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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이 있었더라면… ! (눅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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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더라면… ! (눅 17:5~6)


할렐루야! 
더위 때문에 힘든 분들이 많이 계실 겁니다. 
그러나 더워야 되는 일이 많습니다.
이 더위 때문에 과일이 익어가고 이 더위 때문에 변화되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더워야 장사가 잘 되는 일도 있습니다.
추운 겨울을 생각하며 ‘이만하면 견딜 만하다’라고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저는 몸에는 땀이 많이 나는데, 얼굴에는 땀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가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고, 
힘들어 보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억울한 지요 …. 

날이 덥지만 더운 날보다 더 뜨거운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불같은 성령의 역사가 임할 줄 믿습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꿈

어느 지역에 가든지 그 지역을 대표하여 말할 수 있는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랜드마크(landmark)’라고 합니다. 

랜드마크(landmark)란, 탐험가 등의 사람이 특정 지역을 이동하는 중에 
원래의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둔 지리학상의 상징물을 가리킨다. 
현대적인 의미로의 랜드마크는, 건물이나 상징물, 그의 구조물과 같이, 
쉽게 인식을 할 수 있는 것들을 전부 포함한다.

미국의 뉴욕을 말하면‘자유의 여신상’또는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이 떠오르고
프랑스 파리를 말하면 ‘에펠탑’호주 시드니에는 ‘오페라하우스’… 등 
어느 지역을 말할 때 쉽게 떠오르는 건물이나 상징물이 랜드마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부천의 랜드마크는 무엇일까요?
부천에 세계에서 제일 사우나가 있고, 큰 캬바레가 있다고 합니다.
부천에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부천의 랜드마크가 되게 하려는 꿈이 있습니다.
꿈꾸며 기도합니다. 두고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통해 엄청난 일들을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는 그 일에 쓰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역에만 랜드마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그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특징, 특성 … 등
사람의 평가에 기준이 되는 개인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캐릭터(character)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생각하며 무엇을 떠올릴 것 같습니까?
여러분의 이름을 들으면 무엇을 떠올릴 것 같습니까?
‘아 그 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지 신앙생활 잘 하는 사람이야.
그 사람 특별한 사람이지, 용기 있는 사람이야 ~’ 

여러분에게는 무슨 특징이, 마크가 있습니까?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는 향기를 풍기고, 
예수 믿는 사람다운 느낌이 들어야 하고
그 사람이 가진 목표나 비전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쉽게 인식될 수 있어야 합니다.

비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 가는 꿈입니다. 
모든 사람들은‘되고 싶고,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갖고 싶고, 되고 싶으십니까?

야망(ambition)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비전(vision)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큰 꿈을 가지고 있지만 야망일 뿐
하나님의 영광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전은 쉽게 금방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가면 실현될 수 있는 것은 비전이 아닙니다.
남에게 가진 것을 받는 것도 아니고, 
내가 가진 것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비전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꾸는 꿈을 말합니다.

비전은 현재의 능력과 가능성을 초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비전이 있는 사람은 모험을 합니다.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전이 없는 사람은 비전을 가진 사람을 향해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비난하며 투덜댑니다.

비전은 남이 볼 수 없는 보화를 보는 능력입니다.
그런 비전을 품은 하늘 사람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비전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삶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하며 살아야 합니다.

실패한 사람은 실패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 다른 사람이 방해했기 때문에 
- 시대를 잘 못 만났다고
- 정치를 잘 못해서
- 도움 받지 못해서 … 
- 돈이 없어서 … 실패했다고 하며 남의 탓으로 돌립니다. 

물론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에 대한 대부분의 변명은 핑계일 뿐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잘 되면 ~ 안되면 남의 탓”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사시는지요?

하거든 용서하라

오늘은 우리들의 삶의 태도와 믿음의 크기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던 제자들이 한 가지 요청을 합니다. 

본문 5절에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 ”(눅17:5)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믿음을 더 해달라고 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형제를 실족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 …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니라”(눅17:2)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용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 …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눅 17:3~4)
이 가르침에 대한 제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 실족하여 넘어질 수 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우리의 말과 행동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부족한 존재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 …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눅 17:1)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작은 자”라고 표현되는 연약한 사람들이 
신앙의 뿌리를 잘 내려 강하게 설 수 있도록 배려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죄와 단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경고하되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이유도 묻지 말고 그냥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말은 
제한 없이, 끝없이 계속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이 두 가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혼자 우뚝 서서 살기도 어려운데 …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도와주어야 하고
한번 용서하기도 어려운데 반복해서 계속 잘 못하는 사람을 용서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어려운 일들을 잘 실천하며 살기 위해
“ …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 ”(눅 17:5) 라고 했던 것입니다. 


있었더라면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 17:6) 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 것을 의미하는 ‘겨자씨’를 비유로 하여 믿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주보와 함께 ‘겨자씨와 말씀이 들어 있는 작은 봉투’를 드렸는데 … 받으셨나요?
지난 번에 장로님들이 성지순례 때 이스라엘에서 가져왔고 
「기드온선교회」에서 성구와 함께 정성으로 봉투에 담았습니다.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눈이 안 좋으신 분은 잘 보이지도 않을 크기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는 것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작은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크기가 작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아무리 호박만한 씨앗이라 해도 죽은 것, 생명이 없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다면 아무리 작은 씨라도 
땅 속에 심겨지면 뿌리를 내려 싹을 틔웁니다. 
그 작은 씨앗이 노란 꽃을 피우며 다 자라면 3m 정도의 크기로 자랍니다.
겨자는 1년생 풀이지만 크기와 잎의 무성함이 나무와 같아서 ‘겨자나무’라고도 불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비유하시며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 13:19)고 하셨습니다. 
작더라도 살아 있으면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작더라도, 보이지 않아도, 믿음이 없는 것 같이 보여도
“겨자씨 한 알과 같은 믿음”이라도 살아 있으면 싹이 트고 성장하고 변화되며 열매 맺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살아 있는 믿음인가, 죽은 믿음’인가가 중요합니다.
생명력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은 움직이며 성장하며 열매를 맺지만
아무리 커도 죽은 씨는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겨자씨 보다는 크겠지요.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잘 것 없이 작은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살아 있으면 생명력이 있으면 그 믿음은 자라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줄만한 큰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작아도 살아 있는 믿음이라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는
“ …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고 했습니다. 

겨자씨 같이 작더라도 생명 있는/살아 있는 믿음이 있으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 ”(막 9:23)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일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지식으로 계산하려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이 이해되고 계산 됩니까?
방송국에서 ‘성경이 이해되는가? 안되는가?’에 대해 
연구한다고 하는데 이해되고 연구된다면 우리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해하면 되지, 왜 믿습니까?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머리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 이루실 일을 다 이해할 수 있고
촬영할 수 있고,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가 무엇 하러 믿습니까?

내 머리로 이해되고, 내 계산으로 답이 나오고
내 손으로 증명해 보일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그 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해 안되도, 사람들이 믿을 수 없다 해도, 
내 힘으로는 안되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 우리의 작은 머리로 이해 안되면 안되는 것입니까?
- 인생 70~80 밖에 안되는 연륜과 경험으로 안되었던 것은 안되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공부를 얼마나 많이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여러분이 배운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면 안되는 것입니까?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 … 등으로 
‘안된다’라고 정해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다 안된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무엇을 하자고 하면 
무조건 ‘그것은 안된다’고 해보지도 않고 말합니다. 
귀를 열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무조건 안된다고 결론짓습니다.


‘곤들메기’라는 물고기가 있습니다. 
압록강, 두만강 수계(水系)에 분포하며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는 난폭한(?) 물고기입니다. 

* 수계(水:물 수;系:이을 계): 본류와 이에 주입하는 모든 지류를 합한 강의 한 계통을 말함

심리학자들이 곤들메기로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곤들메기와 작은 물고기를 수족관에 넣고
작은 물고기를 마음대로 잡아먹으며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곤들메기와 작은 물고기 사이를 얇은 유리로 가로막았습니다. 
곤들메기는 눈앞의 사냥감을 향해 돌진했지만 유리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후 유리를 치웠습니다. 
그러나 곤들메기는 자기 앞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먹이감을 보고도 전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물고기들을 잡아먹으려 했지만 유리에 계속 부딪쳐 머리 아팠던 경험이 
물고기들은 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결국 눈앞에 먹이를 두고도 먹지 못해 2주일쯤 후, 굶어 죽고 말았습니다. 
<「생명의 삶 플러스」08년 6월호 2권 참조>

잘 들으세요. 
곤들메기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내 생각으로 …, 내 경험으로 …, 내 판단으로 …, 지식으로 …
불가능한 일이야, 할 수 없어, 안돼’라고 쉽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판단이 정확하고 옳습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생각, 경험, 판단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 자체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경험으로, 판단으로 믿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을 ‘신앙인’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을 믿으면 
성경을 다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7:5)
“…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창17:5)
사라에게는 아들을 낳을 것이고,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창 17:16)
“ …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창17:16) 
하나님의 이 약속은 백 살이 다 된 남자 ‘아브라함’과 
구십 살이 된 여자 ‘사라’에게 하신 것입니다.(창17:17) 
100살 할아버지와 90살 할머니가 자식을 낳는다는 것이 이해됩니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아브라함도 어이가 없어 엎드려 웃었습니다.(창 17: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창17:17)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이삭’이 태어났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히11:1)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고, 이해 안돼 고개 흔들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비웃음거리가 될 만한 일들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155가지 신비> 라는 책을 보면
(‘시아’출판, 스테픈 주안 지음, 김영수 역)
- 브라질의 한 소녀가 6살 6개월 7일에 출산
- 미국 오레곤의 한 여인 57세 6개월 15일에 자연 분만
- 18세기 러시아의 한 여인은 69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67명이 어른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세쌍둥이 7번, 두 쌍둥이 16번, 한명씩 16번 - 모두 39번 해산)

이런 일들이 이해가 됩니까? 믿어집니까?
세상에는 이런 기이한 일이 많습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 역사가 …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모태신앙인인지, 
예수 믿은 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는/생명 있는/성장하는 믿음이냐,
아니면 멈춰 있느냐/병들었느냐/죽은 믿음이냐를 보십니다. 

우리는 살아있는/생명 있는/자라는/변화되는/열매 맺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들음에서 나며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깁니다. 자랍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직분이 있고 봉사를 열심히 해도
말씀을 듣지 않으면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먹지 않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고 했습니다. 
주일낮예배, 주일밤예배, 수요예배, 금요심야, 속회 … 등
공적인 모임/말씀을 듣는 자리, 
말씀을 배우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영적으로 허약해지고 병들고 … 
결국 죽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강에 살아 있는 물고기는 여기저기 헤엄치며 다니고
때로는 강을 거슬러 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은 물고기는 아무리 커도 둥둥 떠다니며 썩어갑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지만
살아 있는 믿음의 사람은 말씀을 듣고 믿음의 싹을 키우고 영적으로 성장하지만 
병들어 쇠약하거나 생명을 잃은 사람은 
같은 예배를 드리지만 영적으로 둥둥 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이상한 흐름이 있으면 그 흐름에, 그 말에 휩쓸립니까?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물고기가 살아있다면 물 흐름도 뚫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누가 뭐랬다고 … 기분 나쁘다고 … 
삐쭉거리고/씰룩거리는 … 이상한 흐름에 휘말린다면
다 병든 증거요, 죽은 믿음이라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교회는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도 다르고, 
환경도, 외모도, 재능도, 삶의 방법도 …
각기 다른 사람들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함께 같은 일을 한다 해도 
서로 접근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성품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통해 상처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혹 잘 못해도,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 …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 ”(눅17:4) 고 하셨습니다.

누군가 내게 실수하고, 잘못을 하면 
참거나 용서하기 보다는 경고하고 나무라는 것을 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한 두 번이 아니어도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마음으로 용서하라고 했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간에도 용서하니까 10년, 20년 사는 것입니다.
용서가 안 되면 단 며칠도 살 수 없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형제간에, 자녀가 부모를 …, 형제가 형제를 …, 자녀가 부모를 …,
용서하니까, 덮어주니까, 참아주니까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 흐름이 어디로 가도 
생명 있는, 살아 있는 믿음의 사람은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 맺습니다.
배려하고, 용서하고, 덮어 주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 빛 되고 소금된 삶을 삽니다.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흔듭니다.
세상은 우리의 평안을 흔듭니다.
세상에는 가정의 화목을 깨려고 합니다.
교회의 성장을 가로막습니다. 신앙의 성숙을 가로 막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있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 
생명 있는, 살아있는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의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빛 되고 소금되어 …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겨자씨 한 알만한 크기여도 살아 있는 믿음의 사람, 
생명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보이는 것 때문에, 느끼는 것 때문에 낙담하고 엎드러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백성, 비전의 사람으로 사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흐름이 어디로 가도 살아 있는 생명은 흐름을 거스리며 
흐름에 상관없이 자기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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