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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온 땅은 그 앞에 잠잠할지니라 (합 12:15~20, 행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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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땅은 그 앞에 잠잠할지니라 (합 12:15~20, 행 11:18)   


오늘은 해방기념주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지 63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일본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이 되기 전에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봅니다. 독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냄비같이 대응하지 말고 지속적이고 논리적인 대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중국이 이어도를 자기 국토라고 시비를 건답니다. 이어도는 마라도 남쪽 149km에 있는 수중암초입니다. 중국에서 제일 가까운 섬인 퉁다오섬에서는 275km라고 하는데 이 수중암초가 자기 땅이라니 그 큰 땅을 가진 중국이 욕심 부릴 걸 부려야지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그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잠시 보았습니다. 중국은 참 거대하고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 바벨론이나 바사는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정말 거대하고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지배하고 핍박하고 안하무인격으로 탄압했습니다. 그들의 오만의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여지없이 없어지게 하셨고 그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경제대국인 일본과 깨어나는 사자 같은 인구대국 중국, 그리고 세계 열강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생존법칙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F-22 랩터’는 미국이 개발한 최신예 전투기입니다. 스텔스 기능을 갖추고 있는 무적의 전투기입니다. 최근 괌 미 공군기지에 배치한 미 공군의 자랑입니다. F-22보다 성능은 약하지만 파리까지 떨어뜨릴 수 있는 우리나라가 개발한 자랑할 만한 무기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F 킬라’랍니다. 그런데 현재는 F-22가 엄청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최신예기이지만 얼마쯤 지나면 이 보다 더 뛰어난 전투기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자랑할 것이 무엇이며 그 자랑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자랑은 인간에게 오히려 올무가 됩니다. 높이 올라간 비둘기가 독수리의 밥이 됩니다. 아름다운 왕관 같은 뿔을 가진 사슴이 그 뿔이 걸려 붙잡히게 됩니다. 인간사에도 자랑은 헛된 것이고 자랑이 올무가 됩니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보세요. 마지막 1시간을 남겨놓고 포도원에 들어온 품꾼은 이 비유의 주인공이지만 아무 말이 없습니다. 이 품꾼은 주인에게 할 말이 없습니다. 1시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포도원에 들어오라고 합니다. 1시간밖에 일하지 않았지만 12시간 일한 사람과 같은 품삯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할 말이 없습니다. 주인 앞에서 잠잠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래야 합니다. 아무 말이 없었던 품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한 가지만으로 아무 것도 한 것 없지만 같은 삯을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은혜가 넘치는 자, 감사하는 자는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세요. 세리는 기도할 때에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이 말만 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을 보세요. 그의 기도는 자랑으로 꽉 차 있습니다. 내용도 기도가 아니라 자랑이며 보고입니다. 이런 기도는 참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할 말이 없어야 하는데 이 바리새인은 할 말이 너무 많습니다. 흔히 투정하듯이 자랑한 것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남편은 내가 그렇게 싫다는데도 또 진주 목걸이 사왔어”라는 투의 말입니다. 하나님께도 우리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잠잠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유대인 랍비 마빈 토케이어는 “학식을 남에게 내비치며 자랑해서는 안 된다. 많이 배웠다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많이 배운 만큼 겸허한 마음과 지혜가 풍성한 품성이 자랑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지성을 자랑하는 지식인은 자신의 넓은 독방을 자랑하는 죄수와 같다고 합니다. 참 군인은 갑옷을 입을 때에 자랑하지 아니하고 갑옷을 벗을 때에 자랑하는 법입니다. 갑옷을 벗기 전까지는 누구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갑옷을 벗을 때까지 가 봐야 그가 한 일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13:5에는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고 합니다. 참 지혜 있는 자만이 잠잠할 줄 압니다. 지혜 없는 자는 잠잠하지 못하므로 자기 입 때문에 낚입니다. 물고기는 입으로 낚인다는 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왜 온 땅은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까? 왜 하나님 앞에서 떠들 이유가 없습니까?

첫째, 생명이 없는 일을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없는 자의 생명 없는 일을 보세요.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고 음란한 행위를 조장합니다. 생기도 없는 새긴 우상을 섬깁니다. 이런 자들은 잠잠해야 하는데 늘 입을 벌리고 삽니다. 이런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라고 책망하십니다. 이방 민족이 하나님의 백성을 침략하여 여인들에게 강제로 술을 마시우고 추행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이 다 생명이 없는 일입니다.

술에 대한 가르침을 디모데전서 3장에 보세요. 감독들에게는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집사들에게는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라고 합니다. 술 그 자체가 절대적인 악은 아닙니다. 그러나 술의 습성이 취하게 하고, 이성을 상실하게 하고, 실수하게 하고, 남에게 폐가 되게 합니다. 쾌락을 좇고, 음란하고, 포악한 것은 항상 함께 따라다닙니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이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 없는 일이란 죽은 일이라는 말입니다.

악마의 윤리 신학은 ‘쾌락은 죄다’라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쾌락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쾌락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육체적인 쾌락만 추구하고, 쾌락에 빠지면 죄가 됩니다. “모든 죄는 쾌락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쾌락이란 좋은 것이지만 여기에서 생명을 빼면 추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쾌락주의(hedonism)란 말은 원래 좋은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로마서 7:22의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런데 육적 즐거움만 추구하면 쾌락주의가 됩니다. 쾌락과 쾌락주의는 그 근본이 차이가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니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니었고 나는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쾌락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했던 것이다. 끔찍한 수치감 속에서 내 인생은 끝나 버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나 자신의 주인이 아닌 것, 내 영혼의 선장이 아닌 것, 쾌락에 지배되는 것, 수치감 속에 끝나 버리는 인생,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까? 생명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쾌락만 따라가다 보면 생명을 잃고 이렇게 삽니다.

보톨도 지오바니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입니다. 미켈란젤로가 14살에 보톨도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지오바니는 미켈란젤로에게 재능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지오바니는 “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너는 네 기술로써 무엇을 위하여 쓸 것인가를 먼저 분명한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는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두 곳을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처음 그가 데리고 간 곳은 술집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스승님, 술집 입구에 아름다운 조각이 있어요”하고 말했습니다. “이 조각은 아름답지만 조각가는 술집을 위해서 이 조각을 사용했다.” 지오바니는 다시 미켈란젤로를 거대한 성당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저 술집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어졌고, 또 하나는 술을 마시는 쾌락을 위해 세워졌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하여 쓰기를 원하느냐?” 어린 미켈란젤로는 세 번씩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우리의 몸과 시간과 기회를 무엇을 위해 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아니면 쾌락입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면 모두 다 쾌락이 됩니다.

디모데후서 3:4에는 말세의 사람들의 모습을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합니다. 말세의 사람들은 생명 없는 것에 생명을 걸고 살아갑니다. 요즘에 보세요. 얼마나 중독이 심한지 모릅니다. 약물중독, 일중독, 성중독, 마약중독, 술중독, 성형중독, 게임중독 등 중독의 종류도 많아졌습니다. 이런 것 외에도 중독되기 쉬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쾌락으로 빠지면 중독이 됩니다. 중독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욕망에서 가장 강력한 심리적인 적입니다. 그러므로 중독은 마귀가 우리를 옭아매기 위해 동원하는 가장 흔한 수법입니다.

이런 중독들을 매일 조금씩 끊어가야 합니까? 아닙니다. 매일 조금씩은 끊지 못합니다. 아주 단숨에 끊어야 합니다. 물론 끊기 힘듭니다. 내가 끊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성령님께 맡기세요. 단번에 중독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단숨에 하나님이 끊게 해 주셨다고 고백을 합디다.

사람은 살아 있는 영입니다. 생령입니다. 사람은 생명이 있는 영입니다. 죽은 영이 아닙니다. 생명이 사람이 사람 되게 합니다. 생명 없는 것들에 빠지지 말고 생명 있는 것에 빠지세요. 하나님께 빠지고, 말씀에 빠지고, 은혜에 빠지세요. 그러면 쾌락에 빠지지 않습니다. 새긴 우상은 생기가 도무지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생명이 없는 사람이 생기가 없는 우상을 섬깁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생명 있는 사람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생명으로 즐거워하며 쾌락에 빠지지 않습니다.


둘째, 여호와는 생명이시고 성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20절에는 말씀합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 우상 앞에서는 잠잠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상 앞에서는 많이 떠듭니다. 무당들을 보세요.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귀신들은 요란한 색깔과 시끄러운 소리를 좋아해요. 내림굿을 받는 사람들을 보면 하나같이 귀에 방울소리 같은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대요. 그러나 하나님의 유일성과 절대성 앞에서는 소리칠 수가 없습니다. 잠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늘의 보좌입니다. 시편 11:4에는 “여호와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라고 합니다. 성전이 보좌라고 하십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을 더럽히고, 성전 기명들을 훔쳐갔지만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서 인간계를 지배하십니다. 바벨론을 위시한 온 천하는 여호와의 위엄 앞에 잠잠해야 합니다. 스가랴 2:13에는 “모든 육체가 여호와 앞에서 잠잠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심이니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40:34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라고 합니다. 역대하 7:2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라고 합니다. 에스겔 10:4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와 성전 문지방에 이르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한 것은 여호와께서 성전에 계시므로 그의 영광이 가득한 것입니다.

맥스 루케이도는 우리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묻는 것은 물고기가 “물이 어디 있지?”라고 묻는 것과 같고 새가 “공기가 어디 있지?”라고 묻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어린이가 교회학교에 오면서 봉헌을 동전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 봉헌을 드리려고 동전을 삼켰습니다. “하나님 받으세요” 그랬답니다. 어느 인도의 여 선교사는 선교 사역 가운데 너무 힘이 들어 탈진하였습니다. 산에 올라가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하고 울다가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I need you)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잠시 후에 메아리가 되어 “나는 당신이 필요해”(I need you)하고 들려왔습니다. 이 선교사는 자신의 소리가 메아리쳐 왔지만 이 소리가 하나님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눈물을 닦고 힘을 내어 소리치며 내려왔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필요하시데.” 하나님은 성전에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나를 듣고 계시고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

시편 139:8에는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전재’(全在)하십니다. 이전에는 ‘무소부재’라 했습니다. 모든 곳이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모든 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 시대를 ‘유비쿼터스’(Ubiguitous)시대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신은 언제나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입니다. 원래 신학적인 용어이지만 이제는 정보 용어로 사용됩니다. 1991년 미국의 마크 와이저박사가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유비쿼터스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을 아는 일입니다.

오래 전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에 제가 다니던 교회가 레이크 애비뉴 회중교회(Lake Avenue Congregational Church)였습니다. 그 교회는 당시에 장년이 4,000명 이상 모이는 큰 교회였습니다. 저는 그 교회의 한국인 회중을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폴 시다 목사님이셨는데 장로교 목사님이셨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이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셨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기도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고 하시면서 자기 교회의 직원, 장로들을 다 모아놓을 테니 한국교회 기도에 대하여 강의를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가서 새벽기도, 철야기도, 산기도, 금식기도 등 기도에 대한 강의를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너무 좋아하시면서 자기 교회도 산기도를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달 동안 산기도를 했습니다. 두 달 후에 다시 점심을 먹자고 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더 이상 갈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없으면 보내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산기도를 잘 하는데 왜 우리는 안 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한국 산에는 산신령이 있지만 미국 산에는 산신령이 없지 않습니까?” 그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은 모든 곳에 다 계시는데 왜 우리가 산에까지 가야 합니까?”라고 하면서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다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산에 대한 신령감 때문에 산기도가 잘 됩니다.

사도 바울은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의 최고학파가운데 하나인 힐렐 학파의 기둥인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요즘 서울대학교와 비교할 바가 안될 만큼 굉장한 학교입니다. 세상의 명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던 가문이었습니다. 사울왕의 가문인 베냐민지파 출신입니다. 히브리인 중에서도 순수한 히브리인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빌 3:3-9). 하나님 앞에서 자랑 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잠잠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은 한참 이동전화로 전화하다가 갑자기 “잠깐만”하더니 소리가 없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전화를 합니다. “왜 그래?” “응, 경찰이 있어서”. 경찰은 이렇게 무서워하면서 하나님은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이 두루 살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며 모든 곳을 두루 살피십니다. 온 천하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우리가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어전입니다. 바로 내 삶의 터전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곳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잠잠합시다. 하나님의 어전에서(코람 데오) 사는 자세로 잠잠합시다.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찬송가 79장 2절을 보세요.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 발하시면 천하의 모든 것 망하겠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 우리들입니다.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큰 소리 칠 것도 없습니다. 잠잠해야 합니다. 오만, 교만, 자랑 이런 말들은 다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소리치면 모든 것이 다 망합니다.


결론

  아들자랑이 요즘 세상에는 헛것이랍니다. 아들이 고등학생이 되면 4촌이 되고, 아들이 대학생이 되면 8촌이 되고, 아들이 장가가면 사돈이 됩니다. 아들이 공부를 잘하고 일을 잘하면 나라의 아들이 되고, 아들이 돈을 잘 벌면 장모의 아들이 되며, 아들이 백수가 되면 평생 끼고 살아야 한답니다.
  자랑할 때는 바울처럼 약한 것을 자랑하세요. 주안에서 자랑하세요.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세요. 내 자신 말고 하나님만을 자랑하세요. 이것이 참으로 잠잠한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여 잠잠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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