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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바칠 것 (마 23:23~24; 레 27:2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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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바칠 것 (마 23:23~24; 레 27:26~34)


제가 최근 5년 반 동안 '레위기'로 설교한 것은 처음입니다. 레위기에 등장하는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번제, 소제 등의 제사법들과 희년법, 정결법 등을 다루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시행한 각종 제사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며, 제사 중에 바쳐진 짐승들은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려서 죄인을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내다보는 그림자들입니다. 

완전한 삶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거룩한 자기 백성들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와 구별되어 거룩하게 제사장 나라로 살아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 받은 우리가 거룩하게 이 세상에서 예배적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요지: "나는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청지기로 살아야 한다." 

첫째로, 우리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야 합니까? 

이전에 부정했던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하나님의 장자 클럽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레위기는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레위기의 결론인 레 27장 마지막 단락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서원과 봉헌된 물품들의 평가'를 다룹니다. 사람, 가축, 재산, 땅을 하나님에게 바치겠다는 서원 자체가 바치는 그 사람을 더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주신 복에 대한 진지하고 구체적인 헌신의 표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강요가 아니라 자원해서 하는 모든 약속이나 봉헌은 우리 전 생애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온전히 바쳐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가축 가운데 처음 난 것은 본래부터 여호와의 것입니다. 출 13:2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건 짐승이건 처음 태어난 것은 하나님의 것이니 바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짐승의 첫 새끼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서원을 갚을 목적으로 예물로 드릴 수 없습니다 (26절). 그렇다면 우리는 맏아들 혹은 맏딸을 하나님에게 바쳐야 합니까? 자식이 한 명 뿐이라도 하나님에게 바쳐야 합니까? 차녀와 차남은 하나님에게 바치지 않아도 됩니까? 우리 가운데 가축을 키우는 사람은 것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레위기의 율법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맏아들이자, 외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재물로 내 놓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하나님의 '장자의 총회'에 들어와 있습니다 (히 12:23). 우리 맏아들이나 맏딸만 장자가 아니라 성도 모두가 장자입니다. 우리가 '맏아들 클럽'에 들어와 있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상속을두 배나 받고 있으며,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게 바쳐야 합니다. 롬 12:1-2절을 기억합시다: 우리 심령과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바쳐야 합니다. 

부정한 짐승의 첫 새끼도 여호와의 것입니다. 만일 바치려하는 것이 (돼지와 같이) 부정한 짐승이면, 바치려하는 사람은 그것을 제사장이 정한 값에 오분의 일을 더해서 다시 살 수 있습니다. 만일 부정한 짐승의 주인이 그 첫 새끼를 살 수 없다면, 짐승을 팔아야 하고, 그 수익금은 성소로 들어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결하거나 부정한 율법의 구분이 사라졌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정결하고, 예수님 밖에 있으면 부정하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얼마나 인격적인 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한 첫 새끼를 5분의 1을 더 얹어 제사장으로부터 사들일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양보하십니다: "너희가 원한다면 도로 가져가라! 그러나 돈으로 지불하라!" 이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까요? 우리가 우리 뜻을 세워 놓고 아버지 하나님께 떼를 쓰고 달라고 졸라댈 때, 종종 하나님이 허락하시기도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라면 그냥 허락하실 것이지 왜 돈을 5분의 1을 더해서 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에게 돈이 필요합니까? 그 이유가 레 27장에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서원했던 것 무를 경우 즉 다시 살 경우, 돈을 바치도록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교육하기 위해서입니다. 떼를 쓰며 달라고 조를 때 하나님이 주시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여호와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속전으로 우리 대신 죽으셔서 우리를 되 찾으셨음을 늘 감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 바치는 예물 (히. 헤렘) 가운데에는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고, 재산 가운데 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예물을 회복하거나, 다시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한 예물이기 때문입니다 (28절). 

사람 중에서 온전히 바쳐진 사람은 누구든지 다시 살 수 없습니다. 그는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29절). 또 29절의 말씀은 사람을 제물로 죽여서 바쳐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들을 우상 몰렉에게 바치는 것을 하나님이 아주 싫어하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거나, 하나님의 예배를 무시하는 지독한 범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죽여라는 뜻입니다. 살인자를 살리기 위해서 돈을 받지 말고, 분드시 죽여라고 명하십니다 (민 35:31). 사람의 목숨이 돈 몇 푼으로 계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피살된 사람의 생명은 죽인 사람의 생명으로만 해결될 뿐입니다. "누구도 형제를 결코 대속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그 속전을 지불할 수 없도 없음은, 그들의 생명을 대속하는 값이 너무도 엄청나서, 사람은 영원히 감당할 수 없음이다. 누구도 영원토록 살 수 없으며, 결코 무덤을 보지 않을 수 없다" (시 49:7-9).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님을 영단번의 제물로 십자가에 바치셨습니다. 왜 바치셨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3:16).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며, 죽음-무덤을 보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이전에 도무지 속량 받을 수 없는 죄악 가운데 빠져서 세상과 사단을 따르던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고 자신의 생명을 속전으로 지불하셨기에, 하나님과 화목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일에 바쳐드릴 수 있습니다 (골 1:20). 우리가 신실한 천국의 청지기로 살려면 주님의 대속의 희생과 구원의 은혜에 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신 분을 위해서 충성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청지기로 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감사와 헌신의 표시로 삶 전체의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작물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입니다 (30절). 하나님에게 바친 십분의 일을 다시 찾고 싶으면, 그 값의 오분의 일을 더 지불하고 살 수 있습니다 (31절). 소 떼와 양 떼의 십일조, 곧 막대기 아래로 지나가는 열 번째 것은 무엇이나 여호와의 거룩한 것입니다 (32절). 가축 중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의 순서를 바꿔치면 안 됩니다. 만일 좋은 짐승을 자기가 가지려고 좋지 않은 짐승과 바꿔치기하면, 둘 다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33절). 이것들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하신 명령들입니다 (34절). 

하나님은 서원했던 것을 취소하도록 허락하시는 분이시며, 심지어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 성물까지도 사람이 그 물건을 꼭 갖고 싶어 할 때는 그것을 가지게 하고 대신 돈을 바치도록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종종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고, 우리를 많이 봐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는 구약의 명령이니, 신약 시대에는 안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비록 신약에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드물지만 (마 23:23, 눅 11:42), 신약에도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주장이 없기에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하되 10분의 1이라는 문자 그 자체에 얽매이면 안 되고 각자의 양심을 따라 최선을 다해 헌금해야 한다고 봅니다. 

처음으로 십일조가 나오는 곳은 창 14:18-20절입니다. 북부지역 네 왕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돌아오던 아브라함은 살렘왕 멜기세덱의 영접과 축복을 받습니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그 얻은 것에서 십일조를 드립니다. 아무 강요도 없었고 자발적인 것이었고, 소수의 군사로 다수의 적을 완벽하게 격파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물이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으로 드린 헌물이었습니다.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가던 중에 야곱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말에서,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감사의 표시로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창 28).   

모세의 율법에 보면, 땅의 소산과 소나 양의 십분 일을 여호와께 속한 거룩한 것으로 엄격하게 규정한다 (레 27:30-33). 민수기에서는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의 용도는 아무 분깃을 받지 못한 레위인들이 성막 봉사에 전념할 수 있독 하기 위함이라고 언급합니다 (민 18:20-32). 십일조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고, 그것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에 가서 먹고 즐기도록 하십니다 (신 14:22-29). 또 매 삼년 (안식년 후 제 3년과 제 6년) 끝에는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데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십일조는 감사의 표시이며, 하나님의 성막 예배를 유지하는 수단이며, 가난한 자를 돕는 차원에서 시작된 명령입니다. 

사사시대에는 십일조가 시행되지 않아서 레위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살 길을 찾아 배회하며, 우상까지도 섬기며, 한 가정의 제사장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삿 17:7-10, 18:18-20). 그 후 다윗이나 솔로몬 왕 시대에는 십일조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한 참 사랑을 상실한 이스라엘을 향해 경고하면서 겉모양만 남은 십일조를 비판합니다. 그 후 히스기야 왕 시대에 이르러,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제사를 회복하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를 시행하게 한 사실이 역대하 31장에 나타납니다. 그 후 느헤미야와 말라기 때 십일조를 다시 강조합니다 (느 10:38, 12:44 등). 

신약에서 십일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십일조에 관해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신 바가 거의 없습니다. 다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면서 십일조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하셨습니다 (마 23:23, 눅 11:42).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드리는데 있어서 매우 꼼꼼하게 계산하여 시행했으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습니다 (눅 18:12). 이런 형편에서 주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 곧 사람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어야 함을 깨우치십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하셨습니다 (마 23:23). 이 말씀의 의미를 풀어 쓴다면 “이것도 행하고(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행하고) 저것도(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입니다. 

초대교회는 십일조보다 더 많은 것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가진 재산을 자원하여 팔아 어려운 자들과 나누어 사용했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행 4:32). 

하나님은 전부를 바치지 말고 10분의 1만 바치도록 하셨습니다. 즉 대표의 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사실 ‘십일조’라는 문자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의 원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언제든지 필요할 때면 하나님에게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이 필요할 때에는 자신의 것을 거두셨습니다.   

신약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구약의 성취이며 완성입니다. 구약의 원리와 명령은 신약에도 그대로 살아있어야 하고, 그 의미가 내면화되고 더 완성적이어야 합니다. 구약의 헌금의 원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나의 토지 (기업)가 하나님의 것이며, 거기에서 발생하는 소출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최소한 십일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 이상도 기꺼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유지하고 복음사역을 활발하게 이루어나가기 위해 십일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되 율법적인 의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율법의 잣대를 적용해서 정죄하거나 위협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장자 클럽' 소속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님이 화목제물과 속전으로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받은 복이 2배이듯, 바쳐야 할 것도 많습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갈 2:20). 우리 자신과 우리 재물을 청지기로 바칩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속전을 지불하셔서 기업 무르는 고엘의 역할을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였던 보아스가 나오미의 재산을 기업 무르는 자가 되었듯이, 예수님이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과 복을 회복하셨습니다. 올바른 신앙고백과 감사의 마음으로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 물질, 재능의 청지기로 삽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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