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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와 집 (고전 3: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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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집 (고전 3:10~15)

 
세계 유명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가 이탈리아에 있는 피사의 사탑입니다. 피사의 사탑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것은 건축물이 아름다워서라기 보다 매년 탑이 조금씩 기울어지기 때문입니다. 피사의 사탑은 1년에 1mm 정도씩 기울어집니다. 현재는 탑의 꼭대기가 수직선에서 무려 5m나 기울어졌습니다. 1350년에 완공되었으니 약 660년간에 걸쳐 5m가 기울어진 것입니다. 지금은 붕괴의 위험이 있어 관광객들이 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보수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힘을 총동원해 탑이 기울어지는 것을 멈추게 했고 작년까지 26cm 정도의 기울기를 회복시켰다고 합니다. 

피사의 사탑은 건축 당시부터 의도적으로 기울어지도록 설계한 것은 아닙니다. 이탈리아의 천재 건축가인 보라노 피사논의 설계도에 따라 탑을 만들었는데 3층까지 쌓아 올렸을 때 지반의 한쪽이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기술자들은 새로운 층을 올릴 때에 기울어져 짧아진 쪽을 조금 더 높게 만들어 평형을 이루었으나 추가된 대리석의 무게로 건물은 더욱 가라앉아 기울어졌습니다. 피사의 시탑이 기울어지게 된 원인은 건축물의 지반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그 건물이 어떤 환경의 변화에도 튼튼하게 서 있으려면 무엇보다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미국의 맨허턴에 100층이 넘는 높은 빌딩들이 즐비하게 설 수 있는 것은 맨허턴의 지반이 암반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암반을 뚫고 튼튼한 암반위에 건물의 기초를 놓으니 높은 건물을 쌓아도 흔들림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산상 수훈의 설교를 통해 집을 지을 때에 기초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옥과 같은 말씀으로 설교하신 후에 설교의 결론을 맺으시면서 집 짓는 자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은 집을 짓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은 집을 짓는 사람인데 어리석게 집을 짓는 사람과 지혜롭게 집을 짓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을 지을 때 모래 위에 기초를 세워 집을 짓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집을 짓기는 매우 편하고 쉽겠지만 홍수가 나면 홍수에 모래가 휩쓸려 나가 기초가 약해져 집이 무너지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집을 짓는데 반석을 뚫어 기초를 놓을 때 힘들고 비용이 훨씬 많이 들겠지만 반석 위에 지는 집은 홍수가 나도 흔들림 없이 튼튼히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지혜로운 사람처럼 각자가 믿음의 집을 지을 때 하나님의 말씀 위에 기초를 단단히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것과 신앙생활 하는 것을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집을 잘 짓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가 기초입니다. 좋은 집을 지으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튼튼한 기초위에 집을 세우지 않으면 아무리 외형을 잘 지었어도 지진과 홍수가 나면 균열이 생기고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건물을 지을 때 기초의 크기를 보면 그 위에 세워지는 집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튼튼한 집이 세워지는 가는 기초가 얼마나 튼튼한가를 보면 압니다. 

어느 분이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의 당구치는 실력을 비교하면서 기초에 대해 강조하는 글을 읽고 전적으로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 사람과 한국 사람이 같이 당구를 시작하면 배우는 속도가 한국 사람이 빠르답니다. 한국 사람이 100점을 치면 대개 일본 사람들은 50점대에서 낑낑대고, 한국 사람이 200점 정도 칠 때 쯤 일본 사람들은 겨우 100여점을 칠만큼 일반적으로 한국 사람들에게 뒤진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거의 예외 없이 500점은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 먼저 친답니다.

한국 사람들은 당구를 배울 때 대개 성격이 급해서 꼼꼼히 기초부터 잘 배우려 하지 않는 답니다. 어느 정도 기초가 되면 더 이상 배우려하지 않고 그냥 대충 감으로 치려고 하는데, 그 감이 아주 뛰어나서 일본 사람들이 좀처럼 따라 오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처음부터 기초를 중시 한다는 것입니다. 더디 가는 한이 있어도 기초를 꼼꼼히 배우고 훈련한다는 것입니다.

당구는 대충 감으로 200점과 300점 정도는 칠 수 있는데 500점 이상은 감으로만은 안되고 기초가 튼튼해야만 칠 수 있는 점수랍니다. 당연히 감에 의존하는 한국 사람이 200점에서 300점 까지는 먼저 올라가지만 기초와 끝없는 훈련에 의존해야 하는 500점은 일본 사람들이 먼저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기초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부족한 것이 기초 의식입니다. 우리 사회를 이끌어 왔던 시대 정신이 원칙과 원리보다 요령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든, 운동을 하든, 예능을 하든,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목회를 하든 끝까지 계속해서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하고 기본이 탄탄해야 합니다. 원리와 원칙이 중하게 여겨지고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회 구석 구석을 지배하는 정신은 원칙과 원리가 아니라 요령과 변칙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습니다. ‘꿩 잡는게 매다’라는 말이 우리 사회 어디에서든 통했던 것처럼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착하기는 하지만 바보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우리 사회가 그렇게 바라는 ‘선진국, 선진화’가 요령과 감, 그리고 변칙에 익숙한 모습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선진화는 요령과 감으로 이끌어지는 사회가 아닌 원칙과 원리가 이끌어 가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원칙과 원리를 중시하는 사회의식으로 사회의 기초가 튼튼히 세워질 때 그 위에 진정한 선진화가 이뤄질 것입니다.   

작은 판자 집 하나를 지을 때는 설계가 거의 필요 없습니다. 대충 생각하고 열심히 뚝딱 거리면 대충 비를 가리고 살 수 있는 판자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고 아름답고 안전한 집을 지으려면 훌륭한 설계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크고 아름답고 안전한 집을 설계하는 설계사는 건축의 원리와 원칙에 통달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집을 짓는다면 백발백중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크고 아름답고 안전한 집을 건축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는다면 그것은 건축의 원리와 원칙에 입각해 설계대로 성실하게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회사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교회도 그 기초를 어디에 두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교회의 기초를 어디에 두느냐가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기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10,11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 둔것 외에는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교회의 기초는 어느 사람도, 어느 사건도, 어느 상황도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려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밭으로 데리고 나가서 소가 끄는 쟁기를 아들의 손에 쥐어 주며 밭을 갈아 보라고 했습니다. 아들이 쟁기를 들고 밭을 가는데 밭고랑이 똑바르지가 않고 엉망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왜 제가 갈은 밭고랑은 이렇게 삐뚤빼뚤하게 엉망이 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너는 쟁기를 잡고 무엇을 보며 쫓아갔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쟁기를 끄는 소의 엉덩이를 보고 따라 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가까이 있는 소의 엉덩이를 보고 쟁기를 끌면 안되고 멀리 있는 목표물을 보고 쟁기를 끌어야 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고 멀리 있는 목표물을 정해 놓고 쟁기를 끌었습니다. 그런데도 밭고랑이 엉망이었습니다. 다시 아들이 ‘아버지, 멀리 있는 목표물을 보고 쟁기를 끌었는데도 밭고랑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멀리 있는 것 중에 어떤 것을 목표물로 정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저기 뛰어 다니는 강아지를 목표물로 정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리 저리 움직이는 목표물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것을 목표물로 정하고 쟁기를 끌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멀리 서 있는 소나무를 목표물로 정하고 소나무를 똑바로 바라보고 쟁기를 끌었습니다. 밭고랑이 곧게 매어졌습니다. 어떤 것을 목표물로 삼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밭고랑이 달라집니다. 

교회와 우리의 신앙이 시류에 흔들리는 가치를 목표 삼아 바라보고 좇아 간다면 그것은 믿음의 쟁기를 들고 소의 엉덩이나, 멀리서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보고 쟁기를 끄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우리의 신앙 목표는 세상의 가치에 따라 흔들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재물이 우리 신앙의 목표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건강이 우리 신앙의 목표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권력이 우리 신앙의 목표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 자녀의 성공이 우리 신앙의 목표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가지고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목표가 분명하면 그 수단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가 있는지 모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집을 짓는 비유를 말하면서 기초를 이처럼 강조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삶의 기초가 되는 예수님이 자꾸 삶의 기초의 자리에서 자꾸 뒤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예수님은 자꾸 뒤로 밀려나고 사람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지만 예수님은 계시지 않고 자신들만이 즐기는 친교 모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피사의 사탑의 지반이 약해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탑이 기울어지듯이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의 기초가 시간이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고 그로 인해 믿음의 공동체와 믿음의 사람들이 허물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다시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생활을 영원한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위에 굳건히 세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우리 개인과 가정이, 그리고 교회가 믿음의 집을 짓는데 있어서 그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 위에 확고하게 놓여져 있는지 점검하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는 우리의 삶과 가정, 그리고 교회가 주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충만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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