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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 경영자 예수(1) (눅 6: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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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경영자 예수(1) (눅 6:27~32)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오늘은 경영의 시대입니다. 회사도 경영을 잘해야 발전합니다. 경영이 잘못되면 파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30년 전의 100대 기업들이 오늘에는 30여개만 남고 다 파산했다고 합니다. 인생도 경영입니다. 신앙도 경영입니다. 인생도 신앙운영을 잘한 사람은 성장하고 아니면 탈락하거나 실패하거나 한 사람은 신앙이 부실할 것입니다. 

로리 베스 존스라는 분이 20년간 성경속의 예수님의 삶만을 연구하였습니다. 연구결과 예수님은 성공한 경영인이라는 점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을 발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직원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오늘은 세계 7-80억 인구 중 가톨릭을 포함하여 절반을 복음화 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최고의 경영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2천 년 전 마구간에서 초라하게 사역을 출발하고 12명의 제자를 불러 훈련한 것이 2천년 만에 세계 인구 절반의 복음화를 이루었습니다. 지금도 그 예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사역하는 사람들이 얼마이며 지금도 그를 위해서 존재하고 그가 제시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얼마입니까.  

그런 시각을 갖고 복음서를 읽어보면 과연 예수님은 영적 관리에서 권위가 나타나고 민족에게 희망을 주셨으며 당시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하셨고 영적 세계를 세상에 펼쳐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2천년 후에 살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그 삶을 모방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몇 주 동안 예수님에게서 성공적인 경영자의 면모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경영도 성공적으로 살고 영적경영도 성공시키고 인간관계 경영도 성공하고 우리의 사업 경영에도 영향을 받아 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몇 가지 경영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명에 충실함” 

사명은 자신을 부르신 분의 뜻을 받드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아주 철저하게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33세의 나이에 운명할 때 “다 이루었다“ 고 고백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면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세례요한, 사도바울, 베드로가 여한이 없이 사명을 위해서 살다가 갔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그 사명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인간은 사명의 존재입니다. 태어날 때 나름대로 다 사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그 사명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값이며 무게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모두 이런 사명감이 흐려져서 적당주의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돌아다니며 자신이 오신 목적을 설명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전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33세의 나이에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사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분수를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자신이 할 일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갈 길이 아닌 길을 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실패하는 것입니다. 기업인들은 기업 잘 하는 것이 나라에 공헌하는 일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에 충실한 일입니다. 가르치는 분들은 가르치는 것이 본분이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목회자들은 목회에 전념하는 것이 본분이고 사명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업에 뛰어들고 정치에 뛰어 들어갑니다. 그러니 성공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실패하고 좌절하고 상처입고 회복불능의 처지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33세에 할 일을 다 했다고 외치셨습니다. 그 말은 내게 주어진 사명과 본분에 온 힘을 쏟았다는 말입니다. 고로 성공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본떠야 할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 이룸”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과 늘 교제하였고 교통하고 상의하고 상담하고 물었고 의논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밤이면 산으로 올라가 밤 새워 기도하며 그 시간에 하나님께 물었고 상담했고 교제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을 이루는데 성공한 이유는 이렇게 보내신 하나님과 늘 상의하고 상담하고 교통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늘 중대사를 앞에 놓고 중점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겟세마네기도, 얼마나 심각한 시간입니까. 예수님은 그 밤에 참모회의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방법 강구하지 않았습니다. 산에 올라가 밤새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니 실패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너무 수단과 방법을 내세우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 꾀와 수단과 방법으로 뭘 해보려고 자꾸 시도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실패하면 탓하고 기도하며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하고 한탄하며 눈물지으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성공하면 자만에 빠집니다. 내가 다 잘해서 된 줄 알고 자만에 빠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잊고 시치미를 뗍니다. 그러니까 실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치미를 아십니까. 옛날 매를 길들여 꿩을 사냥했습니다. 훈련된 매가 귀해서 잘못하면 남의 매와 바뀔 수가 있고 훔쳐 가기도 해서 매의 꽁지에 주인 이름표를 달아놓았는데 그것이 시치미입니다. 때로 사람들이 매를 잡아 시치미를 떼어내면 내 것처럼 되어버립니다. 그것을 시치미를 뗀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때로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의 이름을 떼어내고 내 이름을 붙일 때가 있습니다. 그걸 시치미를 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불행 시에는 다 하나님께 책임으로 돌립니다. 자서전이라는 것을 보면 대부분 내가 이렇게 해서 성공했다고 강조하는 책이 자서전입니다. 간증도 때로 우를 범하는 것은 내가 어려운 자리에서 이렇게 일어났다고 강조하게 됩니다. 그래서 간증은 자칫 과장하게 되어 있어서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늘 하나님과 의논하였고 상의하였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공 자들을 보면 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그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름달처럼 흥해야 하고 나는 그믐달처럼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30세에 할 일을 다 하고 사라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나 그 싹이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절대적인 순종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너는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되고 나는 너의 신하가 될 것”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당시 왕의 아들로서 하기 어려운 고백입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보다 훨씬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요나단은 큰 인물 될 사람인데 욕망으로 뭉쳐진 아버지를 잘못 만나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라는 분이 “내 앞에 엎드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속에서 신앙생활의 기본은 “하나님께 엎드리는 자아의 죽음과 그에 따른 순종과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응답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전적인 무능력을 인정할 때 하나님의 도움은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상의하고 상담하고 기도하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자신의 에너지를 절제” 

예수님은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4대 능력을 지니셨습니다. 하나는 자연을 움직이는 능력으로 바다의 광풍을 잔잔하게 하셨고 바다를 걸어가셨습니다. 또 영을 움직이는 능력으로 귀신을 내쫒으셨습니다. 그리고 생사를 주관하는 능력으로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려내셨습니다. 그 말은 생사의 주관자라는 말입니다. 또한 신적인 능력으로 각종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능력을 지니게 되면 엄청나게 남용할 것입니다. 그래서 권세 가진 사람들이 권세를 남용합니다. 그리고 권세가 떨어지는 날 잡혀갑니다. 그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사람은 칼을 가지면 사용하고 싶어지고 주먹의 힘을 가지면 싸우고 싶어지고 돈이 있으면 사치하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능력을 무섭게 절제하셨고 그 능력을 다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들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그런 능력이 주어지면 과시하느라 남용하고 야단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다고 체포하는 군인들을 보기 좋게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군일들은 물리쳤더라면 영광은 받으셨을 것이고 제자들 앞에서 폼은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얼마든지 심판을 할 수 있었고 말 한 마디면 얼마든지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몸에 못을 박는 군인들을 말 한마디로 얼마든지 심판할 수 있었고 십자가에서 뭇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뿐히 내려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능력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칼을 빼드는 베드로에게 “내가 힘이 없어서 당하는 줄 아느냐, 내가 당장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올 줄 모르는 줄 아느냐, 칼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순순히 체포되어 심문받고 채찍질당하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구원하는 오직 유일한 길이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명을 완벽하게 완수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 능력을 남용하였더라면 십자가의 길은 실패하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제한하기는커녕 120% 사용합니다. 그래서 때로 오버하고 넘치고 과욕해서 부작용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성공하는가 싶은데 나중에 보면 한결같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처음에는 다 성공합니다. 인기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다 실패합니다. 힘을 남용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무섭게 절제하고 제한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공하셨습니다. 


“자신을 기꺼이 어리석게 보이심” 

사람은 살아갈 때 때로 똑똑하게 보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똑똑하게 보여야 앞서가고 인정받고 당당해 질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똑똑해야만 성공하고 앞서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너무 지나치게 똑똑한 것이 때로 문제가 될 때도 있습니다. 어느 초년의사가 개업을 하고 아직 전화도 개통이 안 되었는데 손님이 왔습니다. 의사는 갑자기 개통도 안 된 전화기를 들고 전문용어를 써 가며 한참이나 지껄였습니다. 그리고 천연스럽게 대학병원에서 자문이 와서 이야기가 길어졌다 하고 어디가 아파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손님이 나는 아파서 온 것이 아니고 전화를 개통하러 온 전화국 직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너무 똑똑하고 약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때로 자신에게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을 어리석게 보이셨습니다. 제사장들이 그렇게 고발하여도 한마디도 변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가 답답해서 “왜 말이 없느냐, 저들이 너를 죽이려하지 않느냐, 말 좀 해 보라“고 했지만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기이히 여겼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경우 가 많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끈질기게 추격하고 사울의 참모들이 온갖 방법으로 다윗을 중상모략 하였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한 번도 백성들 앞에 나서서 사울이 나쁘다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몇 번 주어졌었지만 손끝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에 다윗의 참모들이 답답해하였고 다윗을 어리석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이겠다.”고 하였지만 다윗은 엄히 명령 내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에게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행동이 어리석게 보였지만 결국 하나님이 사울을 심판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온갖 중사모략을 당하였어도 한마디도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바보같이 행동했다고 마침내 다니엘이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자신을 때로 어리석게 보이는 것도 지혜입니다. 그런데 결국에 이기는 사람은 좀 어수룩하게 보이고 손해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기꺼이 어리석게 보여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어리석게 보이셨고 로마인들에게도 빌라도에게도 어리석게 보이셨습니다.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어떤 액션을 취하실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내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 모습을 멀찍이 서서 바라보던 제자들은 절망했을 것입니다. 많은 숨은 제자들이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무자비하게 죽여서 무덤에 묻어버리고 무덤 문에 큰 돌로 막아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님의 승리의 요소였습니다. 사람은 때로 손해도 보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세상에는 어떻게 하든지 이겨야 한다는 이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서로 앞서가려고 이기려고 똑똑 하려고 손해 안 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그 삶이 아니라고 외치십니다. 그러면서 그 진리의 핵심을 말씀하였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남에게 대접 받으려면 먼저 대접하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사상수훈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은 예수께서 산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해서 산상수훈이라 하고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말씀은 평지에서 가르치셨다 해서 이를 평지수훈((17)이라고 합니다. 이 평지수훈에서 제시하시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당장은 어리석게 보일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는 삶의 방법과는 동떨어진 방법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이 방법을 채택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좀 멀리 보면 이것이 이기는 방법이고 이것이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은 이 방법으로 세상에서 승리하셨고 이기셨습니다.  

나폴레옹은 예수를 보고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세상적인 이론으로 살아서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호언장담 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자신의 생각과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가 고백했습니다. “처음에 이기는 것 같았던 나는 실패하였고 처음에 실패하고 우둔하게 보이던 예수는 끝내 승리했다”고. 이것이 예수님의 경영 이론이고 승리하는 방법론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계속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권고하십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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