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의 복 (마 5:10~12)

  • 잡초 잡초
  • 489
  • 0

첨부 1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의 복 (마 5:10~12)


 오늘은 팔복 중 마지막인 여덟 번째 복에 대해 상고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 팔복에 나타난 주님의 뜻은 너무도 높고 깊고 심오합니다. 그래서 어떤 자연인도 도저히 그렇게 살 수가 없고, 오직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이라야만, 그 말씀대로 살 수 있고 또 받을 수 있는 차원 높은 축복인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팔복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해하고 또 알고 있는 축복의 개념을 뿌리째 흔들어 버리는 역설적인 복임을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일곱 가지 복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첫 번째 복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자신에게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구원받을 만한 의가 전혀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 둘째 복인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자신에게 의로운 것은 없고 죄와 불의만 가득한 것을 느끼는 사람이 그 죄를 슬퍼하며 통한히 여기는 것을 의미하고, 세 번째 복인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자신에게 죄와 불의만 가득한 것을 인정하는 자가 하나님의 처분과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지은 죄를 원통히 여기는 사람이 이제는 죄와 반대되는 의로움을 갈망하는 마음의 자세라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 복인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아직 그 의를 받지 못한 가련한 사람들을 볼 때에 불쌍히 여김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최고의 연민은 영혼에 대한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섯 번째 복인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은 마음이 순전하고 simple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화된 사람은, 자연을 통해서, 역사를 통해서, 체험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곱 번째 복인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peace maker 곧 평화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만이 아닌,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가 될 것이라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이제 팔복 중 마지막 복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입니다. 한 가지 흥미 있는 점은 팔복의 첫째 복에 대한 약속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했는데, 마지막 여덟 번째 복에서도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팔복은 천국으로 시작하여 천국으로 끝납니다. 물론 다른 복들도 다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이 받는 것들이지만, 시작과 끝에서 천국을 약속한 까닭은, 천국의 백성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천국에 대하여 대단히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천국은 어떠한 성격의 나라이고,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가를 강조하시기 위해서, 천국에서 시작하여 천국으로 끝맺고 계시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 여덟째 복처럼 잘못 해석하고 오해하기 쉬운 복도 없을 것입니다. 여덟째 복에서 가장 크게 강조하고 있는 점은 ‘의를 위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단순히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 하시지 않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덟 번째 복에 대해서 부정적인 면을 먼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은 “반대하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한 때 무슨 혁명 신학이니 해방신학이니 하는 이상한 신학 사상들이 횡행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고 투쟁하고 데모도 하고 방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법의 심판을 받아 감옥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정치적인 이유로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이 반드시 의를 위한 박해라고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부의 정책을 다 추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정책들은 우리의 신앙과 상반되는 것들이 있고, 그러한 경우 우리는 타협하거나 굴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와 정치를 혼합해서 박해를 받는다고 하면 대중에게는 인기가 있을는지 모르지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광신적이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교계 주변에는 점쟁이 같은 광신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점쟁이 같은 권사에게 시장 갈 때도 전화로 오늘은 무슨 반찬을 사야 좋은가 물어 보고서 가는 한심한 신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광신적이기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라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그러한 행위는 욕을 먹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주님은 얌체 없는 행위 때문에 욕을 먹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버스를 타는데, 한 중년 부인이 어휴! 주여! 하면서 새치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욕을 먹어야 마땅합니다. 자기가 잘못하여 욕을 얻어먹으면서 ‘아, 나 오늘 핍박받았다’고 하면 커다란 착각인 것입니다.

주님은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핀잔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다 더 지혜롭지 못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또한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덟 번째 복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롭다거나 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닮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딤후 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와 같은 예를 무수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벨은 가인에게 핍박을 받았고, 모세도 극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박해를 받았고, 엘리야, 예레미야, 혹은 다니엘, 세례 요한, 사도 바울 같은 선지 사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다가 모진 박해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덟 번째 복은 보다 직접적으로 의의 본체이신 주님 때문에 당하는 핍박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덟 번째 복은 우리의 허물이나 과실 때문에 당하게 되는 어려움을 의미하지 않고,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핍박을 의미합니다. 장구한 교회사의 여러 시대에 있어 가혹한 박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초대 교회 시대 그 악명 높은 네로 황제를 비롯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해진 10대 박해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수천수만의 성도들이 사자 밥이 되기도 하고, 살가죽을 벗기고, 불태워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성도들은 몸에 기름을 부어 야간 경기장에 불을 밝히는 기둥으로 처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의인이 누구의 박해를 받습니까? 불신자들에게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극심한 박해 중의 일부는 교회 자체와 종교인들에 의하여 가해진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을 주로 박해한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믿는다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율법 학자들이 아니었습니까? 중세 시대 천주교도들에 의한 박해 역사를 살펴보십시오. 종교 개혁을 외치는 소리가 드높아지자 불란서에서는 십만 명의 신교도들을, 화란에서는 18600명을 사형시켰고, 영국에서는 277명의 신자들을 화형 시켰습니다. 이렇게 박해는 외부에서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올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또한 그것이 교회사로 실증되었습니다. 박해가 명목상의 교인들에게서 올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기독교, 명목상의 교인들은 순수 신앙의 가장 큰 원수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박해는 저 옛날에만 있었고 지금은 없습니까? 제가 아는 어떤 여성도 는 남편이 전직 경찰관인데, 부인이 예수를 믿는다고 인두로 지지고 펀치로 손톱을 뽑기도 했다고 그래요. 그래도 그 여성도는 남편의 핍박에 굴복하지 않고, 그렇다고 남편을 증오하지도 않고, 새벽 재단을 쌓으며 날마다 남편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박해의 형태는 천태만상일 수가 있습니다. 박해는 앞서의 남편처럼 폭력적인 것일 수도 있고, 체포되어 감옥에 던져질 수도 있습니다. 박해는 직장을 잃은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경멸과 조소로 나타나기도 하고, 여러분을 향하여 수군거림의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핍박당하는 양상은 다 열거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핍박을 당할 때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본래 자연인은 자기 보존의 본능과 보복의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박해하는 사람에게 보복하면 안 됩니다. 사람마다 보복하기는 쉽지만, 보복하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님은 보복하시지 않았습니다. 핍박받는 것으로 해도 주님보다 더 심한 박해를 받은 분이 없고, 보복할 힘이 있는 것으로도 주님보다 더 강하신 분이 없는데, 그렇지만 주님은 결코 보복하시지 않았습니다. 또 우리가 주님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을 때, 기가 꺾이거나 낙담해서도 아니 됩니다. 내가 잘 믿어 보려고 하는데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가? 내가 어째서 이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은 너무도 분명히 말씀하시는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연인은 터무니없는 비난을 받을 때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되고, 분개하는 마음이 가득하게 되므로 도저히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당할 때도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박해를 받을 때 기뻐할 수 있습니까?


  1. 자신이 어떠한 신분인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왜 우리가 핍박이 와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까? 우리 믿음의 선진들인 선지자들,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그렇게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과 그 일로 인해 핍박당하는 것은, 사단과 세상이 우리를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인식한다는 의미요, 하나님께서 천국 시민과 그 사역자로 합당히 여기신다는 확인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자신이 천국 백성으로 보장받았다는 일이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중에 지금 주님의 이름과 그 말씀 때문에 핍박과 수모와 괴로움과 손해를 당하는 성도가 있습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인정서를 받은 복된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고 있다면, 여러분은 선택받은 종들이요,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어 영광 중에 기뻐하는 선지자들과 같음을 알고 기뻐해야 합니다.

  2.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일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 15:18-19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라고 했습니다. 개종하기 전의 사울이 성도들을 핍박하게 될 때에 예수님은 사울에게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핍박을 당하는 것은 예수님이 당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또 손해까지도 보았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환난과 참음에 동참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하늘의 복을 영원토록 받으시는 분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늘에서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왜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까? 주님은 그렇게 핍박을 받아야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말씀합니다. 누가 하늘에서 상을 많이 받을까요? 교회에서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하며 높임 받는 사람이 천국에서 받을 상이 클까요? 여러분 주님을 위해 의를 행하다가 핍박을 받아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것은 대단한 복입니다. 자랑하며 나팔 불 것은 아닐는지 모르나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사도행전 5:41에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저들이 채찍질을 당하고도 기뻐한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당한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고 나서, 매를 많이 맞고 손과 발이 착고에 채워졌지만, 감옥에서도 오히려 찬송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받는 핍박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장차 하늘의 큰 상 주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4. 천국이 의를 위해 핍박받은 자의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래서 주님을 인하여 받는 박해는 여러분에게 붙은 천국행 꼬리표요, 여러분의 최종 상태가 결정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셈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만 되느냐?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이 나의 것이 됨을 확신하는 사람은, 어떤 핍박이 와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줄로 믿습니다. 

푸쉬킨의 시에 이러한 시가 있습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는 것이려니...’자연인들도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올 것을 소망하면서,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딥니다. 불확실하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내일에 대한 소망으로 고난을 참고 견딥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의를 위하여 크고 작은 핍박을 받는 성도 여러분! 핍박을 받을 때 분노하지 마시고, 낙심하고 기가 꺾이지 마시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기 때문”이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팔복 중 마지막 여덟 번째의 복인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의를 위한다는 말과, 주님을 위한다는 말은 동일한 개념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섬기되 온갖 고난과 죽음까지라도 감수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있는데 그것은 곧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인도의 영웅 마하트마 간디도 이 팔복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는 3-10절까지 읽어보면서 ‘옳다 옳아’라고 하면서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이 자신이 주장하는 ‘비폭력 무저항 운동’의 정신과 일치하는 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11절의 “나를 인하여 핍박과 고난당하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을 읽고서는 성경책을 집어던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외치기를 “도대체 예수가 누구관대 그를 위해 고난 받고 핍박받을 정도로 그를 따르라는 것이냐!”라고 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는 인도의 영웅은 되었지만, 천국 시민이 될 자격은 얻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주님 때문에 핍박과 환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앞서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모두 핍박을 이겨내고 승리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들도 우리 믿음의 후배들에게 신앙의 본을 남길 수 있도록 어떠한 핍박이 와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도 박해도 없이 평안한 가운데 신앙 생활하는 분들은, 핍박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평안한 가운데서 태만하지 말고 더욱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뵈올 것이며, 그 영광스러운 존전에서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그 때 낮고 천한 우리의 몸도 변화되고 영화 되어 아픔이나 질병이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슬픔이나 탄식이 없을 것이며, 모든 눈물이 씻겨질 것입니다. 전쟁과 전쟁의 소문도 없을 것이며, 사별도 아픔도 없을 것이고, 사람을 질질 끌고 불행하게 하는 일들이 한 순간도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나라를 바라보고 때로는 생활이 여러분을 속이고, 때로는 좁은 길을 가면서 고난과 박해가 있을지라도, 기쁨으로 감수하여 하늘의 큰 상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