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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민족부활의 비전(1) (겔 3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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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부활의 비전(1) (겔 37:1~14)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의회에서 보수파인 지롱드 당원들은 오른쪽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급진과격파인 자코맹 당원들은 왼쪽에 앉았습니다. 여기에서 유래한 말로 오늘날에는 보수파와 진보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일컫는 말이 우파와 좌파로 속용 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유래되었듯이 좌파와 우파는 그 사람의 경향이나 방식을 뜻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이른바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결양상을 넉넉히 대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표현할 적당한 수사는 없습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 매우 위태롭고 어려운), 누란지세(累卵之勢, 계란을 포개놓은 듯 불안한), 내우외환(內憂外患, 나라 안 근심 나라 밖 근심)이란 표현이 부족할 뿐입니다. 

이러다가 이 나라가 고립무원(孤立無援, 도와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 되어서 왕따가 되지 않을까 두렵기까지 합니다. 
우리의 앞서 간 선조들은 국운이 기울 때마다 항상 성경에서 그 답을 얻기에 주저하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 민족과 나라의 대부활의 메시지를 받기 원합니다. '민족부활의 비전'은 


Ⅰ. 오직 하나님으로만 가능합니다. 

1) 하나님의 신의 인도로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본문 37장 1-2절에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발 강가 유다인들의 포로민 정착지에 살고 있는 에스겔을 이상 가운데 찾아오셨습니다.
땅은 그들을 결박시켰지만 결코 하늘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벨론 우상의 중심지에 에스겔을 통하여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에스겔의 나이가 서른 살 되는 해(겔 1:1) 그리고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온지 5년 5일(겔 1:2)에 에스겔은 바벨론 그발 강가 델아빕에 있었습니다(겔 3:15). 
저들의 형제국인 북조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망했습니다(왕하 17:5-6; 18:9-10). 온갖 파괴와 약탈로 온 성은 불타버렸습니다. 이방인들이 사마리아에 진주하여 혼혈족을 만든 것은 앗수르왕 살곤 2세의 정책에 따른 것입니다.

북조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망할 때 남조 유다왕 아하스는 앗수르에게 유다를 예속시키면서 자진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하므로 앗수르의 침략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다 국내정세는 통일되지 못하고 둘로 양분되었습니다. 유다의 완전독립을 위해서는 남쪽 애굽과 친교를 맺어야 된다는 친 애굽파와 아하스의 뜻을 따르는 친 앗수르파로 나누어졌습니다. 

이러한 형편에 아하스왕이 죽고 그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이 두 파의 분쟁은 본격화되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왕 산헤립에게 조공 바치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선정을 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산헤립은 18만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유다를 침략했으나 하나님께서 하룻밤 동안에 진멸해 버렸습니다(왕하 19:35-36). 

그러나 그 아들 므낫세왕이 북쪽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미 앗수르가 애굽을 흡수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므낫세는 친 앗수르 정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들 암몬도 친 앗수르 정책을 했으나 폭정으로 2년 만에 살해되었습니다(왕하 21:19-26). 요시야가 여덟 살의 나이로 왕이 된 후 18년간이나 앗수르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므낫세, 암몬, 요시야의 3대에 걸쳐 약 70년간 친 앗수르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입니다.

이 때 바벨론 느부갓네살은 갈대아 왕국을 세우고 메데의 도움을 얻어서 주전 612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함락시켰습니다. 요시야는 앗수르를 도우러 가다가 므깃도에서 애굽왕 바로느고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애굽이 앗수르의 속국인 관계로 앗수르를 도우는 유다왕의 죽음을 통쾌하게 생각했습니다. 애굽왕 바로느고는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석 달 동안 책봉하더니 다시 요시야의 아들 엘리야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하여 세웠습니다. 

그 후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점령하고 이 땅을 바벨론 제국에 편입시켰습니다.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게 대항하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재위 11년 만에 죽었습니다(대하 36:6). 그 후에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서 바벨론에 대항하다가 재위 3개월 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37년 동안이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때 여호야김을 중심한 가족과 대신들과 유력한 인사들 1만 8천명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왕하 24:14-16). 에스겔 1장 1-2절은 위의 사실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느부갓네살은 요시야왕의 다른 아들 맛다니야로 왕을 삼고 시드기야로 개명하였습니다(왕하 24:17-20). 시드기야 역시 바벨론에 항의하면서 거짓 예언자들의 말을 좇아 친 애굽 정책을 펴다가 바벨론 군대에게 잡혀서 그의 처와 공주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무참히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시드기야왕은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5:7). 

이때 유다의 지도자와 백성 70명도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습니다(왕하 25:18-21). 이제 유다에는 노인과 병약자들만이 남았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그 남은 자들을 통치하기 위하여 그달리야를 방백으로 삼았으나 그 역시 살해되었습니다(왕하 25:25). 

이제 유다인들은 바벨론 포로민의 한을 머금은 채 쓰라린 고통의 날을 계수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송두리째 빼앗긴 슬픔을 두고 예레미야는 『 슬프고 아프도다 내 창자가 아프도다 』라고 한 표현은 바벨론 포로의 아픔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시편 성도는 『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 거기 앉아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때의 애환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본문 37장 3절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에 감히 대답하는 자유마저 포기한 채 주님만을 믿고 의지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의 기독교 탄압과 신사 참배로 이어지는 신앙절규는 바벨론 포로가 된 유다 백성들과 일대 등식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나라에 밀어닥치는 수난을 한 치의 후퇴나 양보 없이 항거한 단체가 세칭 고려파라고 하는 단체입니다.

사실 저는 고려파라는 교파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여기서 고려파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전통에 따르는 개혁주의 신앙사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주의와 그에 따르는 생활규범으로서의 신행일치주의를 천명하는 단체의 표호입니다. 따라서 고려파의 신앙 정서는 사상적으로 하나님 제일주의와 계시의존사색에 의한 신행일치의 결과 순교적 신앙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민족부활의 비전'은 


Ⅱ. 인간성을 회복하는 운동입니다.

본문 37장 8-11절에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데리고 사방이 무수한 사람의 뼈들로 가득한 곳으로 갔습니다(겔 37:1). 이 뼈들은 납골당에 있는 그러한 뼈들이 아니라 마치 시체가 이리저리 흩어져 살만 썩고 남아서 탈골된 것처럼 지면에 이리저리 널려 있었습니다(겔 37: 2).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에스겔은 대답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겔 37:3). 하나님은 뼈들을 향하여 말하라고 했습니다.

『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 37:4-6)고 했습니다.

이 때 갑자기 골짜기의 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뼈들이 스스로 맞추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붙고 그 살 위에 가죽이 덮였습니다. 이 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고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에스겔을 불러 생기가 그 사람들 위에 임하도록 대언하라고 했습니다. 곧 그 사람은 움직이기 시작하고 극히 큰 군대로 변했습니다(겔 37:7-10). 이 엄청난 광경을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이 뼈들은 포로 중인 이스라엘이요 이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큰 군대가 된 것은 유다 백성이 포로에서 해방되어 귀환한다는 의미입니다(겔 37:11-13).

유다가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돌아오는 것은 죽은 송장을 무덤에서 나오게 하는 것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은

1)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본문 37장 4절에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본래를 회복하는 길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인간 회복운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아모스 8장 11절에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역량이나 문화역량의 활성화가 사람을 감동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만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아직도 자기가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자기의 의가 살아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려고 하지도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무식한지 그 무식을 극복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이 사실을 잘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귀에 듣기 좋은 설교만 들으려고 하면 인간의 영혼은 끝내 망하고 맙니다.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은


2)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2절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듣는데 행하지 아니하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기계적으로 듣고만 있는데 그치지 않고 듣고 변화를 받아 행하는 데까지 가는 것입니다. 

'민족부활의 비전'은 


Ⅲ.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전파)하는데 있습니다.

본문 37장 7절에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라고 했습니다.

본문 37장 8절에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고 했습니다.

본문 37장 9절에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라고 했습니다.

죽은 시체를 향하여 대언하는 사명이 오늘 이 지상교회에 주어진 사명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시체 속에 뛰어들어 부활을 명하는 거룩한 단체입니다. 온통 죽은 뼈들로 충만한 거리를 향하여 생명의 부활을 명령하는 일은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체는 아닙니다.

로마서 15장 18절에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전파)하는 일은 우리의 의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얼마나 귀한 것이겠습니까?

우리 국민들의 의식구조는 철저한 국수주의자요 세계에서 보기 드문 민족주의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단일민족이라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아니합니다. 세계 도처에 나가있는 한민족은 너무도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선교를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200여 국내 교회가 200교회가 훨씬 넘는 해외 선교지 교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긍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단독으로 선교사를 지원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철저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전도행위는 이방인들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는 행위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제물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제물 되게 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지상 명령인 전도행위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명령입니다. 가장 귀한 명령에 따르는 자는 가장 귀한 일꾼입니다. 국내 전도와 해외 선교에 우리의 남은 여력을 동원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미국연방정부기관인 지명위원회(BGN)가 독도를 주권미지정지역(undesignated sovereignty)으로 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이 기관의 홈페이지에 리앙쿠르록스(Rocks)를 입력하면 독도가 한국에 속해 있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특정 국가 주권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시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독도를 원상회복했습니다. 리앙쿠르록스란 이름은 그냥 둔 채 말입니다. 

리앙쿠르란 유럽 처음으로 독도를 발견한 배의 이름입니다. 독도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제 사회에서 리앙쿠르록스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입니다. 
더구나 섬이 아닌 록스(바위 덩어리)로 분류되는 자체를 우리는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알고 보면 비단 이 정부만의 책임도 아닌 것입니다. 이 지명 위원회가 멀쩡한 독도를 록스로 바꾼 것은 무려 31년 전이었으나 아무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자주 그랬던 것처럼 이번만은 한두 달 지나면 우리 스스로 잊어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뿐입니다. 

이제 일본은 독도에 대해서 무슨 할 말이 있도록 국제사회가 발언대를 제공한 셈입니다. 일본의 외교력과 정치적 수완이 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일본은 태평양 상의 침대만한 바윗돌 '오키노 도리시마'에도 인간이 독자적인 경제생활을 할 수 있는 섬이라고 우기면서 200마일 배타적 경제 수역을 선포했습니다. 저들은 독도와 울릉도 사이를 경계로 해야 한다고 계속해서 우기고 있습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자기 땅을 확보하는 노력만큼만 정성을 쏟으면 과장된 것 같으나 대마도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살 길은 오직 하나님만으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타락한 이 민족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나게 하는 운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사는 길은 대언하는 사명, 전도하는 사명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되는 선교운동의 사명입니다. 
죽은 시체를 향하여 생명의 부활을 명령하는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무수한 시체들 속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무수한 뼈들이 쌓여있는 사이로 바쁘게 질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그들은 계속 참혹한 뼈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편 18편 1-2절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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