는 허드렛일을 하며 강의를 들었다. 수업이 끝나면 지우개를 들고 이 교실, 저 교실을 바쁘게 옮겨 다녀야만 했고, 수업이 시작되면 머리에 하얗게 분필가루를 뒤집어 쓴 채 맨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공부했다. 엄마를 닮아 숫기가 없는 나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는 소아마비이다. 하지만 난 결코 움츠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가슴 속에선 앞날에 대한 희망이 고등어 등짝처럼 싱싱하게 살아 움직였기 때문이다. 짧은 오른쪽 다리 때문에 뒤뚱뒤뚱 걸어 다니며, 가을에 입던 홑잠바를 한겨울에까지 입어야하는 가난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러던 추운 어느 겨울날 책 살 돈이 필요했던 나는 엄마가 생선을 팔고 있는 시장에 찾아갔다. 그런데 몇 걸음 뒤에서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더 이상 엄마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눈물을 참으며 그냥 돌아서야만 했다. 엄마는 낡은 목도리를 머리까지 칭칭 감고 질척이는 시장 바닥 좌판에 앉아 김치 하나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계셨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졸음을 깨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책상에 부딫혀가며 밤새워 공부했다. 가여운 나의 엄마를 위해서. 

내가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는 형과 나, 두 아들을 힘겹게 키우셨다. 형은 불행히도 나와 같은 장애인이다. 중증 뇌성마비인 형은 심한 언어장애 때문에 말 한 마리를 하려면 얼굴 전체가 뒤틀려 무서운 느낌마저 들 정도이다. 그러나 형은 엄마가 잘 아는 과일도매상에서 리어카로 과일상자를 나르며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돕고 있다. 그런 형을 생각하며 나는 더욱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그토록 바라던 서울대에 합격하던 날 나는 합격통지서를 들고 엄마가 계신 시장으로 달려갔다. 

그날도 엄마는 좌판을 등지고 앉아 꾸역꾸역 찬밥을 드시고 계셨다. 그 때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등 뒤에서 엄마의 지친 어깨를 힘껏 안아 드렸다. “엄마! 엄마! 나 합격했어.” 나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 엄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엄마도 드시던 밥을 채 삼키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골목에서 한참 동안 나를 꼭 안아주셨다. 그날 엄마는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에게 함지박 가득 담겨있는 생선들을 돈도 받지 않고 모두 내어 주셨다. 그리고 형은 자신이 끌고 다니는 리어카에 나를 태운 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내게 입혀주고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나를 자랑하며 시장을 몇 바퀴나 돌았다. 그 때 나는 시퍼렇게 얼어있던 형의 얼굴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인생의 장애와 가난 앞에서도 그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학교에 합격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어떤 장애물 앞에 놓여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경제적인 장애물 앞에, 어떤 분들은 인간관계의 장애물 앞에, 어떤 분들은 사업의 장애물 앞에, 어떤 분들은 질병의 장애물 앞에 놓여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말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주님은 반드시 응답하실 분이라는 전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다면, 그리고 이 장애물을 뛰어넘었을 때 더 좋은 일을 계획하고 계신다는 주님을 내가 확신할 수 있다면, 우린 장애물 앞에서도 절대로 후퇴하거나 주저앉거나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장애물을 뛰어넘으시고 장차 우리의 왕 되실 주님 앞에 당당히 서서 칭찬과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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