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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사적인 교인들 (행 1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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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적(紳士的)인 교인들 (행 17:10~15)


지난번에 인천항에서 중국으로 갈 때 배를 타고 단동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보았던 압록강 다리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안내하는 분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 다리를 통해 북한에 수많은 물자가 들어가는데 특히 성경도 상당히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20년 전만 해도 중국에 사는 우리 조선족 교포들은 성경 말씀을 손에 쥐고 신앙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다 빼앗겼고 또 만약 쥐고 있는 것이 발각되면 가정적으로 엄청난 재난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공공연히 다닐 수 없고, 또 그 말씀을 보관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동네에서는 성경을 숨기고 있다가 수백 명이 처형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성경은 하늘로부터 온 한 통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책으로 된 하나의 인쇄물과 같이 보이지만 이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이요,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느끼고 눈으로 보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 가운데서 최고의 것은 성경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한국교회미래를 준비하는 모임"(한미준)과 한국갤럽이 그리스도인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1주일에 성경을 얼마나 읽는지 묻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그 응답 결과를 보니까 51.9%가 성경을 읽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니까 그들 중 약 52% 이상이 다음 예배 시간에 나올 때까지 성경을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따라서 예배 시간에만 성경을 펴보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 시간에 안 나오는 사람보다는 훨씬 낫지만, 한 주간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한번도 가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안타까운 일입니다. 1시간 이하는 24.5%로 나왔습니다. 4분지 3 이상이 성경을 거의 읽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말씀을 마음에 담고 묵상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살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하는 본문 11절에 보게 되면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며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여기 바울은 베뢰아 사람들은 매우 신사적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사적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보면 신사란 '예절이나 품행이 바르고 교양이 있어 젊잖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의 뜻은 '출신이 좋은', '가문이 좋은' '고귀한' 의 의미로 상류층 사람들이 보여주는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새 번역 성경에는 '보다 마음이 넓어'로 번역되었고 공동번역에는 '마음이 트인'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영어성경에도 'open-minded'(J.B)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본문에 '신사적'이란 말의 의미는 편견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받는 마음입니다. 지금 그들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바울이 증거 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아름다운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 '간절한 마음으로'란 full attention- 집중해서-라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받되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해서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진리에 대한 갈급함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한 여성이 친구로부터 책을 한 권 선물 받았습니다. 그녀는 호기심을 가지고 조금 읽어보다가 별로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방구석에다가 처박아 두었습니다. 며칠 후에 어떤 모임에서 그녀는 우드라는 잘생기고 매력적인 청년을 소개받았습니다. 그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녀가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책을 한 권 읽기 시작했는데, 그 책의 저자 이름이 우드예요. 당신 이름과 똑같지요. 우연치고는 정말 큰 우연인 것 같아요." 그러자 그 청년이 말했습니다.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제가 그 책의 저자입니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그 아가씨는 방구석에 처박아두었던 우드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자신이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 가장 흥분을 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재미가 있던지, 밤을 새워 다 읽고야 말았습니다. 그런 후에 그 아가씨는 그 책의 저자와 결혼해서 그 이름이 H.W.우드 부인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도 재미없던 책이 하루아침에 재미있는 책으로 변할 수 있었겠습니까? 책을 지은 사람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 아닙니까? 제가 목회 하는 가운데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기만 해도 자꾸 잠만 온다는 것입니다. 집중도 안되고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돼서 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책보다 아직도 자신이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가슴에 벅차게 밀려 들어와 보십시오. 어떻게 성경이 졸릴 수 있겠으며 말씀이 와 닿지 않겠습니까?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과 사랑에 빠져 보십시오. 밤을 새면서 읽어도 더 읽고 싶어질 것이고 이처럼 말씀이 그리워서 사모하는 심정으로 달려나올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들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11절 중반 절에 보면 "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할 단어는 '날마다'입니다. 마음 내킬 때 한번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봐요. 날마다 들어요. 매일같이 반복해서 성경을 상고합니다. 상고(詳考)란 무슨 뜻입니까? 헬라어로 '상고하다'는 말 '아나크리노(ανακρινω)라는 뜻은 '자세하게 골라내다' '체를 쳐서 가려내다' '탐색하다' '조사하다'는 의미입니다.

요즘 고유가 시대에 들어서다 보니 우리나라처럼 석유 한방울 안나오는 나라는 피가 마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여러나라에서 유전 광구를 사서 석유 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다 한 가운데에서 유전을 발굴 할 때 그 깊은 바다에 묻혀있는 유정을 발견하기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마치 넓디넓은 해변가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는 것처럼 어려운 작업입니다. 먼저 항공 촬영을 해서 그 바다의 내부를 탐사하고 그리고, 광물질이 발견되면 엄청난 시추선을 바다에 띄워 시추를 하는데 한번 시추 구멍을 내는데 돈이 천문학적으로 들어갑니다. 석유하나 발견하는데도 이처럼 엄청난 수고가 일어나게 되는데 여기 '상고'가 바로 이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베뢰아 교인들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스스로 성경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과 실제 성경이 어떻게 연관되어져 있는지를 자세하게 연구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본문을 내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자리까지 나갔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하는 적용의 자리까지 나갔다는 것입니다.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경공부를 통해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적용해서 내 삶과 인품이 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아침! 성도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왜 오늘 이 땅에 이렇게 교회도 많아졌고 성경책도 많아졌고 성경의 번역도, 성경의 참고서도 무수하게 많아졌는데 이 땅이 변화되지 못하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우리가 이 말씀대로 살고 있지 못한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는 지킬 의도가 없이 말씀을 읽고, 지킬 의도가 없이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읽음도 아니고 들음도 아닙니다. 문제는 지킴이 관건입니다. 계1: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말씀을 듣고 그것을 지킬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머리 잘린 삼손처럼 외형만 비대해질 뿐이지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한 무능한 삶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20세기 미국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에이든 토저 목사님(A.W. Tozer)은 종교가 타락하는 세 단계를 설명했습니다. 첫째 단계가 기계적 상태입니다. 아무 느낌 없이 종교적 활동을 반복합니다. 오랫동안 출석했기 때문에, 너무나 많이 드려왔던 예배며 찬양이기 때문에 새로운 감격과 기쁨이 없이 기계적으로 종교적 행위만 반복하는 단계입니다. 놀라움이나 기대감도 전혀 없습니다. 의식 없이 찬송 부르며 가사의 의미도 모릅니다. 기도드릴 때도 그냥 눈감고 있다가 눈뜹니다. 

다음 단계가 습관적 상태입니다. 기계적 단계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바로 이러한 기계적인 상태가 자기 영혼을 마비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사실조차 분별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마지막 단계가 부패한 단계입니다. 교회역사는 이 단어로 가득 합니다. 이 상태는 더 좋은 것을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나 성장을 향한 소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기대가 없습니다. 경쟁은 있지만 다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경쟁입니다. 회개도 성령의 능력도 모르며 굉장히 메말라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늘 평가와 비판이 따라 다닙니다.

이때 나타나는 세 가지 죄가 있는데, 자기 의입니다. 자기 자신을 살피는 일 없이, 늘 마음속에 이것을 봐도 혹은 저것을 봐도 잘못이고 자기 자신이 모든 것에 중심이 되어 계획하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외에 남을 비판하는 기능까지 작동하여 비판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자기는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만 변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죄의 모습은 자기만족이 최대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족하는데 스스로는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좋다고 말씀하시는데 자기 마음에 만족이 없으면 불편하고 불만스럽습니다. 무감각한 채로 바리새인처럼 형식에 매여 다른 모든 것을 바라봅니다.

여기 베뢰아 성도들을 보십시오. 12-15절에 보면 이들에게 핍박이 오는데 그 고난의 한 복판에서도 결코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12-15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 베뢰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인 복음이 진리요. 생명의 말씀인 것을 깨닫게 되자 지체 없이 주님을 영접하고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헬라인 귀부인들과 남자들도 많았습니다. 이처럼 베뢰아에서 믿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게 되자 이 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의 사악한 유대인들은 가만이 있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80km나 떨어져있는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 달려와서 군중을 선동하고 폭력배를 동원하여 이들을 위협하고 방해했습니다. 이들은 아직 초 신자입니다. 이제 주님을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그마한 유혹이나 시험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베뢰아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말씀에 굳게 서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뢰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급한 대로 바울 사도를 먼저 피신시키고 실라와 디모데는 자신들과 함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도 피신시켰습니다.

이처럼 베뢰아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주님의 종들을 구하고.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이미 주님을 위하여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순교의 신앙으로 성숙되어져 있었습니다.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신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살아있는 신앙은 자발적이고. 창조적이어서 자신뿐만 아니라 남의 생명까지 구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 묻습니다. 이처럼 한번도 진리를 가까이 대해본 적이 없는 이들을 이렇게 아름다운 신앙의 자리로 변화시킨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처럼 성경을 우리가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경이 없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을 누구한테 들어야 됩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발견합니까? 그분을 어떻게 만납니까? 그분의 은혜를 어떻게 우리가 소유할 수 있습니까?

성경이 있기에 그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것을 알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알고 그 말씀 붙들고 우리가 감격하고 눈물 흘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발견했고, 그러나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받아야 되고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또한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기’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 지를 배워야 되지 않습니까? 말씀을 우리가 읽고 묵상하면서 점점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성경이요, 이제 예수 믿고 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인도해 주는 진리의 말씀이 성경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영혼을 위한 일용할 양식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하루라도 그대로 놓치고 넘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6월 30일에 미국에서 이례적으로 종교 프로그램에 미국 NBC 방송에서 생중계로 방송을 했습니다. 이는 참 대단한 일인데 그 내용은 미국 청년들과 청소년들을 위한 자마(JAMA)대회를 중계한 것입니다. 이 대회를 만든 분이 김춘근 장로입니다. 이분은 1976년도에 악성 간 경화 진단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이분은 단돈 200불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하루 3시간 자며 시체 치우는 일까지 하면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동양인 1세로 누구도 하지 못한 미국 정치학을 공부하고, 108: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페퍼다인 대학의 조교수가 되었습니다. 4년 만에 최우수 교수상도 받은 그의 앞길은 창창대로가 뻗어있는 것만 같았고 그의 생활은 안정권에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그 때 나이 37세였고 8살과 2살 된 딸과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무서운 질병 선언을 받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의사는 1년 밖에는 살지 못 할 것이라 합니다. 점점 배가 불러오면서 호흡이 가빠집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절규했던 것이 ‘왜(why)?’입니다. 하나님 왜 하필 납니까(Why me)? 왜 하필 내가 이 병에 걸려야 됩니까. 수술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는 포기했습니다. 아내와 LA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빅 베어 마운틴으로 갔습니다. 온몸이 아프고 힘이 없습니다. 배는 불러서 숨쉬기조차 힘듭니다. 아내는 내려가게 하고 산에서 혼자 머물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갑자기 그 마음속에 시편 118편 5절 말씀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 말씀 한 구절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절망 속에 자신이 맞는 그 밤은 얼마나 두렵고 고독하겠습니까? 밤바람은 찹니다. 외롭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의 마지막 절규는 비참합니다. 처절한 6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말씀 한 마디가 그의 심령 골수에 박히자 그는 더 이상 암에 휘둘리지를 않았습니다. 박사님은 신앙이 굉장히 좋은 분입니다. 교회를 잘 섬겼던 분이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분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말이 자신의 입을 통해 들린 순간 그동안 하나님께 나아갔던 모습이 허상이었고 위선이었고 거짓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죄인입니다.'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엎드렸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한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치료하겠다. 내가 치료하겠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산에서 겪은 경험을 얘기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다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병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자연 요법을 하면서 기도로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년만에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 분이 알라스카 대학에 교수로 계시면서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일이 미국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방송이 직접 JAMA 대회
(Jesus Awakening Move-ment for America-북 미주 예수 대 각성 운동)를 생중계를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깁슨이라는 사람은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거부가 되었습니다. 어느 경제인 모임에서 물었습니다. "빈손으로 거부가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청중은 대부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궁금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게는 세 가지 신조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둘째, 술을 마시지 아니한다. 셋째는 하나님을 믿는다. 이 세 가지를 지키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거야 우리도 모두 아는 사실이 잖습니까?" 깁슨은 웃으면서 "그렇습니다. 아는 사실을 당신들은 실천하지 아니하였을 뿐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타고난 성품도 좋았고 열린 마음이어서 어떤 말씀이든 그대로 받앗고 열등의식으로 비비꼬지 않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집중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날마다입니다. 일주일에 한번이 아닙니다. 날마다입니다. 들은 말씀과 성경을 대조해가며 어떻게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그대로 살것인가를 매일같이 생각하며 행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베뢰아 성도처럼 신사적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신사적인 성도이다" 열린마음 /집중해서 /날마다 연구하며 말씀대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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