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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멘의 신앙 (고후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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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의 신앙 (고후 1:20)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보면 “아멘” 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서 긍정을 나타낼 때 사용하며,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안식일이나 절기에 성전 뜰에 모여 성경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 때 말씀이 선포될 때마다 “아멘!” 으로 화답했습니다. 

역대상 16장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성에 옮기고 나서 백성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송축하자 모든 백성이 “아멘” 으로 화답했습니다(36). 느헤미야서 8장에 보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인들이 새해 첫날에 수문 앞 광장에 모였을 때 학사 에스라가 나무 강단에 올라 아침부터 오정까지 모세의 율법책을 낭독하였는데, 거기 보면, 당시의 감격스러운 장면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5)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당시에는 일반 백성은 율법책을 갖기가 어려웠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회가 주어질 때 정신을 집중해서 듣고 마음에 새겼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옛 성도들의 진지하고 열정적인 자세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라는 어구로 기도를 마칩니다. 이 때 아멘은 “기도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또한 예배를 드릴 때나 기도 모임에서 다른 사람의 기도에 동감을 나타내기 위해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에도 “아멘”으로 곡을 마치는데 이 역시 “그 찬송의 내용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단지 형식적으로 “아멘”을 외쳐서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오직 우리의 진심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할 때라야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예”와 “아멘”은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 곧 ‘아멘’이 되므로 우리는 “아멘” 곧 긍정적인 믿음으로 그 약속을 받아 누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멘의 신앙”이란 어떤 것인지 살펴봅시다. 

첫 번째로, 아멘의 신앙은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맡기는 신앙을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운 약속은 믿는 자 모두를 위해서 주신 것이지만, 실제로 이 약속을 받아 누리려면 아멘의 신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곧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맡기는 신앙을 가진 성도들이라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그가 선민 이스라엘의 조상일 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 것은 그의 지혜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의 믿음에 의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들어와서 몇 년 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밤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하기를 “주 여호와여 무엇을 제게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으니 저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 될 것입니다.”하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아이는 너의 상속자가 아니다. 너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너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습니다. 

사실이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무려 25년이 지나서 그의 나이 백세가 되어서야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 아내 사라의 나이는 90세였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90세난 할머니가 아기를 잉태하여 출산하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90살은 고사하고 60살 난 할머니가 아기를 생산했다고 해도 전 세계적인 뉴스감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 나이에 자식 얻기를 기대할 수 있었을까요? 혹시라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나이에도 젊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하여 로마서 4장 18절 이하에 이 같이 증언합니다. 

“18)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백세가 된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줄 알면서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자식이 출생할 것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자식을 생산하는 차원에서 볼 때, 이 두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 근거를 우리 자신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둡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이 죽은 것 같은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데 조금도 장애 요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약속의 성취 여부는 약속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은 것일까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는 창조에 대한 증언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니 생겨났고, 물고기들과 새들과 짐승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신 이도 하나님이십니다. 창조 사역은 곧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입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이고 근거가 없는 신앙이 아니라 성경에 계시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현대인들은 신념을 중요시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최선을 다하라 그리하면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신념은 중요합니다. 신념이 있어야 어느 분야에서건 성공할 수 있지, 신념이 없는 사람은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못하므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신념이 만능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념은 인간이 자기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한 방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신념이 강한 사람이라도 자기에게 잠재해 있지도 아니한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자기의 잠재능력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자기의 삶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신념이 할 수 없는 기적을 산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갔을 때 그 약속하신 대로 90세 난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생산케 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해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되었으므로 아브라함의 복에 참예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염려 근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아브라함과 같이 아멘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삶속에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멘의 신앙은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언제나 “아멘” 하며 순종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된다.”는 구절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아울러 그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하신 약속을 변경하시는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므로 그 약속하신 바를 성실하게 이행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민수기 23장 19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멘”하여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추호도 의심 없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말씀하시기를 “1)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한국인들 가운데는 미국이나 캐나다나 호주와 같이 살기 좋은 나라로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전에 이민을 떠나려는 나라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모든 준비를 해서 떠납니다. 개중에는 직접 그 나라로 가서 살펴보거나 때로는 미리 몇 개월씩 가서 살기도 합니다. 그렇게 미리 준비를 해도 이민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 사람입니다. 

그는 단 한번도 가나안에 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애당초 고향을 떠날 계획이 없었으므로 가나안으로 이민을 떠나는데 필요한 준비를 하나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정든 고향땅을 떠났다고 증언합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4)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5)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순종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 하시는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자기 아들을 죽여서 번제로 바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어려운 명령을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창세기 22장 3절에 보니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라고 했습니다. 삼일 만에 모리아 산 아래 당도한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를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칼과 불을 손에 들고 산을 올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르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에 칼을 쥐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 그의 행동을 멈추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수양이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보통 아들이 아닙니다. 이삭은 약속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아직 장가도 들지 않아 대를 이을 후손을 두지도 못했는데 그를 죽여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으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속을 파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삭이 죽고 만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다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묵묵히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했습니다. 

그렇게 한 근거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에 이 같이 증언합니다.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진실무망하시므로 이삭을 번제로 바칠지라도 이삭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재 가운데서 이삭을 살려내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함으로써 아멘의 신앙을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아멘의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을 구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실 적에 약속하시기를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대로 큰 축복을 받아 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가축과 은금이 풍부하였고, 가나안 원주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3장을 보면, 사라가 죽어 헷 족속의 소유인 막벨라 굴을 사려고 하자,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6)라고 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은 사백 세겔을 달아주고 그 땅을 샀지만, 이로써 헷 족속이 아브라함을 얼마나 존귀한 인물로 여겼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뿐 아니라 그 아들 이삭도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6장에 보면, 이삭이 그랄 땅에 머물면서 농사를 지었더니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니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아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시기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면 영락없이 물이 솟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은 큰 민족이 되었으며, 또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을 성실히 섬긴 사람들이 하나 같이 복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민수기 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기 백성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지 보여주는 말씀이 나옵니다. “22)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3)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27)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 복 받기를 구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복을 구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를 기복신앙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사실이지 기독교는 기복신앙인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복을 비는 대상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상에게 복을 빌지만 성도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그것도 약속을 의지해서 복을 빕니다. 

그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은 일신의 안락함과 부귀를 위해 복을 구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목적으로 복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단지 현세적인 복을 받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현세적인 복은 덤으로 받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차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복은 물질적인 것이 전부가 아니라 영적인 복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생업도, 사회적인 지위도 버리고, 두 벌 옷도 갖지 않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전하느라 굶기도 하고 헐벗고 추위에 떨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사도들은 요한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을 보고 복을 받지 못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도들이 받은 복은 현세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의 신령한 복입니다. 그들의 전도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사망의 길을 벗어나 생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사도들의 말씀을 얼마나 사모했든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경청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들은 주님의 사도로서 권위가 있었고 성도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현세적인 복은 받지 못했지만 영적인 차원의 복을 풍성히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 성도들은 물질적인 풍요보다 주님의 일을 위해 사는 것을 통해서 더 큰 즐거움을 누립니다. 우리는 할 수 있다면 영적인 복과 현세적인 복을 아울러 받아 누리면 좋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실 목적을 위해서 물질적인 복을 보류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낙심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사도 바울과 같이 지족의 미덕을 터득하는 기회로 선용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성도님은 한 때 부자로 잘 살았으나 IMF 때 사업에 실패하여 끼니를 걱정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 성도님은 그 때 실패하기를 참 잘 했다고 간증합니다. 왜냐하면 경제적인 가난으로 인해 그 때까지 믿지 않던 가족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떵떵거리고 잘 살 때는 마음이 교만해서 하나님을 믿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의 지혜와 수완을 의지하고 거만하게 굴었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부도가 나자 교만한 마음이 깨어져 겸손하게 되어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이제는 신실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아름답고 복된 결과를 만들어 내시기 위해 때로 현실의 어려움과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사랑하는 성도님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하신 대로, 큰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 복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에게 복을 주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서원하며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며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올바른 목적으로 복을 구할 때 하나님의 약속이 주 안에서 우리에게 “아멘”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세상의 도전을 받아왔지만 오늘날은 전방위적인 공격에 직면해 있습니다. 황금만능주의와 성공지상주의의 거센 물결 앞에서 신앙 위주로 살아가는 것에 자신감을 잃고 세상과 타협하는 신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느슨하고 변질된 신앙태도를 본받지 말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서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맡기며,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복을 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아멘의 신앙으로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님들의 삶속에서 예가 되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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