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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고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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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고후 13:5)


1. 먼저 자신을 살피라!

“남을 살피느니 차라리 스스로를 살피고, 남에 대해 듣기보다 오히려 스스로에 대해 들으라(與其視人寧自視, 與其聽人寧自聽).” 이것은 조선 후기의 학자인 위백규(魏伯珪, 1727~1798)가 열 살 때 지었다는 <좌우명(座右銘)>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남 잘못하는 것만 눈에 들어오고,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 합니다. 남 비방하는 말은 솔깃해서 듣고, 남이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은 못 견디어 합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남의 말에 솔깃하기보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뜨고서 자신을 보고, 자신의 귀를 열어 스스로를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들려오는 소리들 앞에서 먼저 자신을 살피는 쪽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먼저 보는 쪽입니까?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 마지막에 그들에게 준 교훈입니다. 이 교훈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시대와 대상을 막론하고 모든 성도들이 들어야 할 교훈입니다. 이러한 본문을 좀 더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는 고린도전후서의 배경을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에 먼저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서는 당시 고린도 교인들과 넓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생활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다루는 실용적인 편지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교회의 분열(1~4장), 근친상간과 간음죄를 비롯해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위들(5장), 법정에서 다른 성도들을 송사하는 비신앙적인 행위(6장), 결혼 문제(7장), 영적 은사의 남용, 성만찬,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부활에 대한 불신의 문제(15장) 등을 다루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고린도후서를 또 다시 기록하여 보내었는데요. 그 목적은 우선 자신이 먼저 보낸 편지에 대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자신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사역자는 자신이 전한 말씀에 성도들이 좋은 반응을 보이면 이렇게 기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기 전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약속했던 헌금을 마무리 지어 놓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고린도후서를 기록한 목적이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나옵니다. 

그것은 바울이 보낸 엄한 책망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더 많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주신 말씀을 거역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는 자신을 책망하는 바울을 향해 도리어 그의 사도권을 의심하면서 역공을 가하는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네가 뭔데? 당신이 진짜 사도야?” 바울은 이 무리들을 향하여 아주 엄하게 책망하면서 다음 방문 때 가만 두지 않겠다고 13장 1절부터 4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오늘 본문을 보시면, 바울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는 말씀의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너희들이 자신을 살피지 않고, 도리어 나에 대하여 비난하면서 공격을 마지않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무엇보다 먼저 너희 자신을 살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린도 교인들은 주님께서 사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스스로를 살펴 빨리 죄에서 떠나라고 했지만, 그 말씀으로 자신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그들이 아주 분명하고 현저한 죄를 저지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죄라는 것, 자신들의 실상이 어떠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을 잘 알고 계십니까? 주위에서 이런 저런 말이 들려올 때 그것으로 자신을 먼저 살핍니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그것으로 자신을 살펴보고 있는지요?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정말 사람들은 자신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오죽 하면 “네 자신을 알라”는 말이 수 천 년 동안 지속되는 유행어가 되었을까요! 우리의 신앙은 무엇보다 자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자신을 살피고 아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이 스스로를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자신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크고 작은 문제를 잘 보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때로는 자신보다는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견해도 잘못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정확하고 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서 자신을 똑바로 보고 살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고린도 교인들처럼 ‘자신을 살펴 회개하라’는 바울 사도의 말은 외면하고 도리어 바울을, 그리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자리에 있지 않기를 바랍니다. 늘 자신을 먼저 살피시기 바랍니다.


2. 시험하라, 확증하라!

바울 사도가 이렇게 성도는 먼저 자신을 살피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살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본문에 보면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성도가 하나님과 그 말씀 앞에서,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들려오는 소리들에 대해서 가져야 하는 태도는 “시험하라”, 그리고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하라”는 말은 ‘페이라조’로서 성경 기록 당시의 일반 헬라어에서는 찾아보기가 드문 단어입니다. 이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히브리어 ‘나사(시험하다, 시도하다, 꾀하다)’의 번역어로 사용되었는데요. 그 의미는 ‘스스로를 시련이나 유혹 등과 만나게 하여 그것으로 자신의 믿음이 어떠한지를 판가름하라’는 뜻입니다. 즉 이 “시험하라(페이라스모스)”는 말은 고난, 핍박, 유혹에 의한 위협이나 부담, 특히 성도를 옳은 길에서 떠나도록 위협하는 어떤 위험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이 말을 통하여 바울 사도가 의도하는 것은 성도가 유혹, 시련, 고난 앞에 섰을 때, 그때야 비로소 그의 믿음의 본 모습이 제대로 드러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사용된 단어인 “확증하라”는 말은 ‘도키마조’로서 말 그대로 시험을 통하여 어떤 사실이 검토되고 입증된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바로 앞에 나온 “시험하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서, 유혹, 시련, 고난 앞에서 드러나는 신앙이 자신의 진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번은 아버지와 함께 수영장에 갔습니다. 그는 두 팔을 힘차게 내저으면서 “아빠, 절 보세요!”라고 외쳤습니다. 즉 자신이 헤엄을 치고 있는 모습을 아빠에게 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수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발 하나를 수영장 바닥에 디디고서는 물에 떠서 헤엄을 치고 있는 것처럼 하고서 아빠를 불렀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키에르케고르는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한 발로 땅을 짚고 물에 떠 있는 척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린 아이가 수영을 할 줄도 모르면서 아빠에게 헤엄을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 했듯이, 성도들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지만 실상은 믿음이 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키에르케고르는 “시험되지 않은 믿음(untested faith)”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도가 평상시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은 시험 되지 않은 믿음이기에 죄의 유혹이 있을 때,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자신에게 희생이 요구될 때, 그때에는 어떻게 될지 장담 할 수 없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전기불도 시계도 아주 귀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잡고 열심히 새벽기도를 하기로 다짐한 한 젊은 여집사님이 새벽기도회에 가기 위하여 장날 읍내 장에 가서 새벽만 되면 어김없이 잘 운다는 암탉 한 마리를 샀습니다. 몇 번이나 시험해본 후라 안심하고 그 닭을 사와서는 다음날 새벽부터 닭이 울면 새벽기도를 나갈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동창이 훤히 밝았는데도 닭은 울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날도 닭은 울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다음 장날까지 기다렸다가 닭 장수에게 따졌습니다.
“새벽마다 잘 운다는 닭을 샀는데, 아예 울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러자 닭 장수가 집사님에게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닭장은 지어줬습니까?” “예.” 
“닭에게 모이는 배불리 줬습니까?” “아~ 예.”
“그럼 닭장에 수탁 한 마리도 같이 넣어 줬습니까?” “예, 전부 다 해줬습니다.”
이러한 대답을 들은 닭장수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 여보시요. 집 있겠다, 배부르겠다, 거기에다 남편까지 있는데 암탉이 뭐가 답답해서 새벽마다 빽빽 울어 쌌겠소.”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집 있고, 배부르고, 가족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의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가진 믿음이 이렇게 고난과 시련과 유혹을 거쳐 갖추어진 믿음이냐, 단지 믿는다고만 말하는 그런 믿음은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3. 시험하여 확증할 것은?

그렇다면 시련이나 고난이나 유혹을 통하여 입증되어야할 것은 무엇일까요? 

1)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첫째로 오늘 본문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를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고 말씀하셨듯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와 여러분을 향하여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믿는다고 말하고, 자신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주님께 충성하노라고 말은 하지만, 주님께서 보실 때에 ‘과연 믿음이 있구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 같습니까? 그런 사람은 그렇게 많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과 오늘 여러분을 향하여 믿음 가운데 서 있는지를 시험해보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성도에게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자신이 느끼는 것의 어떠함에 따라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사람 사는 대로 그렇게,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나도, 내 욕심과 본능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오직 믿는 자만의 삶의 법칙이 있고, 믿는 자만의 삶의 양식이 따로 있습니다. 

지난 학기 사역자 반 성경공부를 통하여 예배에 대해서 확립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참된 예배는 삶 그 자체, 삶의 현장에서 예배자로 사는 것이며, 성도의 참된 삶은 예배하듯이 사는 것이다.” 항상 말씀과 기도와 찬양 가운데 사는 것,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 내 행동 하나하나가 예배 행위라는 것, 즉 우리 삶의 전부가 하나님이 만드신 거대한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항상 주님을 의식하고 존중하고 예배하듯이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를 시험하고 확증하라는 이 말은 여러분이 신앙고백, 즉 믿음의 고백대로 살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대로 고백된 것이 사도신경이고, 또 우리는 여러 가지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여러분, 하나님이 전능하다는 것을 믿습니까? 정말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가 여러분의 아버지라는 것을 믿습니까? 진심으로? 정말로요? 그런데 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것처럼 그렇게 맥없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는 말은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에게 실제로 일어나느냐 하는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으니, 사람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이 주님의 이름과 그 능력으로 여러분의 삶에서 나타는 것, 바로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런 일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제2차 세계대전>, <가장 긴 밤> 등을 집필한 작가 코넬리어스 라이언은 5년간 암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했습니다. 그는 투병 중에도 매일 아침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좋은 날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이언이 그 심한 고통 중에서도 늘 한결같은 기도를 하는 것을 본 그의 아내가 하루는 그에게 “무엇이 그렇게 감사하냐? 왜 그렇게 기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라이언이 대답했습니다. "첫째, 사랑하는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어서 기쁩니다. 둘째는 가족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셋째는 병들어 눕기 전에 작품을 탈고한 것이 기쁩니다. 넷째는 병마와 싸울 힘을 주신 하나님 때문에 기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쁜 것은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라는 이 말은 코넬리어스 라이언처럼 그 믿음 때문에 삶이 확실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시련과 고난과 유혹과 삶의 위기 앞에서도 변치 않고, 도리어 더 빛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분의 신앙이 과연 이런 신앙인지를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는가?”

둘째로 오늘 본문이 “시험하고 확증하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믿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마음과 삶의 중심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여러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거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는 성도는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이 그러하냐?” 하는 것입니다. 즉 바울 사도처럼 여러분도 주님께 전적으로 굴복했느냐, 아니 자신을 철저히 죽여 오직 여러분 안에 사시는 분은 예수님뿐이시냐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와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가 너희 안에 거하시느냐?”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 성육신 신학의 폐단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육신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이 지적하는 성육신 신학의 문제는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그것은 “사람 밖에 계신 예수님”일 뿐이라는 것이죠. 객관적인 사실로서 이 또한 중요한 것이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 안의 그리스도”입니다. “온 세상의 임금 그리스도”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과 내 전 삶의 임금 그리스도”가 어떤 면에서는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진정한 성육신은 성도 여러분 각자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밖의 하나님"이 "내 안의 하나님"이 되심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요1:12, 3:6, 고전6:17). 내 생각과 감정, 생활과 태도, 아니 본능과 무의식의 세계까지 주님이 주인이 되시는 것, 이것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이죠. 여러분이 가장 당황하는 그 순간에 터져 나오는 감정이나 생각이나 행동은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이 흥분하는 그 순간에 터져 나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말하는 그 순간에 나오는 것은 누구의 것입니까? 오늘 바울 사도는 묻습니다. “정말로 너희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느냐?”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4. 입증된 믿음

말씀을 맺겠습니다.

설탕으로 만든 가짜 약 ‘플라시보’도 환자가 효력 있는 약이라고 믿으면 실제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 연구 결과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실험 대상자들에게 그들이 복용한 약이 가짜라는 것을 알려준 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약효가 나타났다고까지 합니다. 진실이 아닌 것에 근거를 둔 믿음조차도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설탕으로 만든 가짜 약이 일시적으로 증상을 완화시키듯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믿음도 그릇된 평화나 행복감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여러분의 신앙이 그런 가짜 믿음은 아닌지 스스로 살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그렇다면 여러분이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내가 믿음에 서 있는가?” “나는 믿음대로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는가?” “내 삶의 주인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에 “예”라고 답을 해야 그 믿음이 제대로 된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확실하게 검정되는 것은 삶의 시련, 고난, 유혹 등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진짜 믿음입니까? 아님 가짜인데도 여러분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은 환난과 고난과 유혹 앞에서 검정된 믿음입니까? 아니면 세상사 앞에서 무기력한 믿음입니까?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십시오. 그리하여 제대로 된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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