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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심신이 지쳐 있을 때 (왕상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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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신이 지쳐 있을 때 (왕상 19:1~8)
  

현대인들이 많이 쓰는 말 중에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바쁘다, 바빠!” “쌓인다, 쌓여!” 무슨 말입니까? 일상이 너무 분주하고 할 일이 많다는 겁니다. 그래서 과로하게 되고, 스트레스가 해소될 겨를도 없이 계속 쌓여만 갑니다. 게다가 복병처럼 이런 저런 고난이 닥쳐옵니다. 그러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지쳐 있습니다. 심신이 지쳐 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쉬고 싶어 하고, 하다못해 찜질방이라도 찾아갑니다. 어디에 좋은 피로회복제나 강장제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 불티나게 팔립니다. 

요즘 휴가철인데, 1년이 한두 번 있는 휴가를 잘 선용해서 스트레스도 해소하고, 심신을 회복하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데 휴가를 잘못 보내서 오히려 더 피곤해지고, 스트레스가 더 쌓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휴가도 한 건을 하는 식으로 하기 때문이 그런 일이 종종 생깁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심신이 지칠 때 어떻게 회복하면 좋을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비단 휴가 기간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심신을 강건하게 회복하고 관리하는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보면 누가 등장합니까? 엘리야 선지자!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입니다. 흔히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 둘을 말하라면 모세와 엘리야를 꼽습니다. 마태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 몇을 데리고 변화산 위에 올라갑니다. 그때 갑자기 예수님께서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 이후 부활하실 모습, 더 나아가 성도들의 부활할 모습을 예고편으로 보여주신 겁니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이 나타났는데, 누구누구입니까? 마17: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모세와 엘리야입니다. 이렇듯 모세는 두 말할 필요도 없고 엘리야도 대단한 인물입니다. 

그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가장 사악한 왕 아합의 폭정에 항거한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아합은 무엇보다 결혼을 잘못 했습니다. 이방 나라 시돈의 공주 이세벨과 정략결혼을 했는데, 그 여자가 시집 올 때 우상 신상을 다 끌고 왔습니다. 게다가 바알신과 아세라신 선지자들을 왕궁에 끌어들이고, 백성들에게 우상 숭배를 강요합니다. 엘리야가 이를 척결하고자 갈멜산에 백성들과 450명의 바알 선지자, 그리고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를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영적 대결을 펼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인가? 아니면, 바알 신이 참 신인가? 결판을 내려고 한 겁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주문을 외우고 별 짓을 다 해도 바일 신은 묵묵부답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자 제단에 불이 내려와 흥건하게 고여 있던 물을 핥아버리듯 증발시키고 번제물을 다 태워버립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바알 선지자들은 겁에 질렸고, 엘리야는 여세를 몰아 그들을 처단합니다. 그뿐 아니죠.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자 3년 6개월 동안 가뭄으로 고생하던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렸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나온 내용들입니다. 한 마디로, 기적의 연속이었습니다. 
  

[1] 엘리야의 침체 : 연약한 인생 

그런데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의 모습은 전혀 뜻밖입니다. 슬럼프에 빠진 엘리야의 모습입니다. 육적으로 영적으로 침체에 빠진 어처구니없는 모습입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 모습은 위대한 선지자의 모습의 아니리 연약하기 짝이 없는 한 일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연히 그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이게 엘리야의 본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위대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위대한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엘리야도 그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1절~2절 보면, 갈멜산에서 대승을 거둔 후 왕비 이세벨이 이를 부득부득 갑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서 엘리야를 협박합니다. “내일 이맘때까지 내가 너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그때 엘리야의 반응이 어땠습니까? 혼비백산하여 도망합니다. 3절에 보면, 그가 있던 이스르엘에서 브엘세바까지 도망갑니다. 이스르엘은 북 이스라엘에 있는 성읍인데, 브엘세바는 남 유다의 최남단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도망갈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멀리 도망간 겁니다. 그 거리가 약 140 킬로미터나 됩니다. 4절 보면, 사환과 헤어진 후에는 더 멀리 도망갑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하룻길은 대개 32킬로미터쯤 되는 거리입니다. 그때 엘리야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는 그렇게 멀리 도망간 후 한 로뎀 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이제는 차라리 죽고 싶다고 하나님 앞에 투정을 부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엘리야의 모습과는 전혀 딴판입니다. 

그 모습이 하도 황당해서 어떤 신학자는 이를 미화시켜 해석합니다. 엘리야가 잠시 기도하기 위해 고요한 장소로 옮겨 갔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굳이 미화시킬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있는 그대로 진실을 말하는 책입니다. 엘리야의 평소 모습과 너무 달라서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오히려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별수 없는 존재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약5:17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 ”(Elijah was a man just like us. -NIV) 무슨 말인가요?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엘리야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 역시 지칠 수 있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낙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연약하여 지칠 수밖에 없는 모습, 그게 바로 인생의 본래 모습입니다. 

어디 이게 엘리야 그 사람만의 모습이겠습니까?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다 그랬습니다. 바울 같은 사람도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하지만 그에게도 비슷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고후1:8 “ ...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 계속되는 고난 가운데 바울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 차라리 죽고 싶었다는 솔직한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게 연약한 인생의 실상입니다. 참 감사하고 다행스런 것은 이렇게 황당한 모습을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마구 책망합니까? 윽박지릅니까? 꼴 보기 싫다고 상대도 안 해 주십니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연약할수록 오히려 측은해 하시고, 감싸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42:3 “ ...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 ”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기에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어 위로해주십니다. 그리고 그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2] 엘리야의 회복 : 하나님의 위로 

‘위로’라는 말을 주목해 보면 좋습니다. 영어로 위로라는 말은 컴포트(comfort)인데, 본래 두 개의 단어(com+fort)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컴(com)은 ‘함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포트(fort)는 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함께해 주면서 힘을 북돋워주는 것이 바로 ‘위로’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와 함께 해 주십니다. 지쳐 있는 그의 육체도 영혼도 회복시켜 주십니다. 

① 육체의 회복 :

먼저, 그의 육체를 어떻게 회복시켜 주셨는지 보시죠. 5절~6절. “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로뎀 나무 아래에서 너무 너무 지쳐서 잠에 곯아떨어진 엘리야에게 천사가 나타납니다. 

이 천사는 7절 보면, ‘여호와의 천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여호와의 천사’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육신을 입고 탄생(성육신)하셨지만, 그 이전에 영원 전부터 구약 시대에 존재하셨고, 이따금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이런 예가 구약 성경 곳곳에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서 어떻게 하십니까? 5절 다시 보시면,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를 일으켜 먹이십니다. 숯불로 구운 떡, 물 한 병을 준비해 주십니다. 엘리야가 그것을 먹고 난 후에는 잠을 푹 재우십니다. 

여러분, 이 말씀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해 생각하면 육체가 휴식을 취하고 좋은 것을 먹는 마시는 것을 신앙과 별 상관이 없거나 더 나아가 신앙과 배치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지치고 연약해집니다. 또 육체가 연약해지면 그 안에 있는 영혼도 연약해질 수 있습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엘리야가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했죠, 비가 오도록 사력을 다해 기도했죠, ... 그런 가운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육체는 아마 파김치처럼 지쳐 있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그의 영혼도 연약해지고, 그런 가운데 이세벨의 협박에 마음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기도가 부족하다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말씀 들으라고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잘 먹이고 충분히 잠을 재우셨습니다. 

중세에 유명한 수도원이 있었습니다. 그 수도원장이 얼마나 훌륭한지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성자라고 칭송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경건한 성도가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자기도 훌륭한 수도사가 되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그는 수도원장이 어떻게 하나 보려고 졸졸 따라다닙니다. 그러다 저녁이 되어 수도원장이 자기 방에 들어가자, 또 어떻게 하나 문틈으로 들여다보았습니다. 밤새 기도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하나님! 몹시 피곤하네요. 오늘은 그냥 잡니다!” 하더니 벌렁 누워 이내 코를 곯고 자더랍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이므로 육체만 지나치게 보호하고 쾌락으로 몰아가도 문제입니다. 동시에 육체를 가진 존재이므로 영혼만 위하고 육체를 학대하거나 소홀히 여겨도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우리가 지쳐있을 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푹 자는 것도 신앙적인 겁니다. 힘들 때는 좋은 음식을 많이 먹는 것도 신앙적인 겁니다. 혹시 오해하실 까봐 다시 짚고 넘어가지만, 그렇다고 게으를 정도로 자면 곤란하죠. 너무 먹는 것만 밝혀도 곤란하죠. 어디까지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합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먹이고 마시고 잠을 재우시고 ... 이렇게 해 주시자 엘리야는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8절.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기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엘리야는 호렙산으로 갑니다. 그곳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 거룩한 성산(聖山)입니다. 그가 도망가 있던 곳의 부근 브엘세바에서 호렙산까지는 대충 400 킬로미터입니다. 상당한 거리죠. 40일간 걸렸다고 하니까, 비교적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먼 거리를 갔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회복됐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가 호렙산에 갔다는 것 자체는 이미 그의 영혼도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육체적으로 절제하면 영적으로 맑아지고, 영적으로 의욕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절제된 생활도 필요하고, 금식도 필요한 겁니다. 그러나 도가 지나쳐 육체가 너무 지치면 영적인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체를 강건하게 관리하는 것도 신앙생활의 중요한 지혜입니다. 엘리야가 육체의 건강이 회복되면서 영적인 의욕이 살아났고, 그래서 다른 데 가지 않고 하나님의 성산 호렙으로 간 것입니다. 

② 영혼의 회복 :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영적 회복을 도와주십니다. 9절.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 ” 엘리야가 굴 속에 있을 때 어떤 일이 생겼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세워놓은 후 바람과 지진, 그리고 불을 보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임재하심의 가시적인 증표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에 불과하고, 정말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12절.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들여왔습니다. 영혼의 회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특별히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새 힘이 넘칩니다. 

목동 출신 목사가 쓴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양의 생리를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흔히 양들이 목자를 따라가다 지치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양은 완전히 뒤집어져서 에 다리를 공중으로 향하고 버둥거린답니다. 절대 혼자 못 일어나는 것이죠. 그때 얼른 목자가 다가가서 일으켜 주고, 주물러 주고, 푹 쉬게 해줍니다. 그리고 양의 귀에 대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속삭입니다. “얘야, 나야 나 ... 걱정하지 마. 그러기에 내가 뭐랬니? 조심하라니까 ... 이제 괜찮아.”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안심을 합니다. 그리고 새 힘을 얻고 다시 생기를 되찾습니다. 

또 이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악기 연주자가 아무리 거장이라도 악기를 놔두었다 다시 연주할 때는 반드시 조율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거장이라도 별 수 없죠. 삑삑 소리를 내게 됩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조율(Spiritual Tuning)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심신이 지쳤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긴장 상태에서 과로한 것이죠.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게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놓쳤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무엇을 바라보았습니까? 3절.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 ” 자기 앞에 있는 형편 즉 상황을 보았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승리했던 이유는 자기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알 선지자들, 아합 왕과 완악한 백성들을 바라보았다면 기가 죽었을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담대히 나섰고,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상황만 따져 보면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나아진 겁니다. 왜 그래요? 바알 선지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아합 왕도 백성들도 한풀 꺾였습니다. 이세벨만 독이 올라서 이를 갈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본래 그래요. 이렇게 따져 보면, 형편이 더 나아진 겁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속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면 그렇게 어이없이 도망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엘리야의 문제를 아시는 고로 말씀을 들려주시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하신 겁니다. 이렇게 해서 엘리야가 영적으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한참 종교개혁을 선도하고 있는데, 핍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교황청에서 그를 죽이려고 이를 갑니다. 본래 신부 출신이었던 그로서는 정말 너무 두려웠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아내 카타리나(Katharina von Bora)가 기지를 발휘합니다. 하루는 방안에 처박혀 있는 루터에게 카타리나가 상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루터가 놀라서 물었습니다. “여보, 누가 죽었소?” “죽었죠!” “아니, 누가?” “누구이긴요, 하나님이죠.” 루터가 화를 내며 말합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불경스럽게 ... 하나님이 죽다니!” “그러게요 ... 하나님은 절대 죽지 않죠. 그런데 당신의 지금 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하나님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같아요.” 그러자 루터는 회개하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종교개혁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적으로 지쳐 있을 때 영적인 조율을 하십시오, 영적인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십시오! 그럴 때 새 힘을 얻고 영적으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3] 엘리야의 재기 : 새로운 사명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정말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게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무리 육적으로 영적으로 회복되었다 해도 만일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또다시 무너지고 말았을 겁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 즉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계속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시죠.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의 사명을 자각시켜주는 말씀입니다. 사명자가 왜 이러고 있느냐는 겁니다. 15절 이하에 보니까,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지금은 득세하고 나라를 망치고 있지만, 하나님은 계획을 다 가지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사명을 수행하라는 겁니다. 

무슨 내용입니까? 15절~17절 보면, 세 사람이 언급됩니다. 아람 왕 ‘하사엘’, 북 이스라엘 왕 ‘예후’, 후계자 ‘엘리사’ 등입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을 심판할 ‘인간 막대기’를 세우려고 계획하신 겁니다. 사악한 아합과 이세벨을 하사엘을 통해 심판하시고,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예후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고, 그래도 백성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엘리사를 통해 갈아엎을 것을 예고하신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새 역사를 위해 엘리야더러 돌아가서 세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겁니다. 

그 말씀을 들은 엘리야는 새로운 의욕을 가지고 떠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명을 완수합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2장을 보면, 모든 생애를 승리하고 죽음을 보지 않은 채 하늘에 들려 올려집니다. 에녹과 더불어 아주 특이한 생애를 마친 겁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명심할 게 있습니다. 우리가 육적으로 영적으로 회복되는 데에는 다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단순히 편해지려는 게 아닙니다. 사명을 위해서입니다. 할 일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휴가도 그런 것 아닙니까?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게 아니죠. 레크리에이션, 무슨 말입니까? 휴양, 오락 등으로 번역되는데, 그 단어를 잘 보면 ‘재창조’(re-creation)입니다. 우리 육체와 영혼이 지쳤을 때 새 힘을 얻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말이 있죠. 스트레스에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유쾌한 스트레스인 ‘유스트레스’(eustress)와 불쾌한 스트레스인 ‘디스트레스’(distress)입니다. 디스트레스는 힘만 들고 마음을 상하게 하고 지치게 하는 스트레스입니다. 반면에 유스트레스는 적당한 긴장감과 활력을 주는 좋은 것입니다. 가장 좋은 유스트레스는 바로 사명입니다. 사명을 갖고 살아가면 날마다 활기찬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마11:28~30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일단 예수님의 품안에 안겨 위로를 받으라는 겁니다. 그러나 위로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를 지라고 말씀합니다. 소에게 멍에는 결코 불편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몸에 잘 맞는 멍에는 소에게 평안을 줍니다. 일을 할 때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적당한 멍에는 축복이요, 그로 인해 능력이 생깁니다. 

흔히 우리 주변에서 은퇴하신 분들 중에 건강이 급속히 나빠지는 경우를 봅니다. 왜 그런가요? 편해졌는데 왜 그런가요? 일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사명이 사라지면 사람은 죽는 겁니다. 그래서 은퇴하기 전에 할 일을 잘 준비해야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운아입니다. 은퇴해도 갈 데가 있고, 할 일이 있습니다. 교회 오면 됩니다. 주의 일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천국 가는 그 날까지 사명이 있습니다. 기도의 사명, 사랑의 사명, 전도의 사명, 선교의 사명, ... 그게 내 인생의 활력을 유지시켜 주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심신이 지치기 쉬운 우리의 삶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지혜롭게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혹시라도 엘리야처럼 심신이 지쳐 있고 슬럼프에 빠져 있습니까? 하나님의 방법으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하시고, 남은 생애 정말 보람있는 인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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