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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숙을 향한 여정 (고전 9: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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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을 향한 여정 (고전 9:24~27)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 없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월계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 없이 달리듯이 달리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 올림픽 정신

이제 며칠 후면 베이징 올림픽이 개막됩니다. IOC로부터 출전 금지조치를 받았던 이라크도 출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출전금지 소식에 눈물을 흘리던 어느 여자 선수를 보며 마음이 짠했는데 잘됐습니다. 후텁지근한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울울해지기 쉬운 때인데, 올림픽을 보면서라도 마음이 시원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을 바라보는 제 마음은 그다지 즐겁지 않습니다. 흔히 올림픽을 평화의 제전이라고 하지만, 올림픽 정신이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인 것 같습니다. 스포츠는 자본의 잔치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투입된 자본만큼 메달도 나옵니다. 경제학자들은 금메달 획득이 일으키는 경제효과를 분석합니다. 그러니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몇 억 원씩 포상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라는 책을 보면 재미있는 일화가 나옵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가 건곤일척의 전쟁을 벌일 때의 일입니다. 살길이 막막해진 그리스인들 몇이 페르시아 진영으로 탈주해왔습니다. 그들은 그리스군의 동태를 묻는 심문자에게 그리스인들이 지금 올림피아제를 벌이면서 체육 경기와 전차 경주를 관람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 통에 운동 경기라니, 심문자는 대체 그 경기의 상품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리스인들은 “올리브 가지로 엮은 관이 수여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이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아, 마르도니오스여,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필이면 이런 인간들과 싸우게 만들었는가? 금품이 아닌 명예를 걸고 경기를 행하는 사람들과!”(헤로도토스, <<역사>>하권, 범우사, 305쪽) ‘이런 인간’이라는 표현을 통해 헤로도토스는 ‘자유’를 최대의 덕목으로 여기는 그리스인들의 자긍심을 드러내려 한 것일 겁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올림픽은 자신의 가장 완벽한 몸과 정신을 신들에게 바치는 종교 제전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올림픽 우승이란 가장 훌륭한 인간이란 어떤 인간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었습니다. 따라서 올림픽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패자에게 승자는 신들이 준 몸과 정신을 최고의 경지까지 끌어 올린 덕망 있는 존재였고, 승자에게 패자는 자신의 최고 기량을 보여 줄 수 있도록 도와 준 동료였으니 말입니다. 올림픽은 신을 찬미하는 종교 제전이었기에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도시 국가들 사이의 모든 전쟁과 적대 행위가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모든 도시 국가들은 선수들과 사절단, 구경꾼들의 안전을 보장해야만 했습니다. 올림픽 기간 동안에는 모든 사형 집행이 금지되고 법적 분쟁도 중단되었습니다. 올림픽은 그리스인들이 자기들의 민족적 동일성과 정체성을 재확인하는 기회였습니다. 제가 이렇게 올림픽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까닭은 바울 사도가 성도들의 영적인 발전을 올림픽에 참여하는 이들의 훈련 이야기와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영적인 오름길에 선 사람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을 ‘경기장에서 달리기를 하는 사람’에 빗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인생이라는 경기장에서 달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랍니다. 이게 뭡니까? 일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건가요? 삶을 경쟁으로 인식하고 죽어라 하고 달리라는 것인가요? 이 말에 너무 주눅이 들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영적인 오름길에 오른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극단적인 예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사람이 비상한 결단을 하지 않으면 결국 세속의 물결에 떠밀려 다닐 수밖에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에덴 이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은 에덴의 동쪽인 놋 땅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놋’은 ‘떠돌아 다님’을 뜻하는 말로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 삶의 불안을 이보다 적절하게 나타내는 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고백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님을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불안합니다." 

결국 인간이 돌아가야 할 곳은 하나님 품입니다. ‘돌아간다’는 말은 ‘떠나왔음’을 전제로 합니다. 돌아감의 과정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다는 자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이것은 ‘장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 지은 아담에게 하나님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장소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그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생각하는 것, 마음 쓰는 것,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과 닮은 존재라는 뜻일 겁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보며 감탄하고, 기뻐하고, 돌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소명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돌처럼 굳어졌습니다. 감탄할 줄 모르고, 돌볼 줄 모르는 무감각하고 무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타락입니다. 

어느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서 결혼 10년차 남편들에게 아내가 사랑스러운 때가 언제냐고 질문을 했더니 대다수가 ‘별로 없다’고 대답했다지요? 더 기가 막힌 것은 남편들이 1등으로 꼽은 것이 ‘아내가 재테크를 잘했을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컬럼니스트가 저녁 때 당신도 그러냐고 남편에게 물었답니다. 밥을 먹던 남편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대답했답니다. ‘당근이지.’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컬럼니스트는 이게 서민들의 마음을, 살기 팍팍한 현실을 대변한 솔직한 대답일 거라고 말합니다(한겨레신문, 2008년 7월 31일자, <김선주 컬럼>). 

하지만 이런 마음들이 만들어내는 사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돈이면 못할 일이 없는 세상은 만민이 만민에게 늑대인 세상입니다. 이제야말로 하나님께로 우리 마음을 가져가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다시 빚어달라고 청해야 할 때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영혼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빌2:5)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12:2)


• 과함으로부터 벗어나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삶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변화되어야 할 존재라는 깨달음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얻기 위한 여정 가운데 있으면서도, 우리는 순례자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존재로서의 목표가 사라지는 순간 삶은 진부한 관습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참 사람의 길로 부름받았습니다.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기 위해서는 克己復禮, 즉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말하는 克己는 사욕(私欲)에 끌리는 마음을 제거한다(去人欲)는 말이고, 復禮는 하늘의 뜻으로 돌아가 거기 머문다(存天理)는 뜻입니다. 은혜를 강조하는 기독교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성도다운 삶의 훈련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다”(갈5:24)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정욕과 욕망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물론 정욕과 욕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통제되지 않는 욕망과 정욕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첫 사람에게 에덴동산에 있는 한 가지를 제외한 모든 과일을 다 먹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한 가지 과일에 제한을 두신 것은 그 과일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라는 요구였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제한을 거부함으로써 다른 모든 은총의 선물들을 잃어버렸습니다. 욕망과 정욕은 일쑤 과도함으로 달려갑니다. 그렇기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기도 훈련, 단순한 삶의 훈련, 금식의 훈련, 봉사의 훈련을 받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훈련의 바탕은 ‘절제’입니다. 過해서 좋을 게 별로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덜어내는 것입니다. 덜어낸다는 말을 비운다는 말로 바꿔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비우고, 자아를 비우는 그 자리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 머무시는 자리입니다. 요셉 수사가 포에멘 원장에게 “금식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포에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생각에는 매일 음식을 먹되, 조금씩만 먹어서 배부른 느낌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게 참 어렵지요? 바울 사도는 무절제하게 치닫기 쉬운 자기 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I treat my body hard and make it obey to me). 바울 사도의 이 말은 영적 오름길에 오른 이들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마음이 몸의 욕구를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몸이 마음의 길을 따르는 삶이라야 자유로운 삶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절제의 삶은 아무도 강요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성장을 진심으로 바라는 이들만이 자발적으로 이런 훈련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영적인 오름길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자기 절제의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될 뿐입니다.


• 배와 바람과 선원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의지나 용기는 필요불가결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게 충분조건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우리는 성숙한 영혼이 되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여기 돛단배 한 척이 있습니다. 동력 장치가 없는 돛단배는 바람이 불어야 운행할 수 있습니다. 바람은 선원이나 배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원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향해 키를 돌리고 아딧줄을 잡아 당겨 배의 방향을 조정할 뿐입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의 바람은 이미 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바람을 향해 돛을 조정하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빌2:12b-13)

하나님의 영은 우리 속에 머무시면서 우리 삶에 도전하고,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숙의 길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도전에 직면하고, 그 부름에 응답하면서 한 걸음씩 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지속적인 회심의 과정입니다. 우리 속에서 무정한 마음이 사라지고 이웃들의 흉과 허물까지도 감싸 안으려는 마음이 자라고 있다면, 대접받는 것보다 섬기는 것이 더 즐겁다면, 앙갚음이나 복수심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의 정신에 입각해 산다면, 두려움과 불안 대신에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커지고 있다면, 우리는 영혼의 오름길에 서 있다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삶이 힘겨울수록 근본을 자꾸 돌아보아야 합니다. 빙하가 때로 바람이 부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까닭은 해류의 움직임 때문이라지요? 세상이 제 아무리 어지러워 보여도, 세상을 이끌어가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 흐름을 타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모두 영혼의 오름길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은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더딜지라도 더 나은 존재가 되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 있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곳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는 사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그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우리 존재의 목표입니다. 모든 것을 절제하며 이 목표를 향해 길 떠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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